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름다운 이웃 - 박완서 짧은 소설
박완서 지음 / 작가정신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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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이 글이 쓰인 시절을 이미 한참 지나왔지만, 이미 보고 듣고 겪어서 알고 있는 일들에, 여전히 변하지 않은 생활환경의 어떤 부분들이 저절로 떠오른다. 조금 달라지기도 했지만 아주 사라지지 않은 관습이 보이기도 하고, 한 시대를 채웠던 사회 분위기를 만나기도 한다. 197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은 오늘을 사는 우리가 겪지 못한 시간의 기록이기도 하고, 우리네 부모님이 젊은 시절을 겪어온 시간이기도 하다. 문학으로 만나는 또 하나의 역사인 것이다. 48편의 짧은 소설이 전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하기보다는, 그저 그 시대를 읽는 것만으로 채워지는 게 있다. 평범한 소시민의 이야기지만, 그 안에 우리가 겪어온 사회의 단면을 날카롭게 적어낸다. 작가가 세상을 보는 그대로를 옮겨 놓은 것만 같다. 그 글에서 우리는 또 한 번 세상을 본다.

 

아파트가 붐을 이루던 시절의 시작이었던 것 같다. 짧은 글에서 많은 이야기가 들려오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아파트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 어쩌면 작가는 그 편한 세상으로의 변화가 불러오는 사라지는 것들을 더 얘기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열쇠 하나로 통과할 수 있는 아파트 현관문 너머의 무엇이 우리 가슴을 채우는지 묻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열쇠 하나 목걸이처럼 목에 걸고 다니던 아이들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부모의 부재로 초인종을 누르는 게 아닌 내 손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하는 아이의 일상, 새 아파트가 올라갈 때마다 이사하는 부부에게 새집의 환경보다는 그 지역을 채우는 사람들의 마음을 먼저 보라고 따끔하게 충고하는 부모, 같은 구조의 집에서 지내면서 일상과 삶마저도 비슷해져 가는 사람들. 편해서 좋은 것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그 좋은 것들 안에서 사라지는 것들을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내온 시간이었다. 그리워해야 할 것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건 새롭고 편한 것들을 하나씩 선택할 때마다 비례적으로 늘어나는 것 같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알아채게 되는 것 같다. 작가가 전하는 이야기들에서 오늘의 모습을 같이 볼 수 있는 건 그 때문이다.

 

철이는 아파트 열쇠만 있으면 그만이다. 학교 갔다 와서 열쇠로 열고 들어와서 점심도 혼자서 차려 먹고 그게 귀찮으면 전화로 중국집에서 자장면을 시켜서 먹는다. 아내는 철이를 위해 늘 풍부한 과일, 우유, 과자 등을 준비해놓고 있기 때문에 친구들을 불러다 그런 것을 먹으면서 놀기도 한다. 철이에게 부족한 건 아무것도 없다. 집에서 노는 것에 싫증이 나면 아파트를 잠그고 나가면 아파트 단지 곳곳엔 별의별 놀이틀들이 다 갖추어진 놀이터가 있다. 거기서 얼마든지 놀 수가 있다. 집에 빨리 돌아가야 한다고 조바심할 필요가 없다. 나도 아내도 제가끔의 열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161~162페이지, 열쇠 소년)

 

낯설다. 오십여 년 전의 시절이 내게 어떻게 다가올까 궁금하기도 했다. 공감은커녕 이해라도 할 수 있을까 싶은 걱정이 앞선 글들이었다. 하지만 웬걸. 그 시대의 모든 생활 모습이 이 짧은 글들에 채워져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아니, 작가의 전작들을 떠올렸다면 충분히 예상했을 수도 있는데, 오랜만에 만나는 작가의 글에 지난 글의 분위기를 연상할 겨를도 없었던 거다. 대한민국의 오십여 년이 어떻게 변화하고 개발되어 왔는지 그대로 지켜볼 수 있다. 여자의 삶, 대학이라는 곳, 결혼이라는 현실, 고부갈등, 아파트 열풍으로 변화하는 이웃 관계 같은 일들이 웃음과 함께 고스란히 들려온다. 물론 웃을 수만은 없는 일들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지금의 삭막함보다는 덜한 느낌에 다행이다 싶기도 하면서, 어쩌면 개발과 발전이 우리 삶을 이렇게 건조하게 만든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울타리의 구분 없이 방문만 열면 밖이 내다보이던 시절, 옆집 누구를 부르면 바로 대답이 돌아오기도 하는, 땅 밟고 살면서 지나치는 사람들에게 소소하게 묻는 안부, 대가족의 구성이 당연하게 여기던 시절이었다. 불편한 것도 많았겠지만, 사람 사이에 피어나는 정이 더 귀하고 익숙해서 불편함은 잠시 밀어두어도 좋은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음식 냄새야말로 그립고 그리운 인간의 체취다 싶은 생각까지 들 지경이었다. 봉례는 무인도에 유배되어 사람 그리듯이 절절히 이웃의 음식 냄새를 그리워하게 됐다. (382페이지, 성공 물려줘)

 

일기 같은, 어떤 날들의 기록 같은 느낌의 글이다. 박완서의 전작을 만났던 때와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게 익숙해서 편안했다. 아마도 작가의 글에서 묻어나는 그 소탈한 이야기들 때문일 것이다. 옆집 영희네 이야기 같은, 오늘 아침 우리 집 밥상 위에서 일어난 일 같은 이야기들이 작가의 문장으로 옮겨온 것만 같다. 게다가 이 짧은 글들을 읽은 후 다가오는 작가 특유의 괜한 웃음의 분위기를 알아서이기도 하다. 피식 소리를 내는 웃음이기도 하고, 한동안 생각했던 일들을 끄집어낸 것 같은 토로의 말들이기도 하다. 소박한 이야기들에 묻어난 우리네 인생을 들추는 시간이어서, 가슴을 치면서 꺼내놓고 싶은 답답한 세상살이에 공감해서이기도 하다.

 

"겉으론 다 행복해 보여도 근심 없는 집이 없구려." (300페이지, 서른아홉 살, 가을)

 

세상이 발전하고 편한 게 많은 일상이지만, 어쩌면 우리는 가장 귀한 것을 놓치고 사는 건 아닐까. 밤 11시까지 주문 완료하고 다음 날 새벽에 현관문을 열면 주문한 물건이 얌전히 놓여있는 세상이다. 클릭 한 번에 필요한 것이 몇 시간 후에 배송되어 오고, 현관문을 열어놓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에어컨을 틀며 바람을 맞는 일상이다.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면 옆집이나 아랫집 윗집의 초인종을 누를 일도 없다. 그런 세상을 사는 우리가 이 글에서 마주한 것은 낯설지만 따뜻한 것들이었다. 이웃 주민의 건강을 염려하고, 혼기를 놓친 조카나 이웃의 자녀를 짝지어주고 싶어 안달하는, 때로는 어머니와 아내 사이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착한 남편의 답답한 모습에, 기혼 여성의 사회 진출이 지금보다 더 어려웠던 시절의 현실에 속이 상할 일 많은 시절이었지만, 여전히 그 안에는 우리가 스며들 틈이 있었다. 쑥스럽지만 낭만을 꿈꾸는 사랑에, 주변의 인간미 넘치는 애정에 사람 살아가는 모습이 그대로 비춘다. 우리 살아가는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의 장면을 옮겨놓은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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