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하다
선현경 지음, 이우일 그림 / 비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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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의 삶을 부러워한 적은 없다. 그러면서도 잠깐씩 외출하는 기분으로 다니는 건 괜찮지 않을까 하면서 짧은 시간의 여행은 기분전환으로 생각하곤 했다. 그래서 이 부부의 여행기가 낯설면서도 살짝 부러우면서도 놀랍기만 하다. 몇 주 몇 달이 아닌 몇 년의 시간을, 아주 이주한 것도 아닌 여행자로 살아간다는 게 어떤 행복을 주는지 궁금했다. 부러움은 잠시 넣어두고, 타지에서 이방인으로의 삶이 이 부부의 인생에 무엇을 만들어주고 있는지 찾아보고 싶었다.

 

이우일이 쓴 『퐅랜, 무엇을 하든 어디로 가든 우린』을 안다. 읽어보진 않았다. 그 책의 분위기 정도를 파악했을 뿐이다. 비슷한 맥락으로 이어진 이번 책은 이우일의 아내 선현경이 썼다. 부부는 포틀랜드와 하와이의 시간을 이렇게 두 권의 책을 쓰게 될 것을 알고 있었을까? 어쩌면 그들의 여행 계획에 책을 쓰는 일도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의 일상이 하나하나 기록되어 책으로 되는 일이 어려운 것은 아닐 테니까. 하지만 낯선 곳에서 적응하기도 모자랄 시간에 이렇게 기록으로 남길 수 있다는 건, 오랜 시간 그리고 써왔던 그들이기에 가능한 거 아닐까? (이 부분에서 잠시 또 부러움을 꺼내 본다. 일상의 기록이 한 권의 책이 되고, 여행이라고 부르지만 잊히지 않을 추억의 한순간으로 깊게 새길 수 있었다는 거 말이다.)

 

그들의 하와이 입성 이후 하나하나 들려오는 정착기가 눈물 난다. 그들의 신혼여행도 그랬겠지만, 워낙 여행을 좋아하는 이들은 어딘가로 간다는 게 무턱대고 겁이 나는 일은 아닐 것이다. 하와이로 가기 전 그들이 머물렀던 포틀랜드의 시간도 적응보다는 즐기는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여행자가 익숙한 그들이 하와이에 갔다고 해서 겁날 게 뭐가 있을까. 전과 다른 점이라면 여기서는 그들의 이동수단도 마련해야 했고, 파도에 몸을 맡기며 보드도 타야 했다는 거? ^^ 중고 직거래로 BMW 산 것은 눈물겹다. 오래됐지만 겉으로 멀쩡해 보이는 그 차가 여러 가지 고장을 드러내며 신고식을 했을 때, 팔 때는 친절하던 판매자가 이런저런 구매 후기 불만을 토로했을 때는 답변조차 하지 않을 때. 한국이나 미국이나 개인 간의 거래는 비슷한 후기를 만들 수도 있구나 했다. 그래도 나쁜 사람들만 있는 건 아니다. 자동차 수리점의 좋은 사람을 만나 어느 정도 고치고 사용하면서 돈 낭비를 안 하게 된 것도 하와이에서의 좋은 기억이리라.

 

계획했던 일정보다 더 늘어난 이 부부의 하와이 생활에 특히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게 하는 건 보디보드인데, 물을 무서워하는 내가 상상하면서 읽은 장면 중의 하나였다. 해변 근처에서 발을 담그기도 무서운데, 그곳에서 파도를 타면서 즐기는 스포츠는 어떤 즐거움을 줄까 궁금하기도 하다. 이우일의 보드 사랑이야 이미 저자가 말해서 알고 있었지만, 그다지 물을 즐기기 않는 것처럼 보였던 저자도 슬금슬금 그 파도타기의 매력에 빠지게 된다. 얼마나 좋았으면 잠깐 한국에 다녀가면서 지하실에 넣어두었던 보드를 가지고 갔겠는가. 수영복 자국 그대로 무슨 옷을 입은 것처럼 보이기도 할 만큼, 부부가 해변에서 보내는 시간은 많다. 좋았으니까 그리했겠지. 싫어했다면 잠깐의 파도 구경으로 끝날 일일 테니까. 얼마나 좋았으면 이 해변 저 해변 투어 하듯이 찾아다니면서 보드를 즐겼을까 싶기도 하다. 어느 순간 빠져든 파도타기는 그들의 일상을 좀 더 열정적으로 만든다. 그 파도 때문에 한국으로의 귀국 일정을 석 달이나 미루었을 정도면 알만하지 않은가. 그게 나빠 보이지가 않는다. 물론 이들의 직업 특성상 오랜 시간 여행자로 살아갈 수 있는 건지도 모르지만, 석 달쯤 귀국 일정을 미룬다고 크게 어긋날 일이 없었을 테지만, 좋아하는 파도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볼 시기와 그걸 즐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간절함을 알 것도 같아서다. 누구든 그런 거 하나쯤 있지 않을까? 이거 하나만은 꼭 보고 싶다는 마음 같은 거 말이다.

