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BN 2003756000810


소설 속에서 묘사되는 것만 보면 "왕십리"가 무슨 서부영화에 곧잘 배경으로 나오는 툼스톤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지금은 지극히 평범한 서울의 한 부심 지역이 과거 한때 이런 시절도 겼었었나 싶기도 합니다. 


주인공은 어느날 갑자기 왕십리로 돌아왔습니다. 오래전 이곳을 떠났던 터라 어느 나이든 사업가 한 명이 다소 호들갑스럽게 그를 맞을 뿐이지만 당사자는 정작 무덤덤합니다. 여인숙 한 곳에 숙소를 정한 그는 타지에서 적당히 돈은 벌었는지 그리 궁색하지 않게 씀씀이를 보입니다만 여관 종업원이 성X매 관련 호의(?)를 베풀 듯한 눈치를 보여도 바로 거절하는 등 뭔가 엄숙한 분위기입니다. 


그가 수십 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건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나중에 홍콩으로 밝혀지는) 타지에서의 일이 다 끝났으며, 현지에서 얼마든지 자리를 잡을 정도로 능력도 있고 기반도 다진 듯 보이건만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덜기 위해서입니다. 돌아올 필요가 없었고 사실 돌아와서도 안 되었던 그가 기어이 "왕십리"로 돌아온 건 이런 곡절이 있었습니다.


그는 오래 전 자신 때문에 한 가난하고 성실했던 젊은 여성 하나가 인생을 망쳤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자신은 그녀와 결혼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여인의 비천한 배경을 마음에 안 들어했던 부친, 그의 형이 반대했고, 주인공을 집에 가두기까지 합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장래가 촉망되는 대학생이었으나 홧김에 그는 자신의 집에 불을 지르고 맙니다. 형사소추와 가족들의 증오를 피하기 위해 그는 밀항선을 탔었고, 도피 중 그 여인의 장래를 돌볼 여유도 없었음은 물론입니다. 


여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운명의 장난은 참으로 기괴하여, 그는 자신이 예상했던 바와 완전히 다른 미래가, 그녀와 그 자신에게 전개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한때 모든 것을 다 가진 행운아로 여겨졌던 그는 일개 부랑아와 같은 초라한 신세로 떨어진 반면, 그녀는 남부러울 것 없는 부잣집 사모님이 되었고, (스포일러) 바로 그 사업가가 그녀의 남편이었음도 알게 되죠. 


죄책감을 크게 덜었으니 이제 제 갈 길만 가면 될 듯한데 내심은 오히려 반대 방향을 치닫나 봅니다. 한편으로는 첫사랑인 그녀에 대한 집착을 못 버리고,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망쳐진 인생에 대한 보상 심리를 자각한 그는 마침내 자기혐오를 못 이겨 파국적인 결정을 내립니다. 여급과 뜬금없이 살림을 차리는가 하면, 아닐 줄을 뻔히 알면서 폭력배의 속임수에 넘어가 끝내....


얼핏 보면 말그대로 1980년대 홍콩 활극처럼도 보입니다만 작품은 당시 시대상을 씁쓸히 고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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