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으로부터,
정세랑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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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지지 않는 것들로 우리는 연결되어 있지. 이럴 때는 무척 가족 같군. 세 사람은 그렇게 눈빛을 주고받았다. (297페이지)


나의 죽음이 가까운 이들로부터 어떤 모습이면 좋을까 하는 상상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없는 나의 장례식을 저기 멀리서 지켜보는 기분이랄까. 상상이기에 가능한 장면을 떠올리면 궁금하기 그지없다. 내가 없을 때 나오는 말과 기억이, 그들에게는 나를 대했던 가장 진심일 테니까 말이다. 누군가의 어머니이자 장모이고, 할머니이자 외할머니였을 심시선의 죽음 10주기를 두고 펼쳐진 이들의 여행이 유쾌하다. 그리고 기억 속 심시선을 꺼내는 이들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기대된다.


소설은 챕터마다 죽은 심시선의 과거 어록을 앞세우고 시작한다. 그녀가 한때 출연했을 방송이나 인터뷰, 글에서 했던 말과 생각이 먼저 나오고, 그녀의 가족 중 한 사람의 기억이나 생각이 이어진다. 다소 충격적이었던 건 그 시절(20세기)에 방송에서 한국의 제사 문화를 까댔던 심시선의 말이었다. 제사는 사라져야 할 관습이라고 했다. 그녀의 말은 유언이 되어 가족들에게 제사를 지내지 말라고 당부했고, 무덤도 만들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지금 심시선의 가족은 그녀를 기억하기 위해 찾아갈 곳이 없다. 그 와중에 그녀의 큰딸 명혜는 엄마의 10주기를 기념하자면서 가족들을 끌고 하와이로 향한다. 뜬금없는 하와이는 또 뭔가 싶지만, 그들 나름대로 찾아낸 엄마의 장소이다. 하와이는 젊은 시절의 엄마가 한때 지냈던 곳이다. 사진신부로 가서 살다가, 화가 마티어스 마이어를 만나 독일로 가기 전까지 머물렀던 곳이며, 엄마가 치열하게 살면서 화가의 꿈을 키웠던 곳이기도 하다. 그곳에 가서 엄마를 떠올리자는 명혜의 말은 아무도 거스를 수 없었고, 가족 여행 아닌 여행으로 모두 하와이로 간다.


누구를 위한 제사인가 싶지만, 사실은 시선의 흔적을 좇으면서 그들 각자의 오늘을 살아가는 힘을 받는 일이 된다. 각자 하와이를 여행하며 기뻤던 순간을 찾아내고, 이 기쁨의 순간을 만끽하기 위해 이제껏 살아왔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것, 물건이든 경험이든 그 자체를 공유해도 좋으니 하나씩 찾아와서 심시선의 10주기를 기리는 장소에서 공개하자고 한다. 기간은 다 며칠이다. 심시선의 기일까지 찾아야 한다. 가족들은 모두 흩어져 자기만의 시간을 즐기면서도 심시선의 기일에 보여줄 무언가를 찾는 일을 잊지 않는다.


이쯤 되니 나도 다시 한번 상상의 날개를 펼친다.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아니면 내가 죽고 나서. 누군가를 기억하는 방식이 어땠으면 좋겠다는 그런 게 있나? 가족들끼리 얘기한 적이 있다. 우리는 제사 같은 거 말고 그냥 엄마 납골당 가서 얼굴 보고 같이 모이는 날로 하자고. 명절도 굳이 지킬 필요 없이, 지금처럼 시간 되는 사람만 오면 된다고, 그것도 싫거나 귀찮으면 하지 말자고 말이다. 서로 얼굴 보면서 즐거워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 의미로 보자면 명절이나 제사나 마찬가지다. 서로를 힘들게 한다면 지키고 이어가야 할 문화가 아니겠지. 심시선이라는 한 사람이 살아가던 시대에 꺼내놓은, 제사 문화가 사라져야 할 것이라면 이유가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비슷하겠지만, 여성이 살아가기에 비극적인 시대였기에 더욱 거부감을 느꼈을지도 모르지. 가족들의 기억 속 심시선이 꺼내질 때마다 그녀의 지나간 인생이 한 자락씩 펼쳐지고, 그녀와 함께한 가족 각자의 기억이 하나씩 되살아난다. 죽은 누군가를 기억하려고 챙기는 기일이 이래야 하는 거 아닐까. 의무적으로 모이고 스트레스 만땅 채우는 날이 아니라, 내가 기억하는 죽은 이와의 추억을 기분 좋게 되새김하는 시간을 만드는 날이어야 한다.


