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어라, 내 얼굴 슬로북 Slow Book 4
김종광 지음 / 작가정신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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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런 것은 아닐 테지만, 이상하게 일기를 엿보는 기분이 드는 게 에세이다. 소설처럼 잘 짜인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어서 더 그런 느낌일 수도 있는데, 앞뒤 두서없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을 수 있겠다는 기대감, 혹은 착각이 들게 하는 장르가 아닐까 싶다. (나만 그런가?) 아무래도 이런 이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 일기에 적고 싶은데 일기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고, 일기에만 적자니 혼자만 말하고 있는 게 왠지 섭섭해지니까. 나만 혼자 보고 말기에는 뭔가 아쉬워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나만은 아니겠지 싶은 공감을 찾고 싶은 바람일지도 모른다는... 세상에는 수도 없이 많은 에세이가 있지만, 그 많은 에세이가 장점으로 작용하는 건 바로 그런 것일 테다. 생각의 공유, 하고 싶은 말을 편하게 드러내고 싶은 것, 한 번 읽고 덮어버리고 말지라도 읽는 순간의 공감은 남아있을 거라는 안도.

 

데뷔 20년 차 생계형 소설가의 일상 생각을 읊어준다. 생계형 소설가? 생계형 배우는 들어봤어도 생계형 소설가라는 표현은 좀 낯설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어디 생계형이라는 말이 한 분야에서만 존재하는 건 아닐 것이다. 누구나 하고 싶은 일만을 하면서 살 수 없는 세상이니, 쓰고 싶은 글만 쓰면서 어디 생계를 이어갈 수 있겠는가. (사실은 '생계형 소설가'라는 표현이 순간 웃픈 거였다는...) 그의 생계를 이어가는 일상은 이 책으로 충분히 보여주기도 했다. 짠하고, 웃기고, 울분은 공감하면서 말이다. 특히 전업 소설가로 살면서 생계를 걱정하는 부분을 듣고 있노라면 짠내가 풀풀 난다. 아직 어린아이를 키우면서 유치원 학비를 계산하고, 동상이몽의 단어 '대출'에 화들짝 놀라기도 한다. 아내는 학습지 영업 사원의 끈질김에 질려 신경전을 벌이는, 지극히 현실적인 일상의 나열에 웃으면서도 눈물이 난다.

 

작가의 20년 내공은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니구나 싶을 정도로 독자의 공감을 부르는데, 그 공감의 대부분이 일상의 모습이라는 게 더 놀랍다. 일상을 보내면서 겪어낸 크고 작은 일들을 차곡차곡 쌓아놓고 들려주는데, 작가가 말하는 것을 내가 모르지 않는다는 게 서글펐다. 아, 이럴 것은 좀 모른 척하면서, 나는 이렇게 살지 않아서 모른다고 하면서, 이런 소시민적 삶을 모르는 부류가 되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다. 우리 사는 모습이 대부분 그러하고, 그 '대부분'에 생계형 작가인 저자도 포함되어 있다. 삶의 애잔함이 그대로 묻어난다. 슬프고 어이없는 상황에서 특히 발휘할 수 있는 뻔뻔함까지 갖춘 저자의 내공에 그저 감탄할 뿐이다. 특히 투표에 관해 말할 때면 '그래, 그래'를 연발하며 손뼉를 치면서 읽었다. 이래도 도둑질, 저래도 도둑질,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은 '덜 도둑질할 사람'을 뽑는 것 말고 다른 대안은 없었다. 그렇다고 투표를 하지 않을 수는 없다. 조금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권리를 포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마지못한 선택이 그나마 도둑질을 덜 할 것 같은 사람을 선택하는 것 말고는 없다는 게 슬프다.

