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민의 겨울 토베 얀손 무민 연작소설 5
토베 얀손 지음, 따루 살미넨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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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계절인데, 해마다 겪는 게 다르게 느껴진다. 작년의 여름과 올해의 여름이 다른 것처럼 말이다. 올해 여름을 견디면서 생각하는 건 '작년에 에어컨을 몇 번 켰더라?' 하는 거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작년 여름은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만큼 에어컨을 켜고 지낸 날이 적었다. 올해는 에어컨이 없으면 죽을 것 같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이 더위에 에어컨이 말썽이어서 서비스 신청을 했는데 기본 일주일은 기다려야 점검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더 더운 것 같았다. 다행히 큰 문제 없이 점검받고 다시 시원한 집안에서 책을 손에 들게 되었다. 태어나서 몇십번의 여름을 겪었지만, 올해의 이 지독한 여름과 더위는 처음이라고 기억될 것이다.

 

 

모든 것이 그러하다. 처음 겪는 일이 어디 올해의 여름뿐이랴. 올해의 겨울은 또 얼마나 추울지, 내년의 여름은 올해처럼 더울지, 알 수 없다. 생각해보면 세상의 많은 일이 그랬다. 처음 먹는 음식, 처음 보는 것들, 처음 가보는 장소들. 살면서 우리가 경험하는 일 대부분은 처음을 거치지 않고는 있을 수 없던 거였다. 무민에게 이 겨울도 그러하겠지. 지난번에는 '태양이 저물어도 어둠이 찾아들지 않는 한여름'을 경험하더니, 무민은 이제 처음 보는 겨울을 지나고 있다. 아무리 기다려도 태양이 떠오르지 않는 한겨울 속에 있다. 해마다 11월의 겨울잠을 자는 무민들. 그렇게 잠들면 다음 해 4월에 잠에서 깨고, 잠에서 깬 무민들을 기다리는 건 따뜻한 봄이다. 겨울 내내 잠을 자면서 보내니 무민들이 겨울을 알 리 없다. 가족들이 모두 잠든 그때 혼자 잠에서 깬 무민은 밖으로 나간다. 겨울의 매서운 추위는 낯설지만 처음 만진 눈은 신기하다. 보기에는 아름답지만 추위를 몰고 오는 겨울과 눈이었다. 이런 겨울을 어떻게 견뎌내야 하는지 아직 무민은 모른다.

 

가족과 함께하던 모든 것을 뒤로하고 혼자 해야만 하는 일. 가족 모두가 겨울잠을 잘 때 혼자 잠에서 깬 무민은 모든 것을 혼자 해야만 한다. 우리가 부모의 둥지를 떠날 때나, 부모의 도움 없이 혼자서 해야 할 일이 늘어날 때를 떠올리게 된다. 객지에서의 독립생활이 외롭고 춥고, 사회생활에서 감당해야 할 책임감이 늘어나고, 인간관계에 좀 더 깊은 고민을 하면서 성장한다. 무민의 겨울이 그렇다. 혼자서 먹을 것을 구하고, 한겨울의 추위를 견뎌내야 하고, 처음 겪는 겨울을 이겨내야 한다. 어리바리, 알 수 없는 것들로 혼란스럽지만 무민은 우왕좌왕하면서도 잘 해낸다. 처음 보는 눈송이를 신기해하면서도 예쁘게 바라본다. 처음 겪는 일에 도움을 주는 친구들도 있었고, 추위를 피해 먹을 것을 찾으러 무민의 집으로 몰려든 친구들에게 온기와 먹을 것을 제공한다. 그러면서 이들이 겨울을 어떻게 지내게 되는지 조금씩 알게 된다.

 

무민은 생각했다.

'내가 겨울을 이겨 낼 수 없다는 사실을 똑똑히 보여 주고 무릎 꿇리려고 이런 짓을 하는 게 틀림없어.'

겨울은 먼저 부드럽게 떠다니는 눈송이로 아름다운 커튼을 만들어 무민을 속인 다음, 아름다운 눈송이를 눈보라로 바꾸어 얼굴에 마구 내던진다. 그것도 무민이 막 겨울을 좋아하기 시작한 바로 그 순간에 말이다. (135페이지)

 

무민이 부딪히는 겨울은 만만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꽁꽁 얼어버리고, 시계는 멈췄고, 가족들은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고... 한참 전에 떠났던 스너프킨이 떠오르지만 여기에 없다는 현실. 투티키는 아빠의 탈의실에 머물고, 헤물렌은 스키를 타고 나타났다. 이상한 녀석들이 집 안 구석구석에 숨어 있고, 춥다고 무민의 집으로 몰려온 이들을 대하는 것도 짜증이 난다. 처음 보는 겨울에 적응할 사이도 없이 뭔가 몽땅 한꺼번에 무민에게 달려드는 느낌이다. 익숙하고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추운 겨울 실컷 자고 일어나면 따스한 봄이 기다렸던 그동안의 일이 감사하게 느껴질 정도다. 이 겨울을, 무민은 잘 견딜 수 있을까?