 

파도를 타다 보면 엄청난 파도의 힘에 저절로 왜소함을 느낀다. 이 많은 사람들을 다 함께 들었다 놨다 하는 파도에게서 거대한 힘을 느낀다. 그리고 겸허해진다. 바다에게 잘 보이고 싶어진다. 바다에게 슬쩍 고마움과 함께 인사를 건네게 된다. (92페이지)

 

 

머무는 시간이 긴 만큼 일상의 다양함도 늘어났다. 저자는 코바늘 강좌에 가기도 하면서 그곳의 나이 든 사람들과 그곳의 분위기를 한껏 들이마신다. 머무는 기간으로 따지면 여전히 이방인이고 여행자일 뿐이지만, 현지인의 삶을 이렇게 가까이서 오랫동안 흡수하기도 쉽지 않을 일이다. 우쿨렐레를 배우고, 훌라댄스에 몸을 맡기고, 맑은 공기에 푸른 바다에 눈을 뗄 수 없는 그곳이 쉽게 잊히지 않을 듯하다. 파도를 타고,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맨발에 슬리퍼가 일상인 생활이 얼마나 편안함을 주었을지 상상만 해도 마음이 느긋해진다. 계산대 앞에 손님을 두고 직원끼리 잡담하면서 손님을 기다리게 하는 모습, 한국에서라면 어땠을지 상상이 되는가? 그런 긴장된 상황까지 느긋하게 기다리며 다들 그러려니 하면서 걷는 곳이 하와이였다. 그런 생활에, 모든 것을 빠르고 급하게 해결하고 행동해야 하는 이곳의 삶이 잠시 잊히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언제나 습관처럼 하는 말이지만, 우리에게는 그런 느림의 순간이 자주 찾아와야 하는 게 아닐까.

 

이렇게 타지에서 지내는 것이 서울의 생활과 가장 다른 점은 유통기한이 있다는 점이다. 언젠가 끝이 날 시간을 보내고 있다. 사실 늘 우린 그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한번 지나간 시간은 다시 되돌릴 수 없다. 일흔 살의 생일을 맞는 엄마의 웃는 얼굴도, 나보다 작은 꼬맹이 딸과의 포옹도 다시는 오지 않을 마지막 순간들이다. 이곳에 살아보겠다고 왔을 때의 낯설음도, 2019년의 이곳 바다도 다시는 마주할 수 없는 순간들이다. (302페이지)

 

저자의 솔직한 일상을 적은 문장에 이우일의 재밌는 그림까지 더해져, 여행기로의 가벼움과 즐거움이 그대로 묻어나는 책이다. 이 책이 여행 노하우나 안내를 제공하는 책이 아니어서 서운할 사람 있을까? 여행 가이드북은 이미 시중에 많이 나와 있지 않은가. 저자의 분위기가 그대로 느껴지는 이런 이야기 괜히 느긋해지고 편안해져서 읽기 좋았다. 여전히 나는 떠나는 일에 귀찮아하고 낯선 곳의 불편함이 싫어서 여행을 자주 즐기고 싶은 인간은 아니지만, 이런 이야기가 주는 그 느낌은 계속 만나고 싶다. 포르투갈어 ‘창문하다(janealar)’에서 힌트를 얻어 새롭게 탄생한 말이라는 '하와이하다'는, 창문을 통해 세상을 만나고 생각한다는 의미의 ‘창문하다’처럼, 하와이를 통해 세상을 만나고 생각한다는 의미를 그대로 전달한다. 읽는 내내 여행과 일상 그 사이 어디쯤을 만나고 있는 기분에 많이 설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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