 

비길 수 있어도, 이왕이면 승패를 가리려는 것이 승부의 속성이다. 이기는 자와 지는 자가 반드시 나올 수밖에 없다. 승자와 패자 둘 다 기쁠 수는 없겠지만, 공정한 조건에서 서로 최선을 다했다면 두 달 마음 상하지는 않을 테다. 승부의 관건은 승패가 아니라 '최선'인 셈이다. (120페이지)

 

한 번쯤은 생각했던 일상의 생각들이 그대로 들려와서 좋았다. 무엇보다, 이해 못 하고 공감 못 할 일은 아니라는 게 더 크게 다가온다. 어쩔 수 없다고 여기면서도 묵묵히 살아내는 일상의 고마움까지 닮았다. 어제도 봤고, 오늘도 겪었으며, 내일도 기다릴 우리 하루하루의 일들이었다. 가족 이야기를 꺼내며 소박한 어느 가정의 모습을 보여주다가(1부 가족에게 배우다), 소시민으로 살아온 시간이 주었던 고달픔을 전달하며 같이 화내게 하더니(2부 괴력난신과 더불어), 현실에서 수도 없이 마주치는 노동자로의 삶에 분노한다(3부 무슨 날). 무슨 무슨 날로 우리에게 찾아오는 그 많은 날이 어떻게 받아들여져야 하는지 같이 슬퍼하고 화를 내준다. 이런 날들이 어떻게 바뀌면 좋을까 고민하게 하지만, 그 고민은 현실적으로 또 반영될 것 같지도 않아서 답답한 여운을 주었다는 게 함정이지만... 그러다가 작가로의 살아간다는 것의 애환 같은 게 이어진다(4부 읽고 쓰고 생각하고). 문학인으로 살아가면서 저자가 느낀 많은 것을 차근차근 들려주는데, 내가 읽었을 때 이 책의 가장 매력적인 부분이라면 단연코 4부다. 생계형 작가의 삶 그대로를 비추기도 하지만, 책을 읽는다는 것, 무언가를 쓴다는 것, 그렇게 이어지는 생각까지 어떻게 우리 삶의 변화를 가져오는지 참 흥미롭게 들려준다. 생생한 예를 마주한 기분이라고 할까.

 

글을 쓴다는 것은 칭찬을 못 받아도, 상을 못 타도, 아니 아무에게 보여주지 않고 혼자만 읽고 보아도, 즐거운 일이다.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쓴 것이고, 쓰는 자체가 즐거웠던 것이다. 일기든 에세이든 소설이든 SNS 글이든 뭔가를 쓰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축복받은 사람이다. 누구라도 마음껏 글을 쓸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글쓰기'로 스트레스를 푸는 세상, 바로 그 세상이 인류가 꿈꾸던 무릉도원일지도 모른다. (290페이지)

 

저자가 작가로 살아온 20년이란 시간이 의미하는 것이 작가정신 '슬로북'의 의미와 닮아있어서 선택된 게 아닐까 싶다. 아마 저자가 20년이 아니라 2년의 경력을 가진 작가였다면 이런 글을 쓰지 못했으리라. 그 오랜 세월 작가로 살아오면서 경험한 사고들이 쌓여 이만큼의 내공을 이루어냈기에, 천천히 흘러온 작가의 삶이 오늘날 그의 웃는 모습의 사진까지 만들어준 게 아니었을까. 진정한 웃음으로 만들어질 이야기가 쌓이는 시간. 저자뿐만 아니라, 어쩌면 지금 우리도 그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급히 가는 것보다 천천히 차곡차곡 뭔가를 쌓으면서, 비록 그것이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볼 수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걷는 시간. 내 얼굴에 웃음이 자연스러워지고 익숙해질 순간을 기다리며 쌓아가는 시간 말이다.

 

내 문학이 독자들에게 아주 느린 속도로 다가갈 테지만 독자들에게 오래도록 남는 무엇인가가 된다면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116페이지)

 

저자의 웃는 모습과 이 책 속의 이야기가 많이 닮았다. 그래서 그의 말을 믿는다. 이제 웃는 게 익숙해진 그의 얼굴을 보면서, 나도 언젠가 그 편안한 웃음이 익숙한 얼굴을 갖게 되겠지 싶은 바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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