 

겨울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에게 처음 겪는 추위는 어떤 걸까? 눈뜨면 봄과 여름이 기다려야 하는데, 아직 무서운 겨울이라면? 태양이 지지 않아 덥기만 했던 여름을 기억하는데, 이제는 아무리 기다려도 태양이 뜨지 않는 겨울을 기억해야 한다면? 동글동글 오뚝이같이 생긴 무민을 보면서 보들보들 귀엽고 여린 인형을 상상했다. 그냥 아껴주기만 하고 예뻐해 주기만 하면서, 필요한 것들을 챙겨주면 그걸 받고 잘 자라기만 하는 대상. 그게 가능할까 싶은 생각이 들게 하는 이야기다. 인간도, 무민도. 누구에게나 성장은 필요하다. 온몸으로 부딪히는 경험도 중요하다. 이 이야기는 무민이 이 두 가지를 모두 갖게 한다. 처음 경험하는 계절과 그 계절을 겪으면서 무민이 바라본 또 다른 세상. 무민은 이제 무민 골짜기의 겨울을 기억한다. 몸소 체험했으니, 혹시라도 다음 겨울에 다시 잠에서 깬다고 해도 지금처럼 무섭고 어렵기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무민에게 한 번의 경험치가 쌓였을 테니. +1~!

 

가끔 토요일 밤에 <전지적 참견 시점>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을 본다. 어느 날 등장한 개그맨 박성광과 그의 매니저 임송. 박성광의 매니저는 스물셋의 경상도 출신이다. 어리다면 어린 나이, 하루하루 지내면서 실수한 것들을 복기하고, 주차를 잘 못 한다면서 매일 퇴근 후에 공용 주차장에서 주차를 연습한다. 사회생활 잘 해내고 싶고, 자기 일을 완벽하게 하면서 칭찬도 듣고 싶을 거다. 잘못한 것을 지적받는 것보다 잘한 것을 칭찬받는 게 훨씬 어려운 세상살이. 부모의 품을 떠난 그녀는 일하면서 매일 고향에 계신 엄마와 통화한다. 그날은 유독 실수가 잦았던 날이었다. 엄마의 목소리를 듣고 울음을 터트리는 그녀와 그 장면을 보는 나도 같이 울었다. 그녀와 같은 나이의 나를, 우리를 생각했다. 알게 모르게, 조금 힘들지만 단단하게, 아마 그녀도 성장하는 중이겠지. 실수는 줄어들고, 일을 익숙하게 하고, 좀 더 잘 해낼 수 있는 노하우도 터득할 것이다. 무민이 처음 겪은 겨울이 낯설고 두려웠지만, 이제 겨울을 경험한 무민은 달라졌다. 겨울이 어떤 계절인지 어떤 모습인지 알게 되었다.

 

"이제 나는 다 가졌어. 한 해를 온전히 가졌다고. 겨울까지 몽땅 다. 나는 한 해를 모두 겪어 낸 첫 번째 무민이야." (154페이지)

 

몰랐던 세계를 알게 되는 일, 낯선 세계를 받아들이는 일은 쉽지 않다. 어렵고 힘들다. 어색하고 낯설어서 시행착오를 한다. 하지만 그 자리에 머문 채로 살아갈 수 없는 우리는, 늘 낯선 세상에 한걸음 발을 디딘다. 어려움을 겪고 나면 훨씬 잘 자랄 거라는 무민의 말처럼, 그렇게 계속 세상을 향해 나아가며 성장할 것이기에 말이다.

 

 

(번역가를 보니 따루 살미넨이다. 혹시나 해서 이력을 보니 그녀 맞다. 방송인 따루. 한국어를 유창하게 하고 한국의 정서를 너무도 잘 알아서 놀랐는데, 막걸리까지 좋아한다면서 즐기던 그녀. 아직 한국에 있는 줄 알았는데, 고국인 핀란드로 돌아가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는 소식에 괜히 더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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