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혼황후 6
알파타르트 지음 / 해피북스투유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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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에 바쁘다 보니 아무래도 청소년층이 즐겨 읽을 것 같은 웹소설은 잘 안 읽게 되는데 이번에 1~5권까지의 스토리도 잘 모른 채로 이 6권부터 덜컥 읽게 되었지만 빨려들어갈 것 같은 재미가 나서 다 읽고 난 후 무척 기분이 뿌듯했습니다. 잘 짜여진, 또 촘촘한 재미가 있는 소설만큼 사람 기분을 상쾌하게 해 주는 게 또 없을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친족법 교과서에 "친자 확인/부인 소송만큼 어려운 게 없다"는 말이 나오곤 했습니다. 출생 시점 즈음으로 특정 인물들과 해당 여성이 얼마나 가까운 거리, 관계에 있었는지를 일일이 따져 가뜩이나 불확실한 경로를 셈하여 어설프게 확률을 계산하고 그도 여의치 않을 경우 법조상의 추정이나 입증책임의 문제로 책임을 떠넘기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증인을 산더미같이 불러도 그 진정성을 어떻게 믿겠으며 수십 년 전(불과 수 개월 전이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의 사정을 재구성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러던 걸 이제는 간단한 검사만으로도 99% 이상의 개연성을 갖는 결과가 도출되니 적어도 소송 문제만 놓고 보면 이같은 기적적 발전이 또 없을 것입니다. 


물론 이 작품 속에서 그런 과학적 수단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대신 작품 중에 묘사되는 대로 아 이런 경우라면 빼박 친자 여부가 결판날 수밖에 없겠구나 싶기도 합니다. 이 정도로나마 확실한 상황이 나오길 기대하는것도 확률이 지극히 드문 경우라 하겠죠. 여튼 글로리엠은 참으로 안타까운 운명입니다. 내가 철석같이 누구누구의 자식이라고 믿고 있었는데 막상 밝혀진 바가 반대라니... 유리하고 불리하고의 문제를 떠나서 하는 말입니다. 


아무래도 서양 문화를 배경으로 삼은 판타지에서 황제가 그나마 황후와 "이혼"이라는 과정을 거치기도 하는 건 기독교 컨벤션의 영향이 큽니다. 동양 같으면 황후(정비인데도)에 일정 사유가 있을 경우 바로 폐출이 되어 서민 신세로 떨어지거나, 서출의 경우 원칙적으로 계승권이 부인되기까지 하니 말입니다. 그러니 애초에 정비라고 해도 지위가 굉장히 불안정합니다. 시앗에게서 본 아이를 억지로 받아들여 적모로서 감정 노동도 해야 하고... 나비에가 여기서 겪는 여러 고생은 사실 고생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저는 이 6권을 읽으면서 산적의 정체에 대해 처음부터 의심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과연... 한편으로 이 소설에서는 마치 중근세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제국의 관계처럼 제국의 신민들이 상대 국가에 대해 일정 부분 적대감을 가지면서도 어느 정도 인정하는 등 양가적 태도를 취하기도 합니다. 판타지 소설 아니랄까봐 적절한 사건을 계기로(?) OOO의 자아가 이분되는 장면 등은 뭐 어쩔 수 없는 장르 특징이다 싶었지만 솔직히 말해서 재미있었습니다. 웹소가 우선 재미있기라도 하면 일단 합격인 셈인데 이 작품은 분명 그 이상을 독자에게 선물합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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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차 방앗간의 편지
알퐁스 도데 지음, 이원복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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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퐁스 도데의 여러 작품들은 특히 우리 한국 독자들에게 1) 목가적인 분위기 2) 섬세하게 감정에 호소하는 어투 3) 한국과 공유하는 듯한 일부 역사적 배경 덕에 각별히 어필하는 점이 있습니다. 이 단편집은 특히 프로방스의 짙은 지방색을 깔고 있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코르니유 영감님의 비밀>. 예전 외환위기 때문에 실직한 가장들이 날마다 도서관으로 "출근"하고서는 가족들을 안심시켰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이 코르니유 영감님도 대외적으로 지키고 싶은 체면이 있었지요. 다만 <마지막 수업>도 그랬듯이, 사연도 사연이지만 이를 우리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작가의 어조가 더 애절하다는 느낌도 듭니다. 


