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매가 돌아왔다
김범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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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기억하는 할머니는 밥상 위의 고기반찬도 밑으로 슬쩍 내려놓으면서 숨기셨는데, 염병에 걸려 죽었다던 동석이네 할머니는 67년 만에 나타나서 60억을 나눠주겠단다. 부럽다. 배가 많이 아프다. 평생 할머니의 존재를 모르고 살았는데 갑자기 나타나서 그렇게 큰돈을 상속하겠다는 할머니라면, 나는 이 할머니의 67년 인생을 한번 들어나 보자고 할 것 같다. '할매, 어쩌다가 그 큰돈을 손에 쥐게 되셨수?'

 

외모부터 수상한 이 할머니, 정끝순. 10년 넘게 취업준비생 신분으로 살던 동석은 어느 날 나타난 할머니의 존재가 딱히 거북스럽지는 않다. 이러나저러나 집에서 없는 사람 취급당하던 시절을 생각하면, 집안의 종손이라고 미래를 걱정해주면서 이런저런 일거리를 만들어주는 할머니가 새삼 가족 같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동석의 입장이고, 동석의 할아버지는 죽을 때까지 보고 싶지 않았던 배신자를 눈앞에 둔 분노에 휩싸이고, 동석의 아버지와 고모는 평생 엄마를 모르고 살았던 시절을 돌이키며 서러워한다. 갑자기 나타난 시어머니 때문에 어느 줄에 서야 하나 망설이던 동석의 엄마는 할머니의 60억 재산 소식에 냉큼 큰절을 올린다.

 

남편을 배신하고 떠난 아내, 어린 자식들을 두고 소식 한 번 묻지 않은 엄마, 가문에 먹칠하고 다른 남자랑 눈이 맞아 떠나버린 여자로 기억되는 정끝순은 등장 자체가 조용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은가. 할아버지에게는 독립운동하는 이들을 밀고한 배신자로 기억되는 이였고, 아버지와 고모에게는 모성애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어미였고, 뼈대 있는 가문인 최씨 문중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는 몹쓸 년이었을 테니. 게다가 그 집안의 하녀였던 여자를 며느리로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어른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을 텐데, 어쩌다가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은 사연은 뒤로하고 일본놈과 눈이 맞아 사라지기까지 했으니 욕이 안 나올 수가 없었을 테다. 할아버지는 온갖 험한 말로 할머니를 욕하고 폭력까지 쓰지만, 할머니는 금발의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뜯겨나가도 표정이 없다. 하거나 말거나. 자기가 이 집에 나타난 목적만 이루면 된다는 듯이. 그러면 이쯤 해서 궁금해질 것이다. 할머니는 왜 갑자기 67년 만에 나타나서 이 집안을 시끄럽게 하는 것일까? 단지 후손들에게 60억을 물려주기 위해서? 긴긴 세월 타지에서 홀로 외로움에 떨다가 지쳐서? 혹시라도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걸 알아서 용서라도 받으려고?

 

 

소설의 재미는 가족들이 할머니의 60억에 눈독을 들이면서부터 시작된다. 정치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아버지는 정치 자금을 받으려는 목적으로, 이미 가진 게 많은 고모조차도 뭔가 더 얻어낼 게 있을까 하는 욕심으로, 장기 취업준비생 동석은 할머니가 먼저 제시한 사업 자금 때문에 할머니의 편에 선다. 할아버지의 거친 욕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식구들이 돈 때문에 자기에게 알랑방귀를 뀐다는 것을 알면서도 할머니는 신경 쓰지 않는다. 마치 처음부터 그 집안의 일원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스며들면서 60억이라는 무기를 휘두르며 요절복통 최씨 집안의 우두머리가 된다. 이 할머니 은근히 화통하다. 누군가의 공격도 거뜬히 받아내며 상대를 제압한다. 말로 이길 수 있는 자 없을 것이다. 원래 이런 성격이어서 타지에서 거뜬히 살아내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이 집을 찾아왔다는 게 자연스럽다. 그러면서도 할머니에게 드러나지 않은 뭔가를 찾게 된다. 왜. 왜 할머니는 67년의 세월을 보내고 이 시점에 나타났느냔 말이다.