"여자도 남의 눈치 보지 말고 큰 거 해야 해요. 좁으면 남들 보고 비키라지. 공간을 크게 크게 쓰고 누가 뭐라든 해결하는 건 남들한테 맡겨버려요. 문제 해결이 직업인 사람들이 따로 있잖습니까? 뻔뻔스럽게, 배려해주지 말고 일을 키우세요. 아주 좋다, 아주 좋아. 좋을 줄 알았어요." (269페이지)


무엇보다 이 소설은 이 시대의 여성이 받았을 폭력과 부조리를 관통하며 현재 심시선의 가족에게 이어진다. 심시선을 제외하고 그녀의 가족들은 전쟁통에 몰살당했다.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난 심시선이라고 비극이 없었을까. 그녀의 오랜 세월에 걸쳐진 비극과 그 이후의 시간을 살아가는 딸과 손녀에게 뻗어간 여성의 삶이 어때야 하는지 보여준다. 마티어스 마우어의 폭력과 낯선 곳에서 이방인의 차별로 시달리다가 자기 삶을 찾아가려던 심시선은 마우어의 자살로 가해진 폭력에 또 한 번 고통 받는다. 그 사건은 평생 심시선의 명성에 빨간줄이 되어 괴롭힌다. 하지만 그녀는 그들의 가해 따위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살아간다. 그리고 명혜의 딸 화수는 협력업체 사장이 자행한 염산 테러에 일상이 무너졌다. 세상으로 다시 나가기가 두려웠고, 온몸을 감싸는 무력감은 그녀의 오늘이 어떨지조차 상상하지 못하게 한다. 그런 화수에게 심시선의 책은 세상의 일그러진 면을 찾고 조용히 그녀가 바라는 세상 속으로 뛰어들게 한다. 이 모든 게 하와이에서 다시 시작된 일이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또 다른 손녀 해림은 친구가 당하던 인종차별에 화를 내고 괴롭힘당했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자기가 믿고 생각하는 대로, 옳다고 여기는 대로 나아갈 수 있는 시선이 이들 가족에게 있었다.


심시선의 인생을 생각하면 웃음보다는 눈물이 앞선다. 그 젊음의 세월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여러 번의 결혼과 성이 다른 아이들을 키우면서 받았을 시선이 얼마나 따가웠을까, 그녀의 생각을 그대로 쏟아내면 되돌아오는 싸늘한 시선과 공격들이 벅찼을 것 같다. 하지만 그녀는 고통스럽거나 벅차하지 않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나아가는 것을 선택했다. 그런 심시선의 영향을 받으면 자란 딸과 손녀에게 그녀의 기가 전해지기라도 했던 걸까. 오늘을 살면서 고통받은 시간이 무색하게 심시선의 10주기를 위한 자리에서 기적 같은 힘이 폭발한 것만 같다. 문득, 내 주변에 내 조상 중에 심시선 같은 여성이 있었다면 우리가 걸어온 시간의 모습이 조금 달랐을까 하는 궁금증과 아쉬움이 생긴다. 누군가를 기억하는 방식이 꼭 제사는 아니어도 되는, 각자가 추억하고 싶은 방식이 꼭 한 가지일 필요는 없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은 세상을 살아가고 싶다.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는 상태로 살아왔으니, 어떻게 죽는지 모르고 또 죽을 것이다. 도중에 가슴이 터져 죽어버리지 않은 것은 어린 자식들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요즘 와서는 그것도 아닌 것 같다. 먼저 죽은 사람들 때문이었다. 애도에서 다음 애도의 웅덩이로 텀벙텀벙 걸으면서도 다 놓아버리지 않은 것은, 내가 먼저 죽은 사람들의 기록관이어서였다. 남은 사람이 기록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도 없을 테니까. 어떤 의미로는 친구들에게 져 술래가 된 것이다. 편을 먹고 내게 미룬 채 먼저들 가버렸다. (239페이지)


뜬금없이 심시선의 10주기를 챙긴다는 가족의 말에 무슨 짓인가 싶었는데, 그들만의 방식으로 특별한 날을 채우는 게 너무 보기 좋아서 신나기까지 했다. 그렇다고 심시선을 위한 날이라는 것을 잊지도 않는다. 각자가 찾은 가장 좋은 것, 살아있으면서 누리고 싶은 간절한 것을 챙겨오려는 그 노력이 정말 고맙기까지 했다. 이동식 조리대를 가져와서까지 만들어낸 팬케이크, 자전거로 땀 흘리며 날랐을 뜨거운 말라사다 도넛, 화산석 자갈, 새의 깃털, 살아있다면 좋아했을 가장 맛 좋은 커피, 무지개 사진, 특히 명혜의 훌라춤은 잊지 못할 것 같다. 누군가를 기억하는 날이, 무거운 분위기로 한껏 점잔을 뺀 제사상 앞이 아니라 마치 파티 같은 자리라는 게 이상하게 낯설지 않고 좋더라. 앞으로 내가 경험할 많은 이의 죽음을 기리는 순간이 이랬으면 좋겠다. 한 사람의 오랜 세월 겪은 희로애락을 추억하듯 곱씹을 수 있는, 죽은 이와 내 삶을 연결해서 나아갈 수 있는 시간으로 만들어진다면 충분하지 않을까.


주인공인 심시선으로부터 이어진 가족의, 혹은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중의적으로 써진 이 소설의 제목이 얼마나 많은 의미를 더 담고 있을지 찾아보는 일이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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