<황금 두뇌....> 원로 가수 조용필의 노래 중 "마도요"라는 게 있었지만 p166에는 "꾸를리 꾸를리" 하며 우는 그 새의 울음소리가 의성어로 나옵니다. 두뇌가 황금으로 되어 있으면 그 경도 때문에 사고가 원활하지 못할 테니 이는 결코 좋은 게 아닙니다만 설화의 주인공은 두개골이 황금일 뿐입니다. 남들보다 머리가 크고 그 부모는 아이가 성인이 되자 "낳아주고 길러 준 값"을 요구하고 아들은 그에 응합니다. 설화의 교훈은 다소 뜻밖인데 화자는 "두뇌를 밑천으로 살아야 하는 이들이 쓸데없는 일에 그 두뇌를 낭비한다"고 합니다. 그럼 주인공의 비밀은 "두개골 자체가 아닌 두뇌의 재질"이 황금인 듯도 보입니다. 어쨌든 간에, 자신에게 주어진 소중한 재능을 낭비하지 말고 인생을 알차게 살아가라는 교훈으로 읽히네요. 


러디야드 키플링의 장편을 원작으로 삼은 영화 <왕이 되고 싶었던...>에 보면 주인공이 목청 높여 <민스트럴 보이>라는 노래를 부르곤 합니다. 직접 관계는 없으나 이 책 p173에는 <시인 미스트랄>이 나옵니다. "칼랑달을 읽어 주게!" 시인이 읽어 주는 책은 산문 내용이라도 낭랑하고 구절구절마다에 감정이 스며 있습니다. 이 책에 의하면 "프로방스어의 3/4 이상은 라틴어로 이뤄져 있다(p184)"고 합니다. "재건된 궁전은 다름아닌 프로방스어이며, 농부의 아들은 미스트랄이다(p185)" 이 구절을 읽고 <마지막 수업>의 마지막 구절도 다시 읽어 보면 좋을 듯합니다. 


프랑스 왕은 한때 강대한 권력을 휘두르며 아비뇽에 새 교황청을 세운 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를 교황으로 앉히곤 했는데 이 긴 기간을 아비뇽 유수라 부릅니다. 책에는 p70에 이것 관련 언급이 잠시 나옵니다. 프랑스어로 "보니파스"라 부르는 교황은 여럿이 있었습니다만 그 8세 교황은 프랑스와 심히 적대하다 분사하였으니 이 책 p71에서 프로방스인들이 기리는 그분은 아니지 싶습니다. 여튼 <교황의 노새>는 씁쓸하고 한편으로 우스우면서도 프로방스만의 독특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멋진 작품입니다. 


<별>. 젊은 연인들이 흔히 "지켜준다"는 말을 쓰곤 하는데 아마 이 작품만큼 그 말이 주제어로 부각되는 경우도 없지 싶습니다. 이 소설은 젊은 목동이 아씨를 "지켜 주는" 이야기인데 시대는 한참 서로 떨어져있습니다만 이 이야기는 알고보면 중세 기사도의 다른 버전이기도 합니다. 세르반테스에 의해 실컷 비꼬아졌으나 사실 본래의 정신만 놓고 보면 기사도만큼 남녀의 순정이 넘치는 테마도 없습니다. 여자보다 남자의 지체가 조금은 낮아야 이 낭만적인 테마가 더 맛이 살기도 하죠.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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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2003756000810


소설 속에서 묘사되는 것만 보면 "왕십리"가 무슨 서부영화에 곧잘 배경으로 나오는 툼스톤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지금은 지극히 평범한 서울의 한 부심 지역이 과거 한때 이런 시절도 겼었었나 싶기도 합니다. 


주인공은 어느날 갑자기 왕십리로 돌아왔습니다. 오래전 이곳을 떠났던 터라 어느 나이든 사업가 한 명이 다소 호들갑스럽게 그를 맞을 뿐이지만 당사자는 정작 무덤덤합니다. 여인숙 한 곳에 숙소를 정한 그는 타지에서 적당히 돈은 벌었는지 그리 궁색하지 않게 씀씀이를 보입니다만 여관 종업원이 성X매 관련 호의(?)를 베풀 듯한 눈치를 보여도 바로 거절하는 등 뭔가 엄숙한 분위기입니다. 


