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후에 오는 것들 세트 - 전2권 사랑 후에 오는 것들 (개정판)
공지영.츠지 히토나리 지음, 김훈아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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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종종 잊지만 공지영 작가는 본래 달달한 로맨스도 잘 쓰는 분입니다. 공지영 작가가 이처럼 독자들에게 큰 사랑을 받게 된 처음의 비결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공 작가가 츠지 히토나리와 함께 시점만 달리한 채 같은 사연을 소재삼아 이 멋지고 근사한 기획을 실현한 게 벌써 14년 전입니다. 요즘 나오는 소설들을 보면 챕터마다 번갈아가며 남녀 주인공 시점이 교차하게 하는 기교를 쓰곤 하는데, 독립된 두 개 작품 포맷이긴 하지만 벌써 14년 전에 이 두 분 작가가 시도했었다는 점도 이 작품을 다시 보게 하는 요소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이 멋진 작품의 사연은 진즉에 영상물로 옮겨졌어야 했는데 이제서야 OTT 쿠팡플레이가 과감하게 투자하여 드라마가 나왔다는 게 아쉬울 뿐입니다. 9월 27일 금요일에 드디어 1회가 방영되었는데 소설을 재미있게 읽었던 분들은 반드시 봐야 할 명작의 스멜이 벌써부터 풍깁니다. 쿠팡이라는 기업의 구조를 생각해 볼 때, 이 회사가 추진력있게 기획을 밀어붙이지 않았다면 과연 드라마가 이렇게 론칭되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いつかこの恋を思い出してきっと泣いてしまう>는, 우리말로 옮기면 "언젠가 이 사랑을 떠올리면 분명 울어버릴 것 같아" 정도가 됩니다. 이 드라마는 지니TV에서 서비스하며 이미 본 분들도 많을 텐데, 여기에 사카구치 켄타로가 조연 나카조 역으로 나왔었습니다. 몇 년 전부터 부쩍 주연을 자주 맡는 이  사카구치 겐타로가 바로 <사랑 후에 오는 것들>에서 바로 아오키 준고 역을 맡는다고 발표되었을 때 그것참 잘 어울리겠다 싶었습니다. 또 최홍 역은 발랄한 이미지의 이세영이 캐스팅되었는데 이 역시도 그럴싸합니다. 

전 남성 독자인데도 개인적으로는 공지영판 최홍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들었습니다. 최홍은 출판사 직원인데 한시도 가만있지 않고는 못배기겠다는 듯 그저 지켜보기만 해도 즐거운 기운이 우리에게 옮는 에너자이저입니다. 반면 최홍이 바라보는 준고는 약간 "다큐"인 진지충입니다. 본래 남녀는 자신과 상당히 다른 이성에게 끌리는 법이라서인지, 최홍 시선에서 보는 이야기에서는 저 축 늘어지는 준고에게 먼저 최홍이 빨려들어간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젊은이가 무서운 건,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무엇이 되어 돌아올지 모르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는데, 준고는 정말로 7년만에 작가가 되어 한국의 최홍을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의 컬러는 바뀌지 않아서 과거처럼 진지하고 또 무거운 분위기야 예전 그대로입니다. 

남녀 사이에 친구라는 게 있을 수 있을까요? 얼마든지 있을 수야 있으나, 여기서 김민준과 최홍 사이를 보면 그 유지가 참 힘들다는 생각입니다. 최홍은 아무리 애를 써도 민준이 남자로 보이지 않는데, 민준은 홍이를 기어이 자기 여자로 만들고 싶어합니다. 홍이 성향을 고려할 때 이 결합은 참 이뤄지기가 힘들다는 점 누구나 공감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에서 가장 안타까운 게 민준이었습니다. 

홍이 성격을 보면 어디서 이런 통통 튀는 기질이 나왔을지 살짝 궁금해지기도 했는데, 다니는 출판사 대표님인 아버지도, 또 그 점잖으신 어머님도 홍이의 저 못 말리는 스타일하고는 상당히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반면 그 동생인 록(綠)이는 홍이보다 더 현실적이고 계산적이면서도 더 성숙한 유형이며 이 사연에서 홍-준고 관계가 발전하는 데 만만치 않은 걸림돌입니다. 이 록이 캐릭터는 정말로 그 아빠 그 엄마 딸이라 할 만큼 성격의 일부씩을 잘 물려받았습니다. 공지영판에서 가장 생생하게 잡힌 인물이며, 순전히 저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츠지 히토나리 판보다 공지영 판이 더 메인이 아닌가 싶었던 게, 이 록이 캐릭터가 주는 강렬한 존재감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준고의 성격에 그늘이 드리운 건, 냉정하고 다소 이기적인 어머니로부터 상처를 받아서도 있을 것입니다. 츠지 히토나리 판에서는 저런 섬세한 남성의 내면이 치밀하게 그려지며, 왠지 최홍의 가족들이 각기 자기만의 방식으로 한국인의 역사의식을 대변한다고 느껴진 반면, 준고의 가족들은 미국 백인이나 유럽인들처럼 철저한 개인들이기만 합니다. 이는 공지영과 츠지 히토나리의 작가 성향이 다른 데에서도 기인하는 결과이겠습니다. 

