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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 머리 앤 ㅣ 걸 클래식 컬렉션 1
루시 모드 몽고메리 지음, 고정아 옮김 / 윌북 / 2019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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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앤일까? 어느 순간부터 앤을 주인공으로 해서 이야기하고 싶은 책들이 많이 보인다. 어린이 동화도 아니고, 다 큰 어른들에게 다가오는 앤은 어떤 존재이기에 그런 이야기가 계속 나올까 궁금했다. 그냥 초록지붕집으로 온 고아 소녀의 이야기일 뿐인데 말이다. 그래서 거의 일주일 동안 『빨강 머리 앤』을 읽었다. 어렵거나 긴 대하소설도 아니었는데, 읽다가 보니 시간이 그렇게 걸리더라. 그렇게 다 읽고 나서 알았다. 왜 어른이 된 우리가 자꾸만 앤을 찾아보고 싶었는지를. 아주 오래전 만났던 앤의 이야기에서 미처 찾지 못한 감정이 어떻게 다시 찾아오는지를.
일할 남자 아이가 필요했던 초록지붕집에 상상도 못한 여자 아이가 온다. 앤 셜리. 그냥 'Ann'으로 부르면 안 된다. 반드시 끝에 'e'를 붙여서 Anne이라고 불러줘야 한다. 아주 우아하게 말이다. 처음 매슈 아저씨가 앤을 데리고 초록지붕집으로 갔을 때, 마릴라 아줌마의 반대로 다음 날 바로 고아원으로 돌아갈 거로 생각했다. 아이를 한 명 키운다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니까, 그래서 처음부터 계획했던 남자아이여야 했으니까. 하룻밤 사이 앤의 매력에 빠진 매슈와 마릴라는 앤과 함께 살기로 한다. 재잘재잘, 끝도 없이 말하는 수다쟁이 앤의 존재는, 두 어른만 지내던 고요한 집에 배경 음악이 된다. 보이는 모든 것을 시시콜콜 이야기하고,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한껏 진심을 담아 표현하고 싶은 앤의 마음이 그대로 느껴진다. '이보다 더 좋은 표현은 없을까? 아니야, 이 정도로는 이 마음을 다 말할 수가 없어.' 혹시나 이 아이가 기죽지 않을까 걱정했다. 마치 공개 입양처럼, 초록지붕집으로 온 고아 소녀라는 것을 마을에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앤의 긍정 마인드는 이곳에서의 삶을 피어오르게 한다.
“저는 이 길을 즐기기로 마음먹었어요. 제 경험에 따르면, 마음만 굳게 먹으면 어떤 일도 즐길 수 있어요.”
어렸을 적 앤을 보면서 그냥 앤의 성격이 이런가 보다 생각했던 상황들이 인제 와서 다시 읽으니 하나씩 다르게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때는 알지 못했던 여러 가지 감정과 상황이 보이기 시작한다. 마냥 유쾌한 아이가 아니었다. 앤의 가슴속에 새겨진 말들이나 상처들이 이제는 보인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더 깊은 슬픔과 상실감에 절망하는 시간을 보냈을 거라는 걸 안다. 그래서 초반부의 이 문장이 다르게 다가왔다. 입양이 취소되고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를 상황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심장은 어떤 것일까? 절망과 슬픔으로 주변의 것은 보이지도 않았을 텐데, 앤에게는 입양 취소라는 슬픔보다 이 아름다운 길을 지금 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임무가 생긴 듯하다. 입양이 취소되는 건 자기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 왔던 이 길을 되돌아가야 할 상황이 오더라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인 순간, 앤에게 이 아름다운 길이 보인다. 지금 아니면 봐두지 못할 세상의 아름다움 하나를 이렇게 간직하고 싶었다. 뜻밖에도 앤은 매튜와 마릴라의 관심과 사랑을 받으면서 자라난다. 여전히 실수투성이고, 말도 많아서 시끄럽고, 자존심이 강해 감정을 잘 누르지도 못하지만, 서서히 한 가정의 구성원으로 스며든다. 그러면서 앤은 배운다. 세상과 가족과 친구와 꿈과 여러 가지를.
내 기억 속의 『빨강 머리 앤』은 한 고아 소녀의 성장기였다. 앤이 어떻게 자라나는지 그대로 보여주는 이야기로 기억했다. 어떤 로맨스 소설의 설정처럼 길버트와 앙숙처럼 지내다가 어떻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게 될까 설레면서 결말을 기다렸다. 이미 다양한 버전의 앤을 만났으니, 다시 읽게 된 지금 새로운 걸 기대하지는 않았다. 너무 유명한 앤이니까 새롭게 느끼게 될 뭔가가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처음 앤을 만났던 그때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흘렀기 때문일까. 그때는 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이야기들이 보여서 너무 놀랐다. 그때는 미처 살피지 못한 두 사람의 삶이 자꾸만 눈에 들어왔다. 매슈와 마릴라 말이다.