그가 수십 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건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나중에 홍콩으로 밝혀지는) 타지에서의 일이 다 끝났으며, 현지에서 얼마든지 자리를 잡을 정도로 능력도 있고 기반도 다진 듯 보이건만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덜기 위해서입니다. 돌아올 필요가 없었고 사실 돌아와서도 안 되었던 그가 기어이 "왕십리"로 돌아온 건 이런 곡절이 있었습니다.


그는 오래 전 자신 때문에 한 가난하고 성실했던 젊은 여성 하나가 인생을 망쳤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자신은 그녀와 결혼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여인의 비천한 배경을 마음에 안 들어했던 부친, 그의 형이 반대했고, 주인공을 집에 가두기까지 합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장래가 촉망되는 대학생이었으나 홧김에 그는 자신의 집에 불을 지르고 맙니다. 형사소추와 가족들의 증오를 피하기 위해 그는 밀항선을 탔었고, 도피 중 그 여인의 장래를 돌볼 여유도 없었음은 물론입니다. 


여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운명의 장난은 참으로 기괴하여, 그는 자신이 예상했던 바와 완전히 다른 미래가, 그녀와 그 자신에게 전개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한때 모든 것을 다 가진 행운아로 여겨졌던 그는 일개 부랑아와 같은 초라한 신세로 떨어진 반면, 그녀는 남부러울 것 없는 부잣집 사모님이 되었고, (스포일러) 바로 그 사업가가 그녀의 남편이었음도 알게 되죠. 


죄책감을 크게 덜었으니 이제 제 갈 길만 가면 될 듯한데 내심은 오히려 반대 방향을 치닫나 봅니다. 한편으로는 첫사랑인 그녀에 대한 집착을 못 버리고,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망쳐진 인생에 대한 보상 심리를 자각한 그는 마침내 자기혐오를 못 이겨 파국적인 결정을 내립니다. 여급과 뜬금없이 살림을 차리는가 하면, 아닐 줄을 뻔히 알면서 폭력배의 속임수에 넘어가 끝내....


얼핏 보면 말그대로 1980년대 홍콩 활극처럼도 보입니다만 작품은 당시 시대상을 씁쓸히 고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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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만났다, 그림책 책고래숲 3
김서정 지음 / 책고래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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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은 꼭 어린이만 읽는 책은 아니며, 때로는 어른이 읽어도 좋습니다. 물론 어린이들이 읽으면, 아직은 어렵게 느껴질 텍스트 위주의 책에 대한 거부감이나 부담감을 줄일 수 있고, 멋진 글에 알맞은 아름다운 그림도 함께 감상할 수 있기에 더욱 좋겠습니다. 이 책은 그런 멋진 그림책들이 어떤 게 있을지 친절히 김서정 평론가가 소개해 주는 책입니다. 


책은 모두 3부로 나뉩니다. 좀 특이하게도 1부에서 어른들이 좋아할 만한 책들을 먼저 소개하며, 2부가 아이들이 재미있어할 책들, 3부가 모두 함께 읽을 만한 책들로 구성됩니다. 읽으면서 우리 주변에 이렇게나, 읽을 만한 그림책들이 많이 나와 있었나 싶었습니다. 1부가 제법 길고 3부가 약간 짧은 편입니다. 


p87에 소개된 <빅 피쉬>는 "희망적 미래 뒤에 숨은 절망적 과거"를 다뤘다고 책에 나옵니다. 이기훈 저자의 작품이며, 작가의 전작인 <양철곰>과 함께 읽으면 더 이해가 깊어진다고 합니다. 한 편의 영화처럼 내용이 전개된다니 내용 자체의 박진감도 기대되며 그림도 함께하니 더하겠다 싶었네요. 혹시 <양철곰>도 따로 소개가 있을까 싶었으나 아쉽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빅 피쉬> 꼭지에 실린 소개만으로도 어느 정도는 짐작이 가능합니다. 책 맨 앞 모든 목차에는 저렇게처럼 작품에 대한 평론가의 한 줄 평들이 실려 있고, 각 부로 들어가서 맨 앞 페이지에 그 책의 제목들이 나옵니다. 


