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의 자세 소설Q
김유담 지음 / 창비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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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탕이 울기 좋은 곳이라는 건 목욕탕에서 울어본 사람만이 안다. 세상에 태어난 순간부터 우리가 긴장하지 않고 살아갈 시간은 없는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부딪히고 저기서 치이고, 그나마 알몸으로 들어간 곳에서나마 속이 시원하게 눈물이라도 흘릴 수 있는 거겠지. 이유는 다르겠지만, 나도 목욕탕에서 울어봤다. 눈이 빨개지도록 울면서 샤워 물줄기로 흘러내렸다. 가끔 집에서도 그럴 때가 있다. 누구나 비슷하지 않을까. 살면서 울고 싶은 순간이 없을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이 보는 데서 울고 싶지도 않고, 왜 우는지 다 설명할 수도 없다. 나만의 공간에서 흘리고 싶은 눈물이라면, 집의 목욕탕이나 조금은 시끄러운 공중목욕탕은 울기에 최적의 장소이기도 하다. ‘나는 종종 공중목욕탕에서 우는 여자들은 본다라는 첫 문장 때문에라도 이 소설은 저절로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엄마 오혜자는 일찍 남편을 잃고 혼자서 딸 유라를 키웠다. 타고난 외모와 피부, 입담으로 동네에서 화장품을 팔며 제법 여유로운 삶이었다. 엄마가 남자를 만나고 사기를 당하면서 모녀의 삶을 바닥으로 내려왔다. 어린 딸을 데리고 공중목욕탕 선녀탕으로 입성한 엄마는 선녀탕에서 자고 먹고 때밀이로 일하며 악착같이 살았다. 유라는 선녀탕이 만수불가마사우나로 변하고 나서도 한참이나 그곳에서 지냈다. 우연히 무용을 배우면서 유라는 상도 타고 대학 진학까지 한다. 엄마의 고된 삶의 힘은 딸 유라였다. 무용가로 이름을 날리고, 남자나 결혼도 의미 없으니 딸의 성공한 삶을 바랐다. 엄마뿐만이 아니다. 유라 역시 무용가로 살면서 성공하고 싶었다. 여탕을 탈출할 유일한 기회였다.


목욕탕은 계급장을 떼고 사람과 사람이 알몸으로 만나는 곳이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엄연히 서열과 위계가 존재했다. 여탕에서는 피부와 몸매 관리, 재테크, 자식 교육에 능한 여자들의 입김이 세고 서열이 높았다. 예쁘고 날씬한 데다 재개발이 예정된 지역의 아파트를 가지고 있고, 자식 대학까지 잘 보낸 엄마를 사람들이 대놓고 무시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때밀이 아줌마를 부러워하는 사람은 없었다. 때밀이인데도 불구하고 아름답고, 돈을 잘 벌고, 자식을 잘 키운 여자. 엄마의 모든 행위 앞에는 불구하고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그것은 아빠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엄마가 때를 밀어 키웠음에도 불구하고, 무용을 전공하고 있는 내게도 마찬가지로 따라다니는 수식어였다. ‘불구하고라는 수식어는 어쩌면 불과하다와 같은 말인지도 모른다. 때밀이임에도 불구하고 대단한 일을 해냈다고 엄마를 추켜세우는 목소리는 역설적으로 그녀가 때밀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 모녀에게 끊임없이 상기시켰다. (106~107페이지)


엄마와 딸의 인생 대부분은 여탕에서였다. 오랜 세월 세신사로 일하며 삶을 꾸려온 엄마는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어도 여탕을 떠나지 않았다. 딸은 성인이 되고 더는 여탕에서 살지도 않지만, 여탕에 드나들며 여자들을 봤다. 사실 누구나 비슷하게 생각할 것 같다. 알몸으로 들어가는 곳, 다 벗고 들어가서 몸뚱이만 있으니 다 똑같다고. 계급장 떼고 알몸으로, 오직 사람으로 만나는 곳이지만 이곳에서도 위계는 있다. 그곳에 모여든 사람들은 자식 얘기, 돈 얘기, 정보력으로 서열을 만든다. 사람들은 오혜자의 몸매와 명문여대에 다니는 딸을 부러워하지만, 실상 그들이 보는 오혜자는 남편도 없이 딸 하나 키우는 목욕탕 때밀이에 불과하다. 그들이 말하는 정상 가족의 범주에서 한참 벗어나 있는 사람이니까 말이다. 그 정상에 포함되지 않는 건 목욕탕에 드나드는 오회장도 마찬가지다. 상당한 카리스마로 수입품 취급하며 부자였고, 회장님으로 불리며 우러러보는 것 같지만, 그들의 눈에는 그저 정상의 삶이 아닌 무시의 대상일 뿐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혜자에게는 몸을 맡기는 모든 이가 그저 똑같은 고객이다. ‘도둑년 돈이든 갈보년 돈이든자기에게 돈이 들어오게 하는 대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어쩌면 오혜자의 태도가 가장 살기 좋은 삶의 자세는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목욕탕에 드나드는 여자들을 보면 알게 모르게 보이는 계급이 아니라, 그저 때를 밀러 오는 삶이 고단한 사람들이다. 몸의 고단함을 풀기 위해 오혜자를 찾고 목욕탕의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근다. 노동으로 쌓인 피로를 풀고 팍팍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는 반복이 거듭되는 와중에 세상의 기준을 놓지도 않는다. 오혜자에게 딸의 성공은 자신의 성공이기도 하기에, 딸을 무용으로 성공시키기 위한 의지를 놓지 못한다. 그건 목욕탕에 모인 여자들이 나누는 이야기 속에서 파악되는 서열의 문제이기도 하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많이 가진 자와 덜 가진 자, 자식이 좋은 대학에 가고 유명해지고 성공하는 일이 자기의 일이 되어 자랑이 되는 일들. 낯설지 않다. 우리 주변 곳곳에서 보이는 사람들의 관계에서 익숙하게 보이는 장면이지 않은가. 하지만 이들에게 이게 삶의 전부일까. 남들에게 보여주고 비교하며 더 나은 삶이라고 말하고 싶은 순간을 만들려고 애쓰는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몸은 긴장한다. 느긋하게 몸을 쉬고 삶의 긴장을 놓으려고 찾아드는 곳에서 오히려 몸의 긴장을 더 보게 되는 이야기였다. 그런 내용은 엄마 오혜자와 딸 유라의 일상에서 더 잘 보인다.


