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카의 장갑
오가와 이토 지음, 히라사와 마리코 그림, 이윤정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12월
평점 :
절판


 

가끔, 이런 동화 같은 이야기를 만날 때마다 나를 둘러싼 환경과 상황의 분위기가 전환되는 듯하다. 빨리 해결이 안 되는 일에 마음을 닦달하고, 타인에게 건넬 마음을 건조하게 계산하기도 하는 일상. 당연하게 여기며 살았다. 나를 먼저 챙기고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 세상 아니었던가? 다른 사람을 볼 겨를이 없다. 그게 특히 가족도 아닌 남이라면 말이다. 그렇게 매 순간 전쟁이라도 하는 듯 긴장하며 살다 보니, 갑자기 이렇게 따뜻한 이야기가 들려오면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뭔가 많이 달라져야 할 것 같고, 주변을 향해 시선을 돌려야 할 것만 같다. 그러다가 점점 내가 지금보다 조금은 더 따뜻하고 배려하는 사람이 된다면, 소박한 행복에 기쁨을 느끼는 사람이 된다면, 나는 좋은 사람이 되어가는 걸까?

 

태어나는 아이에게 엄지 장갑을 선물하는 풍습이 있는 나라, 루프마이제공화국. 이 나라에서 태어난 여자아이들은 모두 장갑 뜨는 법을 배운다. 그렇게 아이에서 여자가 되고 엄마, 할머니가 되어가면서 꾸준히 장갑을 뜬다. 그렇게 평생 뜬 장갑은 가족에게,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로 전해진다. 루프마이제공화국 탄생의 나이와 같은 마리카도 장갑을 받았다. 할머니가 예쁘게 떠주신 장갑으로 마리카의 탄생을 축하했다. 모두의 축복을 받으며 태어난 마리카는 가족들과 함께 행복하게 성장했고, 야니스를 만나 사랑하고 결혼했다. 하지만 행복은 길지 않았다. 루프마이제공화국을 점령한 얼음제국의 생활 방식을 따르게 된다. 마리카의 나라에서 평소 즐기며 나누었던 것들은 더는 할 수 없게 되었다. 사람들과 함께 노래하고 춤추던 일들은 더는 불가능했다. 그나마 유일하게 남겨진 것. 장갑 뜨는 일만이 허락되었다. 참전하게 된 야니스의 빈자리를 견딜 방법은 하나였다. 마리카는 장갑을 뜨고, 그동안 야니스에게 받았던 씨앗을 심고 꽃을 피운다.

 

한 명의 여자아이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성장의 시간을 그대로 기록한 글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이 아이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지켜보면서, 포근하게 살아가며 행복을 만날 수 있는 삶의 방식을 독자들에게 뿌린다. 특히 자연이 주는 많은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사는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숲과 호수로 둘러싸인 나라, 자연과 대화를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자연스럽게 보이는, 사는 동안 만날 많은 기쁜 일에 장갑을 선물하며 마음을 전하는 일이 낯설면서도 따뜻했다. 마리카가 인생에서 만나는 중요한 순간마다 받았던 장갑을 떠올려보면 얼마나 많은 순간에 축복받았을까 상상하게 된다. 태어나서 할머니에게 받은 장갑, 야니스에게 청혼으로 받은 장갑, 참전한 야니스가 무사히 돌아오길 기도하면서 뜬 장갑. 가만히 듣고 있자면, 우리가 간절하게 하고 싶은 말이 생길 때 일기라도 적어서 그 마음 표현하고 싶은 것처럼, 마리카는 털실로 짠 것으로 인생을 기록하는 듯하다.

 

그렇게 털실로 뜬 장갑을 인생을 말하는 일이 익숙해질 무렵, 마리카는 사용하지 않은 장갑을 풀어 그 털실로 다른 것을 뜬다. 일상에서 필요한 것을 하나둘씩 뜨면서 공간을 채운다. 또 다른 이에게 선물하기도 한다. 도대체 털실로 장갑을 뜨는 일이, 무언가를 뜨는 게 왜 중요한 일일까 싶었다. 한 사람의 인생을 채우는 게 고작(?) 장갑을 뜨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한없이 하찮게 보이겠지만, 마리카의 성장을 계속 보고 있으면 그 의미를 알게 된다. 일명 똥손이었던 마리카가 할머니 못지않은 베테랑처럼 장갑을 뜨는 순간. 성장이 완성된 느낌이 들더라. 그러다가 야니스가 부재할 때, 야니스의 소식만 기다리면서 망부석이 되어 있는 게 아니라 주변의 아이들에게 엄지장갑 뜨는 법을 가르쳐주는 마리카를 보니 왠지 뭉클해지는 기분까지. 어릴 적 마리카를 다시 보는 것 같았다.

 

뭔가 하나하나 완성되어가는 느낌을 주는 소설에, 괜히 읽으면서 뿌듯해지는 이 기분은 뭔가. 어쩌면 우리 인생이 그런 것 아닐까? 차근차근 채워가는 기쁨을 알게 해주는 일. 그건 나 혼자 알아서 확인하게 되는 게 아니라 나를 둘러싼 주변의 많은 것이 같이 만들어주는 거였다. 알몸으로 호수에서 수영도 가능하게 하는 자연의 배려, 슬픔과 기쁨을 같이 느껴주는 가족과 주변 사람들, 그들에서 배우는 삶의 방식들이 한 사람을 완성하는 과정이었던 거라고 말이다. 분명 그 과정에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슬픔과 고통이 찾아오겠지만, 그 순간을 건너는 방법 역시 알려주는 게 이 소설이다. 야니스가 부재할 때 마리카는 멍하니 기다리는 일만 하지 않았다. 기다리는 야니스는 돌아오지 않았고 마리카는 혼자 늙어가며 할머니가 되고 마지막 여행을 떠났다. 하지만 그 마지막 순간을 맞이할 때까지 마리카는 슬프지 않았다. 사랑하는 야니스는 옆에 없지만, 그를 기다리는 동안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알았다. 주어진 오늘을 열심히 살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일. 다그치고 불안해하며 오늘을 버티는 게 아니라 차분하게 오늘을 살아내는 일을 배운 거였다. 얼음제국이 언젠가는 물러가고 예전의 따뜻한 루프마이제공화국의 평화롭고 행복한 날들이 찾아오리라는 기대로 오늘을 살았다. 매일 같이 장갑을 뜨면서 말이다.

 

'고마워(Paldies)!'

 

작가가 라트비아 여행 경험을 바탕으로 썼다고 한다. 라트비아의 문화를 가슴에 담은 작가가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였다. 겨울에 장갑이 필수인 나라, 자연이 삶과 가까이 있어서 포근한 나라, 지나가다 만난 호수에 뛰어들어도 자연스러운 나라. 이 소설로 삶의 긍정적인 태도를 한 번 더 배운 듯하다. 추운 나라에서 찾은 행복의 장면들이 따뜻했다. 힘껏 달려서 맨 먼저 도착해 깃발을 뽑는 행복이 아니라, 나를 둘러싼 주변의 것이 뿜어내는 온기로 닿은 행복이었다. 코를 빠트리지 않고, 한 코씩 차근차근 엮어나가야 완성되는, 잘 짜인 장갑으로 보는 인생사 같다. 꽃 선물이 아니라 작은 씨앗 하나로 꽃을 피워가는 기쁨을 알게 하는, 일상의 모든 순간에 찾아오는 작은 행복들에 고맙다는 인사가 저절로 나오게 하는 삶, 이런 거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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