휘황찬란히 빛나는 도심이지만 그 이면에는 차마 말 못할 어두운 사정도 있기 마련이죠. <한밤중에 강남귀신>을 보면 강남이란 우리들 누구나 선망하는 곳이지만 그에 대해서는 "극단의 자본적 욕망을 추구하는 어른들의 행태"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할 수 있다는 걸 독자에게 깨우치는 내용이라고 합니다. 사실 귀신보다 무서운 게 바로 사람이며, 이 책은 어린이 주인공 자미를 통해 독자에게 뜨끔한 교훈을 전달한다고 합니다. 그림은 회화와 판화가 적절히 섞여 미학적 효과를 더한다고도 하네요. 


해적이라고 하면 그간 무섭고 섬뜩한 캐릭터가 대부분이었으며 어린이라고 해도 아마 이런 고정관념에 묶여 있기가 쉬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시마 세이조 작가의 <해적>은 이런 독자의 고정 관념에 보기 좋게 도전장을 던집니다. "하고 났더니"라는 거듭된 연결어구로 이 작품의 내용을 재미있게 요약하고, 동시에 플롯의 매력에 이끌린 자신의 감정도 표현합니다. "슬프고 아름다운 판타지로 삶을 고양..." 그런데 아름다움보다는 "슬픔"이 더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많은 판타지가 그처럼 슬픈 결말을 맞은 게 그런 까닭들이 있었구나 싶기도 했습니다. 


어떤 그림책은 그림이 메인이고 텍스트가 적기도 합니다. 그러나 좀 그러면 어떻습니까? 저자는 <이 작은 책을 펼쳐 봐>를 소개하며, "'책의 내용은 곧 글자'라는 선입견을 이 책은 유쾌하게 뒤집어 준다"고 평합니다. 이어 "유려한 그림과 풍부한 색채, 발랄한 구조 자체가 곧 훌륭한 이야기이자 이야기의 재료(p160)"라고도 합니다. 평론가의 설명은 확실히, 많은 것을 예사로 봐 넘기던 독자의 눈을 틔워 주기도 합니다. 


<두더지의 소원>은 마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피그말리온처럼, 이런저런 소원을 품고 살아가는 존재들의 마음을 두더지와 어느 아이를 통해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여느 동화들이 혹은 서사물이 가는 길과는 살짝 다른 경로를 취하는 이 작품을 보며 저자는 놀라움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저자는 예술의 소명이 무엇인지 혹은 무엇이어야 하는지의 논의로 글을 마무리합니다. 


저자는 책을 평론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한 사람의 독자로서 어떻게 삶의 원동력을 얻곤 하는지도 고백합니다.(p246) 그래서 우리는 이런 평론가의 책을 읽으며 공부도 하고 동시에 같은 독자로서 응원도 얻고 공감도 한 지점에 보낼 수 있습니다. 그림이 함께하여 더 따뜻한 책 구경, 평론가의 소개라서 더 두둑한 설명과 가르침을 접한 듯하여 한결 흐뭇합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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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수현의 친절한 인문학 - 고전 20권 쉽게 읽기
임수현 지음 / 인간사랑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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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기술 진보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요즘의 우리들은 경제나 산업, 혹은 IT 분야에서의 새로운 지식을 학습하기에도 벅찹니다. 학교에서 아직 대학 진학을 위한 공부에 매진 중인 어린 학생들이라면 수능 대비하는 데에만도 벅차서 정신이 없습니다. 이런 마당에 인문, 고전까지 읽을 여유가 과연 있을까요? 한국 최고의 명문대를 나오신 재원이자 인기 강사, 유튜버인 저자는 바쁜 우리들에게 고전 읽기를 오히려 권합니다.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 인문 고전 읽기를 필수 과제로까지 꼽습니다. 

 

"우리가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로 저자가 꼽은 것은 다음의 세 가지입니다. 