분홍색 가방에 담긴 키티 도시락과 보온병 세트를 생각하면 지금도 배가 고파진다. 그것은 내 허기가 아니라 엄마의 허영을 채우기 위한 도시락이었다. 엄마가 내게 무용을 가르쳤던 것도 그런 종류의 허영이었다는 것을 안다. (76페이지)


엄마는 사람들의 긴장된 몸을 풀어주는 일을 한다. 힘을 쭉 빼고 누운 사람들의 때를 밀며 그들의 피로를 풀어준다. 손님으로 오는 사람들이 밖에서 긴장하고 보냈던 시간에 보상이라도 받듯이 몸의 이완을 만드는 시간이다. 오혜자의 역할은 그런 것이다. 반면 딸 유라의 삶은 몸의 긴장으로 가득한 시간이다. 무용하는 딸은 긴장을 놓치지 않고 아름다운 몸을 만들어야만 한다. 엄마와 딸의 이런 삶이 운명 같기도 하다. 그렇다고 딸이 긴장을 풀려고 엄마에게 몸을 맡기지도 않는다. 같은 삶을 공유하는 것 같으면서도 서로 다른 긴장과 이완의 삶을 유지한다. 그러면서도 각자의 이완을 또 찾아내는 일이 기적 같다. 이 기적은 몸의 불편함과 불완전함으로 긴장하던 사람들에게도 찾아왔다.


여탕에 자주 오던 오회장은 엄마에게 자주 몸을 맡겼다. 엄마가 자존감을 세우며 당당하게 일의 규칙을 정하며 살 수 있던 것도 오회장의 힘이 어느 정도는 작용했다. 그런 오회장은 유방암 수술을 하고 한쪽 가슴이 없음에도 여탕에 아무렇지도 않게 드나들었다. 처음에는 여자들이 그런 오회장의 알몸을 흘긋거렸는데, 점점 한쪽 가슴이 없는 오회장의 몸은 아무 일도 아닌 게 됐다. 무슨 영험한 장소라도 되는 것처럼 만수불가마사우나 여탕에는 유방암 수술을 받은 여자들의 출입이 늘었다. 다른 곳이 아픈, 아팠던 사람들도 자주 드나들었다. 그들은 서로의 경험을 공유하면서 한쪽이 사라진 가슴 따위로 긴장하지 않았다. 감추고 움츠러들면서 여탕의 출입을 걱정하지도 않았다. 계급장 떼고 알몸으로, 겉으로 보기에는 서로 동등한 곳이었다. 가슴 속 말이나 등급을 매기는 시선을 살짝 숨기고 있지만, 그건 누구라도 비슷할 테니까. 여탕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각자의 몸을 씻으면서 어디서 한 번쯤 봤을 사연의 주인공들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알몸이지만 알몸 같지 않은 태도를 가진 속내를 엿보는 기분이 들면서도, 내 몸이 가장 편하게 다가오길 바라는 갈증을 담은 이야기다. 충분히 나로 살아가기에 괜찮은 기회를 만들 수 있다고 말해준다.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도 지나고 나면 전부 아무것도 아니더라.” (163페이지)


엄마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허공에 대고 읊조렸다.

오늘 못하면 다음에 하면 돼. 인생은 지겹도록 기니까.” (165페이지)


그동안의 삶이 만든 관조적 시선일까, 아니면 그것 말고는 다른 답을 찾을 수 없었다는 유일한 답이었을까. 굳어진 몸으로 목욕탕에 왔던 딸에게 알몸으로 누워있던 엄마가 했던 말은, 오늘 못하면 다음에 하면 된다고, 인생은 지겹도록 길다는 거였다. 여탕에 드나드는 여자들의 고단한 삶을 보면서 엄마가 배운 인생이었는지도, 항상 긴장하던 딸의 삶에 누그러짐을 알게 해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비록 성공한 삶은 아니었지만 실패하지도 않은 삶이 나쁘지는 않더라고 말이다. 고달프고 쓸쓸했지만, 아무리 애써도 만족할 때까지는 못 갔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말한다. 바라는 곳을 향해 아등바등 살아가다가 나를 누르는 고단함이 쌓여가는 줄도 모르고 있던 순간을 지적해주는 것만 같다. 굳어진 내 몸이 조금은 풀어지기를, 내 몸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면서 나를 옥죄는 것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읽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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