처음에는 앤에게 매슈와 마릴라가 필요한 존재였는지 모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앤은 매슈와 마릴라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된다. 앤이 커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두 어른, 점점 노인이 되어가는 두 사람을 보면서 전에는 이 이야기에서 보지 못했던 노년의 삶이 보여서 서글펐다. 천방지축 소녀에서 점점 숙녀를 자라는 앤을 보는 두 사람은 뿌듯했다. 특히 앤을 보면서 사랑을 느끼는 마릴라의 마음 변화가 놀라우면서도, 너무 당연한 변화여서 친근하고 애틋했다. 가끔 조카아이들을 볼 때마다 어느새 이렇게 자랐을까 싶어서 놀라면서도, 이 귀여운 아이들이 자라나는 모습을 보면서 시간의 흐름을 느낄 때의 내 모습을 마릴라에게서 봤다. 나이 들어가고 몸이 늙어가는 걸 자각할 때마다 서글프다. 이 아이들의 지금 모습이 조금만 천천히 갔으면, 이 어린 모습을 조금 더 볼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눈물이 날 것 같다. 앤을 바라보던 마릴라가 어떤 날 했던 말처럼, 사랑하지만 서글픈 상실감을 설명하기 어려웠다.
"마릴라가 마음을 열고 사랑하게 된 어린아이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이제 키 크고 눈빛이 진지한, 이마에는 신중함이 드러나고 고개는 꼿꼿하게 든 열다섯 살 소녀가 있었다. 마릴라는 그 어린아이를 사랑한 것처럼 이 소녀도 사랑했지만 기이하고 서글픈 상실감은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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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이나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읽으면서 하나씩 찾아내게 하는 매력이 있는 책이다. 소소하면서도 다양하게, 점점 부피를 키워가는 감동으로 남는다. 초록지붕집에 남게 된 앤은 눈에 보이는 세상의 모든 것에 관심을 두고 사랑을 준다. 집 근처의 숲에도, 다락방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에도, 마치 목숨이라도 걸 것만 같은 우정에도, 앤에게 사랑을 주는 많은 사람에게도. 때로는 한 페이지 넘게 앤의 말이 계속 이어지는 문장을 보면서 어떻게 이 아이는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귀가 시끄러웠는데, 나도 모르게 서서히 앤의 수다에 중독이 된다. 아마 그 많은 말이 잘난 척이었으면 괴로웠을 텐데, 앤을 보면서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지 하나의 길을 엿본 것만 같다. 빨강 머리가 콤플렉스였고, 자기 얼굴의 주근깨가 보기 싫었던 아이가 너무도 당당하게 성장하는 모습을 보니 부럽기까지 하더라. 자기 삶을 하나씩 채워가는 앤의 성장이 마치 하나의 성장 교과서로 보였다. 누구나 다 앤과 같은 태도로 살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앤의 시간을 보면서 어느 것 하나쯤은 닮은 듯 배우고 싶어지는 거 없었다고 말할 수도 없지 않을까? 나는 앤이 바라는 것을 이루고자 미친 듯이 노력하는 열정이 닮고 싶었고, 길버트에게 뒤늦은 사과를 하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은 마음을 배우고 싶었다. 꿈을 이루기 위해 가던 길을 잠시 멈춰 초록지붕집에 머물기로 했을 때도, 누구의 탓도 하지 않고 인생 계획을 수정하는 긍정이 부러웠다. 언제나 인생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푸념하던 순간이 부끄러워질 만큼, 앤이 찾아가는 희망이 사랑스러웠다. 아마도 앤의 주변 사람들은 다 알았을 것이다. 앤이 부르는 감사와 긍정과 사랑이 그들에게도 그대로 퍼지고 있었다는 것을. 결국, 모두가 앤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어딜 가든 겉모습이 얼마나 변하든 여기는 달라지지 않아요. 깊은 곳에서 저는 언제나 아주머니의 앤이에요, 평생토록 날마다 마릴라 아주머니와 매슈 아저씨와 그린게이블스를 더욱더 사랑하는 앤이요."
어느 에세이를 읽으면서 앤을 소환하는 걸 보고, 아직 더 자라고 싶은 작가의 투정 같은 바람으로만 여겼던 순간이 있다. 동화 속 캐릭터는 이야기 속에서만 존재하는 추억쯤으로 남겨두어야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제는 알 것 같다. 왜 앤이 이렇게 사랑받을 수밖에 없었는지, 왜 삶의 힘든 순간마다 앤을 부르고 싶었는지, 왜 상상력을 뽐내는 앤의 긍정을 닮고 싶었는지를 말이다. 어떤 순간에 불쑥불쑥 찾아오는 불안, 부정적인 마음, 절망스러운 슬픔, 다시 일어서야 하는데 주저앉기만 하게 될 때. 세상을 대하기가 버거워질 때마다 앤을 불러오고 싶을 것 같다. 삶의 힘든 순간을 잠깐 앤에게 기대도 될 것 같다. 그래도 좋을 것 같다.
* 본 리뷰는 출판사 경품 이벤트 응모용으로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