 

①첫째, 고전은 세상에 대한 이해를 도와준다
②둘째, 고전은 타인에 대한 이해를 도와준다
③셋째, 고전은 자신에 대한 이해를 도와준다

 

이 말은 책의 뒤표지에도 나오고, "들어가는 말" p16 이하에도 보다 자세히 풀어서 설명됩니다. 첫째 고전에는 세상의 작동 원리가 녹아 있고, 세상의 디테일은 수시로 바뀌어도 이런 "근본" 원리는 쉽게 바뀌지 않으니 오히려 고전을 통해서만이 이런 근본의 이치를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고전에는 무수한 인간 군상의 속셈과 본성과 이해타산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놀랍도록 정확하게 선명하게 풀어 놓은 가르침이 담겨 있습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인생은 실전이라고들 하죠?" 요즘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밈이기도 합니다만 그를 떠나서도 사회 생활에서 무수히 마주치는 사람들, 사람들의 다양한 계산과 전략과 움직임에 당황하지 않으려면 고전이 간파해 놓은 인간 속성과 책략과 행동 패턴에 대한 공부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에 대해 하는 게 지식과 지혜이며, 타인에 대해 아는 게 공감과 소통의 능력이라면, 마지막 "자신에 대핸 이해"는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궁극의 목적과 관계 있습니다. 우리는 왜 열심히 공부해서 학교에 진학하고 직장을 얻으려 애쓰며, 그 직장에서 최선을 다해 자신의 직분을 실천합니까? 속된 말로 출세라고 할 수도 있고, 아니면 자아실현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설령 높은 직위에 오를 만큼 올랐다 해도, 돈을 벌 만큼 벌었다고 쳐도, 내 마음이 어딘가 불편하고 정서의 안정을 찾지 못한다면 이는 모두 뜬구름과도 같은 것입니다. 출세건 돈벌이이건 모두 본인이 내심 행복해지기 위한 수단인데, 결국 이 단계에 다다르지 못한다면 평생을 헛되이 산 셈일 뿐입니다. 고전은 그 무엇보다. 자신을 알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공붓길입니다. 대(大)철학자 "테스형" 소크라테스가 괜히 "너 자신을 알라"고 한 게 아닙니다. 

 

또한 이 책은 1) 바빠서 인문 고전 모두를 섭렵할 시간이 안 나는 직장인에게, 고전의 정수와 핵심만 최단 시간 안에 배울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내용만 앙상하게 요약된 게 아니라, 명석한 저자분의 일이관지(一以貫之)하는 설명이 있어서 이해가 더 잘 되고 읽어내려가는 게 재미있습니다. 설명이 재미있고 뚜렷한 줄기가 잡히기에 관련 서적이나 아예 고전 본책을 더 찾아 읽어 볼 동기가 생깁니다. 이 책에는 인명, 개념의 원어, 원저명 등이 괄호와 함께 일일이 병기가 되어서 심화 독서를 위한 길잡이가 잘 마련되었습니다. 2) 수능과 논술을 대비하려는 학생들에게도 도움이 됩니다. 수능 국어 영역에서 인문, 철학 지문은 내용도 어렵고 분량이 방대하여 도저히 정해진 시간에 파악이 안 됩니다. 미리 그 내용이 내 머리에 파악이 되었다면 실전 시험에서 시간도 절약되고 더 여유 있게 문제를 공략할 수 있죠. 또 인문 교양 부문 지망자라면 이 책은 논술 대비에 "직접적인" 도움이 됩니다. 논리적이고 정확한 설명을 이어가는 저자의 말을 듣다보면 개념 자체도 잘 이해될 뿐 아니라 이해된 내용을 이제 나의 언어로 바꿔 남에게 풀어낼 수 있는 바탕이 생기죠. 

 

이 책에는 철학 서적 열 권, 문학 작품 열 권이 소개됩니다. 그저 제목과 저술 배경, 요지 등만 나오는 게 아니라 객관성을 유지하면서도, 풍성하고 권위 있는 학적 배경을 지닌 이 저자분만의 명쾌하고 일관된 평석이 담겨 있기 때문에 책 읽는 재미와 보람이 뚜렷합니다. 열 권의 철학 서적은 우리가 철학 하면 떠올리기 쉬운 형이상학, 현상학 등의 어렵고 추상적인 분야 외에도, 정치학(사실 정치학이나 외교학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만), 도덕학, 교육학 등 그보다는 소프트한 분야의 고전도 포함됩니다. 


 

철학 서적 열 권을 엄선하시는 것도 어려운 일입니다만 문학 작품 역시 하늘의 별처럼 많은 그 걸작들 중에 이렇게 열 권을 뽑는다는 게 보통 힘들지 않습니다만 일단 정말로 누구나 읽어야 힐 필독서들 아닐까 하고 일개 독자로서 개인적으로 생각해 봤습니다. 열 편의 작품을 보면 시대별, 국가별, 주제별로 참 잘 안배된 선별 같습니다. 문학작품이니만큼 아무리 고전이라고 해도 일단 읽기에 좀 재미가 나야 하겠는데 이 열 편은 재미로만 읽어도 페이지가 잘 넘어가는 작품들이기도 합니다. 

