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사람만 아는 배우 공상표의 필모그래피 오늘의 젊은 작가 26
김병운 지음 / 민음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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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점점 편해지는 자리 중의 하나가, 굳이 나를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거였다. 바닥까지 보이지 않아도 되는, 적당히 분위기 맞추고 서로 나쁘지 않게 이야기하는, 진짜가 아니어도 되지만 가짜일 필요도 없이 서로 이어갈 수 있는 사이와 자리. 나만 그런가? 그건 아닐 것 같다. 어느 순간 이게 내 진심은 아니어도 꼭 내 진심을 이 자리에서 꺼내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 순간적으로 연기를 한다. 진짜 모습은 잠시 접어두고 껍데기만 살짝 보이는 것으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 불가능하지 않다. 누구라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언제까지 가능할까. 그렇게 드러내지 못한 진심과 진짜 모습이 어느 순간 폭발하듯 터져 나오는 건 아닐까?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타인이 우리 모습에 그렇게 많은 관심을 두고 살지도 않을 것 같은데, 막상 살아가는 순간들을 떠올려 보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작게 크게, 알게 모르게 혹시나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과 불안으로 나를 꺼내지 못한 순간들이 떠오른다.


배우 공상표(강은성)의 인생도 비슷했다. 아니, 공상표는 우리가 소박하게 드러내지 않은 진짜와 사뭇 다른 비밀을 갖고 있다. 그는 게이다. 어렸을 적부터 그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알아챘고,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자신이 성 소수자의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러다가 영화감독이자 학교 선배인 김영우를 만나면서 그는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자신의 성 정체성을 김영우와 나눈다. 그렇게 공상표는 두 개의 삶을 가진다. 배우 공상표로 대중의 사랑을 받으면서 괜찮은 남자로 이미지 관리를 하고,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는 연인 김영우와 사랑을 나누며 그의 진짜 모습을 편하게 꺼내놓고 산다. 김영우의 말처럼 그는 김영우의 집에서만 연인이 되었으며, 그곳을 떠나는 순간 배우 공상표의 삶으로 들어간다. 커밍아웃하지 못하고 현실의 삶을 관리해야 하는 공상표로 살아가는 순간들이 힘들지만, 더 힘들어지는 삶 역시 받아들일 수 없기에 말이다. 언제까지 이런 이중생활이 가능할까 싶기에 그가 조금 더 편하게 다 밝혔으면 싶지만, 누구도 함부로 그의 인생을 재단할 수는 없다. 그가 선택한 삶, 대중과 엄마가 바라는 모습으로 연기하며 살아가는 시간은 그의 필모그래피로 차곡차곡 쌓여간다.


서른 해 가까이 살면서 그가 분명히 알게 된 것 두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아무리 밝고 긍정적인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제 몫의 어둠과 그늘이 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오랫동안 꼭꼭 숨겨 두어서 자신조차도 그 모양과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마음의 우물을 누군가에게 열어 보인다는 건 정말이지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이었다. (169~170페이지)


나를 드러내는 일이, 나의 정체성을 밝히는 일이 왜 이렇게 치열해야만 할까. 공상표는 자신의 정체성이 드러나면 그의 삶 전체가 망할 거로 생각한다. 배우 이미지에 치명타를 입을 것이며, 자기만을 바라보고 살아온 엄마가 받을 충격에, 사람들이 성 소수자를 바라보는 편견을 그대로 견뎌야 하는 게 두려웠다. 그 공포를 꼭꼭 눌러 담으며 살아오다가 겨우 커밍아웃을 한 상대는 연인이 된 김영우다. 연인에게만큼은 그가 감당하는 모순의 순간을 벗어버리고, 평생 그를 불안하게 했던 것들로 보호받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연인은 내가 가장 설레는 상대이기도 하지만, 내가 많이 편하게 지내고 싶은 대상이기도 하기에 그는 알게 모르게 지켜온 그의 비밀을 털어놓는 순간 해방감을 느꼈을 테지. 하지만 공상표가 한 가지 간과한 게 있다. 연인 사이에서도 사람이 느끼는 기본적인 질투와 절망, 배신감 같은 나쁜 감정이 존재한다는 거다.