 

가족들의 60억 쟁탈전은 그야말로 코미디다. 돈 앞에서 냉정해질 수 있는 자 누구인가. 나와 봐라.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돈이 간절한 이들이다. 미련을 못 버린 정치도 해야 하고, 번번이 낙방하는 취업을 접고 사업이라도 해야 장손의 얼굴이 서고, 이혼하고 건물 하나 받아왔지만 그것마저도 위태롭고, 하락세를 걷는 구멍가게 수준의 슈퍼마켓 수입도 불안한 이들에게 하나같이 돈이 필요하다. 거기에 고모네 식구까지 붙었으니 이 경쟁률 대입 수능시험보다 더 센 게 아닌가 싶다. 60억을 어떻게 분배하느냐 궁금했던 마음은, 이제 누가 할머니 마음에 들어서 할머니의 입맛대로 나뉘는 유산을 차지할 것인가 하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무조건 할머니의 비위를 거스르면 안 된다. 할머니의 변덕에도 태연해야 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뻥을 치는 할머니의 사연과 유산에도 무던해져야 한다.

 

한편의 유쾌한 드라마를 보는 듯하다. 갑자기 어마어마한 돈을 들고 나타난 할머니, 그 할머니의 돈을 차지하기 위해 할머니 눈에 들려고 발악하는 가족들. 할머니의 돈주머니는 쉽게 열리지 않고, 도대체 이 할머니가 정말 60억을 가졌는지조차 의심이 되는 상황에 쉽게 포기할 수도 없는 그놈의 돈. 하지만 소설의 의미는 돈도 아니고, 유산 상속도 아니다. 갑자기 돌아온 할머니의 진짜 마음을 찾는 데 있다. 할머니가 진짜 60억이 있는지도 중요하지 않다. 할머니가 왜 해방 직전에 도망치듯 떠나가야 했는지, 타국에서 67년의 세월을 어떻게 지내셨는지, 어떤 인생을 살아오면서 오늘에 이르렀는지 듣는 게 중요했다. 물론 이 소설은 처음부터 할머니의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지는 않는다. 감질나게 조금씩, 할머니의 사연이 혹시 이런 게 아닐까 하는 온갖 추측을 하게 만들면서도 진짜 이야기는 꺼내놓지 않는다. 마치 한 번 맞춰보라는 듯이 말이다. 은근히 미스터리하게 풀어가는 할머니의 이야기에 돈을 중심으로 가족들이 보이는 표정과 태도의 변화 또한 놓치지 않는다. 각자 다들 돈에 목말라 있었으니, 어찌 돈을 돈이 아닌 것으로 볼 수 있겠는가. 할머니에게 한 푼이라도 더 받을 수만 있다면, 그 돈으로 이 지겨운 가난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하리. 뭐 이런 기도하는 마음으로 할머니를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동상이몽. 같은 시간 같은 상황을 두고 서로 다른 꿈을 꾸듯, 정끝순 할머니와 식구들의 60억 배 도전은 언제 끝날지 모르게 계속된다. 그 틈틈이 할머니의 과거를 캐내려는 이들과 할머니의 사연을 들으려는 이들과 할머니와 화해하려는 이들의 눈물 어린 이야기가 섞인다. 그리고 잊을 수 없는 고통스러운 역사 속 할머니의 인생이, 대물림하는 폭력의 역사를 쓰던 이 집안의 이야기가 있다. 엉킨 실이 풀리듯 하나하나 풀리는 이야기에 그들의 인생이 다시 보인다. 지난 역사에 희생당하듯 배신자의 누명을 쓴 할머니의 눈물이, 한때 사랑으로 행복했던 사람들 사이에 어느 순간 자리한 폭력의 시작, 20세기 중반에 세상을 살아가던 여자의 기구한 삶이 있었다. 그 삶의 보상이라도 받듯, 어긋나고 뒤틀렸던 인생의 한 부분을 되돌려놓기 위해 67년을 돌아온 할머니의 강한 의지가 다시 보인다. 그저 돈으로 권력을 휘두르려는 한 노인의 발악은 아니었다. 진정으로 찾아야 할 것이 있었던 거다. 돈도 뭣도 의미가 없어진 세월의 끝자락에, 반드시 찾아야 할 그것을 위해 할머니는 그 먼 시간을 돌아서 우리 앞에 왔다. 누군가 숨죽이면서 하지 못한 말을 오랫동안 참았다가 쏟아놓은 느낌이다.

 

2012년 이미 초판 출간 당시에 영화, 드라마, 연극, 뮤지컬의 판권이 모두 팔린 소설이라고 한다. 팔릴 만하다. 독특한 할머니 캐릭터에 주변 인물들 하나같이 그 독특하다. 문장 하나하나가 어떤 장면을 연상하면서 읽게 된다. 저절로 드라마나 영화를 상상하면서 읽게 된다. 물론 코미디여야 할 것이다. 웃음이 빠질 수 없는 이야기니까. ^^ 물론 눈물도 놓치면 안 된다. 서글픈 한 인생의 역사를 듣는 시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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