 

5년 전 탄핵 사태 때 많은 이들이 "이게 나라냐?"라며 탄식했던 일을 저자는 상기시킵니다. 그 말의 이면에는 "나라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당위의 요구가 들어 있겠으며(혹은 그래야 하겠으며), 그저 불만과 탄식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으로 그럼 무엇이 올바른 나라인지 깨어 있는 시민으로서 그 내용을 채우고 대안을 제시하려면 공부가 필요합니다(p34). 그런 공부의 첫걸음을 떼려면 이 책에 가장 먼저 소개된 플라톤의 <국가(론)> 같은 책을 읽고 아득한 예전 이 고전 철학자가 국가의 이상상에 대해 무엇을 생각했는지 알 필요가 있겠습니다. 플라톤이 생각한 이상 국가의 원어가 Kallipolis라고 책에 나오는데 고대 그리스어로 Καλλο?(아름다운)와 우리가 잘 아는 (도시)국가 폴리스라는 두 단어들의 결합입니다. 짧은 소개이긴 하나 고전 <국가>의 본체적 내용이 모두 담겨 있는 데다 저자의 시원시원한 통찰까지 감상 가능한, 참으로 유익한 아티클이었습니다. 참고로, "이게 나라냐"라는 우려와 허탈감이 끝을 모르고 이어질 때 우리는 국가의 본질이 본디 깨어있는 시민이 통제를 가하지 않으면 안 될 "괴물, 리바이어던(존 로크의 맥락에서)"이라는 점을 잊지 않아야 한다고도 책 중반부(p97)에서 저자는 말합니다.


 

어떤 정치인은 "권력은 잔인하게 써야 한다"라고도 했다지만, 이 말에의 찬반을 떠나 권력의 속성 자체가 원래 비정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난세가 시대의 영웅을 낳는다고 중세 이탈리아는 여러 도시 국가들의 항쟁과 명문가들의 각축 때문에 바람잘 날이 없었지만 대신 각처의 인재들이 세력가에 의해 널리 발탁되어 명성을 떨치거나 실력을 발휘하기도 했는데 마치 저때로부터 천 수백 년 전의 중국 제자백가 시대를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이 중 책략가 혹은 정치사상가로서 큰 활약을 한 사람이 마키아벨리인데 저자는 그가 "역량과 충성심"을 증명하기 위해 <군주론>을 썼다고 소개합니다. 물론 이 책은 로렌초 데 메디치에 대한 신앙고백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정치의 본질에 대한 그의 지론(p56)"이기도 합니다. 마키아벨리가 묘파한 인간성과 정치의 본질은 대단히 부정적이고 때로 불쾌하기까지 하지만, 저자는 마키아벨리의 인격이나 관점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인간사의 그런 부정적 본질 자체를 마키아벨리가 윤색이나 왜곡 없이 우리에게 그대로 밝혔을 뿐이라고 합니다. 정치도 외교도 이를 학문적으로 분석할 때는 "현실주의, 리얼리즘"의 시야에 크게 의지하기도 하는데 임수현 저자님의 전공이 이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외교학이기도 하며 한국 외교학의 권위자들이신 그 스승님들도 한스 모겐소 류의 현실주의 학파이신 분들(이나 그분의 제자분들)이 많으셨으리라 짐작됩니다. 


 

그저 철학 자체의 대명사로도 여겨지는 임마누엘 칸트의 이름은 누구나 알지만, 정작 그가 무엇을 주장한 사람인지는 언뜻 떠오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실 이분은 너무도 많은 업적과 주장을 남겼기에 한 마디로 요약한다는 자체가 무모한 시도이긴 합니다만 이 책에서 소개하는 대로 그의 3대 저작 중 <실천이성비판>의 내용을 둘러보다 보면 그의 심오한 세계에 대해 개략이나마 일면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p145에는 그의 저술에서 한 대목이 인용되었는데 강제(Neigung), 의무(Pflicht), 구속(Zwang) 등의 개념이 어떻게 분화되고 구별되며 나아가 발전적으로 변모하는지 세심하게 다뤄진 명문입니다. 또 저자는 이를 인용하며 정확한 번역과 함께 핵심 개념어에는 일일이 독일어 원어를 다 병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원어를 알아야 나중에 깊이 있게 더 공부할 수 있는 발판이 생기는 법입니다. 