김영우는 그냥 좋았다. 아직 입봉하지 못했지만 연인 강은성이 옆에 있었고, 자신의 꿈을 지지하고 응원해주었기에. 가족들은 그의 커밍아웃 앞에서 절연했지만 그들에게 받았던 인간 이하의 취급을 생각하면 오히려 그게 나았으니까. 그러면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세상에 드러내지 못하는 답답함과 두려움은 여전했다. 진짜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 너무 험난했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면서 서술하는 인물은 공상표와 김영우뿐만은 아니었다. 공상표의 엄마 김미승, 소속사 대표 양병진, 공상표의 누나 강은진까지 다양하다. 각각의 인물이 왜 서로 다른 공상표의 모습을 이야기할까 싶어서 궁금했는데, 그들의 입으로 나오는 말과 생각들은 우리가 익히 아는 성 소수자를 바라보는 시선을 대변하는 건 아닐까 싶다. 엄마 김미승은 아들이 전부였으며 아들이 게이라는 걸 인정할 수 없었다. 아들이 게이라는 게 알려진 순간 인생이 끝나리라고 여겼다. 암암리에 공상표의 게이설은 이미 한참 전부터 돌기 시작했다. 그에 양병진을 통해 아들의 게이설을 감출 스캔들을 기획하고, 강은진은 엄마의 계획을 좀 더 확실히 완료하고자 동참한다. 이들의 연합은 절대 공상표가 게이라는 게 알려지면 안 된다는 공통된 의지로 행해졌다. 왜 공상표가 게이라는 게 알려지면 안 되나? 아마도 그 이유는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으리라.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정작 공상표가 바라는 것을 제대로 듣지 못했던 것 같다.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놓고 편해지고 싶었던 마음과 커밍아웃 후에 자기가 감당해야 할 삶의 불안한 현실 사이의 양가감정에 혼란스러웠을 테다. 그러던 어느 날, 김영우의 영화에 게이로 출연한 자기 모습을 마주한 공상표는 현실에서 달아난다. 게이 연기를 하는 진짜 자기 모습을 혐오스럽다고 여긴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며 살았던 세계에 깊이 빠져들었던 걸까. 한없이 불안해 보이고 일관되지 못한 태도의 그에게 어서 한 가지 선택을 하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그 질문을 나에게 되돌려 보면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성 정체성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정상이라고 말하는 생활을 하는 나도 어떤 불안을 잠재우고 진실을 드러내기 위한 선택 앞에서 망설이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없을 테니까.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온 모든 것을 걸고 이제 자신을 살아가고 싶은 인생을 만들기 위한 커밍아웃이 결코 쉬울 리 없다. 그런데도 그가 자신을 찾아가야만 했던 이유가 소설의 2부에 드러난다. 1부가 그의 변명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면, 2부는 그가 살아가고 싶은 시간을 선택한 이유를 그린다. 마음과 다르게 살아왔던 순간을 버리고 그 자신을 사랑하며 살아갈 용기를 얻는 시간이라고 해도 되겠다. 오랫동안 자기혐오에 시달렸던 그가 이제 정말로 자기를 사랑할 준비가 되었다는 다짐 같이 들린다.


자기 자신을 찾는 일이, 자기를 버리는 일이 되어야만 하는 아이러니를 경험했다. 소설의 끝에 부록으로 실린 배우 공상표의 필모그래피가 그 흐름을 대신 말한다. 그가 출연한 작품들과 배역의 특징들을 간략하게 소개한 부분에서 그가 어떻게 배우의 길을 걸어왔고, 또 어떻게 그 자신을 찾아가고 있는지 그대로 보인다. 한 사람의 궤적이자 배우의 기록이고, 한 사람이 진짜 자기를 찾아가는 변화를 포착한다.


세상에, 누군가에게 나를 그대로 보여주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을 것 같지만, 사실은 너무 어려운 일이다. 나의 말과 행동 하나가 어떻게 되돌아올지 몰라서 두렵기도 하다. 내 진심과 다르게 전달되는 말들에 오해가 생기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적으로 되는 건 아닐까 하는 무서움이 먼저 떠오르곤 한다. 어쩌면 굳이 나를 드러내지 않아도 충분히 살아지는 세상이기에, 진짜 나를 애써 보여줄 필요가 없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공상표(강은성)의 고백 같은 이야기가 공감되는 이유는 우리가 사는 이 현실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가 왜 자기 인생과 사랑을 그대로 말할 수 없었는지 너무 잘 알아서 이해되는, 누군가 자기 존재로 있고 싶은 마음을 외면할 수밖에 없는 세상의 시선을 알기에 그에게 강요할 수 없었다. 어서 고백하라고, 용기 있게 존재를 드러내고 말할 수 없었다. 자기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힘들어지는 삶에 가까이 가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선택했다. 그 자신에게 더 가까이 가고자, 그가 사랑하는 모든 것에게 인정받고자 고백했다. 애써 숨기고 감추면서 살아왔던 외로움을 더는 겪지 않으려고 말했다. 이제 진짜 인생을 살고 싶어서.


결국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고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소설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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