지문
이선영 지음 / 비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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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만 먹으면 나를 공격하는 모든 폭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은데, 내가 그 폭력에 맞서 싸우며 이길 것 같은데. 우리는 생각만큼 그 폭력에서 벗어나는 게 쉽지 않다는 것도 안다. 싸우고 이기고자 애쓰지만, 타인의 시선까지 감당해야 하는 일에 또 무너진다. 당사자가 겪은 아픔을 우리가 얼마나 알고 이해할 수 있다고... 타인이 보는 피해자의 삶은 또 다르다. 발버둥을 치다가 무력해지는 마음이 아픈 것을 보지 못하고, 그저 남의 일이니까 쉽게 말하는 것 또한 폭력이라는 걸 모른다. 어쨌든, 때로는 타인의 도움을 받기도 하겠지만, 어디까지나 우리 자신이 싸우고 이겨내야 할 일이라는 것을.


좌천되듯 시골의 경찰서로 발령받은 형사 규민은 산에서 실족사한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다. 한눈에 봐도 실족사였다. 여자였고, 팔과 다리는 뒤로 꺾여 있었다. 시신의 발견 지점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죽은 여자의 구두와 유서도 발견되었다. “증오하면서 사랑한다. (25페이지)” 여자의 유서는 간결했다. 그 간결함 속에 어떤 의미가 담겼는지 찾아내는 것 또한 형사의 일이었다. 곧 여자의 신원이 확인되었다. 죽은 여자는 오기현이었고, 며칠 전에 여자의 언니 윤의현이 실종 신고를 한 것도 확인되었다. 형사는 윤의현에게 오기현의 죽음을 알리고 사인을 말해주지만, 오기현의 아버지 오창기에게도 시신 확인을 했지만, 이상하게 실족사로 처리하기에는 미심쩍다. 더 확인을 해봐야겠다며 오기현 주변을 탐문하지만, 속 시원하게 드러나는 정황이 없다. 그러면서도 오기현이 자살이나 실족사는 아닐 거로 믿는다. 그 와중에 드러난 오기현의 가족사와 오창기 주변 인물들이 숨기는 그 마을의 분위기를 파악한다. 거기에 윤의현의 주변을 의심하는 것 역시 놓치지 않는다.


소설은 두 가지 시선에서 진행된다. 죽은 오기현을 중심으로 사건 해결에 나서는 형사의 시선이고, 오기현의 언니 윤의현의 일상을 비춘다. 얼핏 윤의현이 대학에서 강의하는 일이 전부일 것 같으면서도, 그녀의 학생이 담당 교수의 성추행 피해자로 등장하면서 다른 이야기를 꺼낸다. 권력의 편에 서서 학생들의 목소리를 피해가려고 했던 강사가 왜 마음을 바꿔 학생의 편에 서서 도우려고 했는지 의아했다. 같은 여자여서 그런가, 아니면 학생들의 성추행 피해에 모른 척했던 태도를 반성하는 거였나. 그것도 아니면 학교를 떠날 생각에 이런저런 눈치를 볼 게 없어진 건가. 윤의현의 의도가 무엇이든 학생들 편에서 성추행 교수를 벌하려는 모습에 기운이 났다. 생각해보면 누구라도 나를 도와줄 수 있다면 의지하고 도움받고 싶으리라. 권력의 상하 관계에 있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러려니 모른 척 넘어가기에는 상처가 너무 컸다. 그 상처를 드러내고 치료하기에는 앞으로의 삶이 고단해질 것을 알기에 괴로웠다. 그래서 포기하고 싶어졌던 그때 윤의현이 힘을 보탠다. 학생들이 그 성추행의 근원을 뽑아낼 수 있도록.


한편으로 사망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의 시선은 묻어두려고 애쓰던 또 다른 폭력을 발견한다. 본인이 선택할 수 없는 인생의 순간들에 쳐들어온 폭력은 기를 쓰고 벗어나고 싶어도 불가능했다. 어린 오기현은 오창기의 딸로 살면서 아버지를 혐오했다. 이 가족의 역사를 살피던 형사는 오창기는 물론 마을 사람들이 숨기는 게 무엇인지 찾아내야 했다. 마을 유지이면서 마을 사람들의 생계를 쥐고 있는 오창기의 권력은 또 다른 희생자들을 만들고 있음에도, 누구도 선뜻 오창기의 폭력과 횡포를 말하지 못했다. 그들이 입을 열면 닥칠 불행을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형사는 성이 다른 오기현과 윤의현 자매, 오창기와 마을 사람들의 비밀, 화원의 관리인 신명호와 오창기 가족, 윤의현과 성추행 피해 학생의 연대, 윤의현의 성공을 만들 영화사 관계자 등 얽히고설킨 이들의 모든 관계를 풀어야 했다. 소설은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고, 형사가 풀어가는 사건이 하나로 귀결되면서 마주하는 진실이 놀라울 뿐이다. , 이런 결말, 이런 끔찍함, 이런 상처, 이런 복수. 진실이 하나씩 드러날 때마다, 오히려 그 진실을 몰랐으면 덜 아팠을까 싶을 정도로 아프다.


누구나 상처를 앓고 산다. 크고 작게, 치유하거나 묻어두면서. 하지만 그 상처를 끝내 드러내지 못하고 아프게 살아가기만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가정폭력이나 아동학대, 성폭력 등 다양한 폭력에 시달리면서도 외면당하는. 이 소설에서는 누군가의 폭력이 더 섬세하게 그려진다. 사건을 추적하고 서술하는 인물들이 가해자와 피해자가 아니어서 더 섬세하게 말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 끔찍하고 더 고통스러웠다. 차마 말하지 못하는 것까지 꺼낼 수 있었던 건 한 발 떨어져서 보고 있었기 때문이겠지. 그건 우리가 타인의 상처에 무관심할 수도 있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닿지 않은 상태로 지켜보고 있기에, 내 일이 아니어서 모른 척하기 쉽고, 권력에 고개 숙이기도 하는 인생사에 비굴해지기도 하면서. 하지만 계속 그렇게만 살아간다면, 진실의 대가 앞에서 다시 고개를 숙여야 할 것이다. 마치 이 소설이 보여준 죄와 벌처럼 말이다.


서로 다른 시선과 방향에서 접근하는 전개가 무엇을 보여줄지 궁금했는데, 소설이 중반을 넘어서면서 조금씩 보이는 것들로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예상한 게 전부 맞지는 않았지만,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와 닿았기에 차근차근 그 목소리에 다가갔다. 구석구석에 숨겨놓은 속임수가 진실을 찾아내는 단서가 되어 흥미롭기도 했다. 인간의 욕망이 일으키는 일들을 지켜봐야 했지만, 용기 낸 자의 힘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는 정의를 마주하는 일은 감동이었다. 세상의, 사람들의 인식이 어느 방향을 향해야 하는지 그대로 보여주는 마무리에 용기를 갖는다. 우리가 겪는 상처는 치유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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