 

고 미셸 푸코는 이제 꽤 오래전에 전성기(?)가 지난 철학자로 여겨질 만한데도 대표작 <감시와 처벌>이 현재까지도 워낙 임팩트있게 환기될 만한 상황이 많이 벌어져서인지 정치 진영의 좌우를 막론하고 꾸준히 인용되고 있습니다. 저자는 푸코의 판옵티콘 개념을 설명하면서, 딱히 청와대나 백악관, 혹은 중남해 같은 곳에서 국민을 향해 들이대는 간교하고 집요한 감시와 통제의 눈초리뿐이 아니라, "고정된 실체도 아닌, 사기업(보험회사라든가), 단체, 교육기관, 심지어 1인 미디어나 개인조차도" 이런 권력의 위치에서 우리들을 내려다보고 조종할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사실 이야말로 미셸 푸코가 저 고전에서 대중을 일깨우려고 했던 본지이며, "감시의 일상화"가 가장 우려되는 기본권 침해가 되어 버린 요즘, 우리 독자들이 더 높은 우선순위로 성찰하고 경계해야 할 방향이 어디인지를 짚어 준다고 하겠습니다. 


 

저자는 책 후반부에서 세계사를 대표할 만한 문학 작품 10선을 놓고 재미있고 유익한 이야기를 들려 줍니다. "돈키호테"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듯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지만 그 누구도 읽지 않은 책(p15)"이란 오명이 있을 만큼, 심지어 이 보편적인 고전 명작 중에도 우리가 "이런 대목이 있었나?" 같은 의문이 절로 들 만큼 새롭고 신기한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둘시네아의 본명이 알돈사 로렌소라는 점, 그의 기사도 행각을 포기하게 만든 하얀 달의 기사가 구체적으로 그에게 무슨 제안을 했었는지에 대해서도 저자는 독자들에게 자세히 들려 줍니다. 그리고 이런 점들을 통해 "인생에 대해 겸손히 돌아보게 돕는" 세르반테스의 진짜 의도, 혹은 고전의 참된 의의에 대해 생각하게 이끕니다. 

 

다킨스의 <위대한 유산>을 통해 위대한 빅토리아 치세기에 무서울 게 없이 세상 위에 군림하던 대영제국 수도 런던에서 일약 팔자를 고칠 듯했던 하층민 핍이 자기 주제를 깨닫는 과정에 대해 저자는 책 한 권을 실제로 읽는 것보다 더 재미있게 들려 주고, 또 숨은 의미까지 짚어 가며 독자를 매혹합니다. 일개 치정극으로 읽힐 수 있는 <안나 카레니나>에, 당시 제정 러시아 사회의 어떤 모순과 위선이 그 지배 구조를 좀먹어갔는지에까지 저자는 천착하며, 또한 이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바 없는 남녀의 애정사에 대해 그 핵심을 통찰합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아마 서양 문학을 모든 면에서 완성지었다 할 대작인데, 저자는 이 대작의 복잡다단한 구조 속에서 살인 미스테리의 줄거리를 요령껏 잘 뽑아내어 독자의 흥미를 유발하는 한편, 일견 종교, 철학, 역사로 난해하게 구축된 듯한 작품 속에서 인간의 원초적 본성 몇 가닥을 예리하게 추출하여 도스토옙스키가 이 작품 안에 얼마나 많은 인생의 비의를 이스터에그처럼 숨겨 놓았는지 증명하기도 합니다. 


 

고전은 복잡하게 접근하면 한도 끝도 없이 어렵습니다. 이런 어려운 고전을 쉽고 조리있게 풀어내는 건 명석하고 맑은 혜안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젊은 나이에 많은 것을 이룬 똑똑하신 저자분이라서 이런 깔끔하고 재미있으며 유익한 책이 나올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문 고전 중에서 문학과 철학 편을 다루셨으니 다음 저서에서는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 저자의 전공이신 외교학 그 현실주의 관점이 잘 반영된 유익한 저작이 나오면 어떨지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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