츠지 히토나리 판에서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가족들에게서 미처 받지 못한 관심이나 애정을, 준고는 이들 고맙고 다정한 주변 인물들로부터 하나하나 챙기려는 듯, 혹은 (서로끼리는 잘 모르는) 이들 인물들이 열심히 위대한 작가 한 사람을 만들어 내려는 듯 주변을 공전하며 각각의 따스한 파장을 준고의 주파수가 잘 접수하도록 뿜어냅니다. 다시 봐도 참 근사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이 두 작품은 요철을 절묘하게 맞추면서 멋진 이중 우주를 형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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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세계사 한정판 세트 - 전5권 벌거벗은 세계사
tvN〈벌거벗은 세계사〉제작팀 지음 / 교보문고(단행본)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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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에서 이 교양예능 프로그램을 야심차게 론칭한 게 어언 4년 전입니다. 처음에는 약간의 잡음이 있었는데, 오히려 그런 소동 덕에 인지도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내용을 계속 알차게 유지하여 이제는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보면 어디에선가는 재방송 중인 인기 프로그램으로 자리를 굳힌 듯합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이 한정판은 전 5권 구성인데, 여태 <벌거벗은 세계사>는 총 열 권이 교보문고에서 출간되었습니다. 그 중 권력자 편, 사건 편 둘째 권 같은 건 이 세트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세트의 책등 부분을 보면 프로그램에서 로고화한 "벌거벗은 세계사" 제목이 예쁘게 이어진 형태로 인쇄되었기 때문에, 이 프로그램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한정판으로서 소장가치가 충분합니다. 

이 한정판에서 제1권(래핑 상태에서 맨오른쪽)은 사건편이며, 그 처음에 나오는 게 그리스 신화 에피소드입니다. 이 회차는 김헌 선문대 교수가 진행했는데 개인적으로 가장 재미있게 봤었습니다. 김헌 교수는 제우스, 테세우스, 페르세우스 등을 설명하며 그들의 신성(神性), 혹은 반신성(半神性)을 쉽게 풀어 주는데 이때가 시즌2였습니다. 유럽 출신 외국인들이 주축이 된 패널들이 주제가 더 잘 부각되게 적절한 리액션이 따라 줘서 시청자들도 더 흥미롭게 본 듯합니다. 해당 대목에 컬러 사진 등이 자료로 보강되어, 가뜩이나 재미있게 봤던 독자들에게 멋진 리마인더 미디어 노릇을 해 줍니다. 

청일전쟁, 러일전쟁은 무대가 동아시아였고 그래서 한국사 강의 씬에서 인기가 높은 최태성씨 등이 이 코너를 맡았습니다. 청일전쟁은 특히 한반도를 전역으로 삼았고, 처음에는 일본 측에 승산이 없다고 봤던 게 유럽 쪽의 대세적 시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인적, 물적 전력의 우위상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지리멸렬상을 보인 게 청나라였고 사실상 집정을 맡았던 이홍장은 참패의 운명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이 전쟁에서 그저 정해진 운명처럼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향해 달려가는 징검다리 돌 하나쯤으로만 알았지만, 사실 그렇게 전쟁의 경과상이 간단치만은 않았음을, 특히 이렇게 잘 정리된 텍스트본을 통해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어떤 역사적 사건이건, "벌거벗겨 봐야" 그 실체가 제대로 드러남을 다시 수긍하게 됩니다. 

이 세트 인물편에서, 벌거벗겼을 때 그 실체가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인물은 아마도 콜럼버스일 것 같습니다. 그는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사실 이보다 더 서유럽 중심적인 시각도 드물 것입니다. 유럽인들이 아메리카를 "발견"하기 전에도 이미 선주민이 그 나름의 세련된 문명을 발전시키며 정주하는 중이었고, 나중에 무력을 동원하여 기존 문명을 말살하는 만행까지 저질렀던 죄악상은 그동안 은폐되었습니다. 적절하게도 두 패널이 가해자(?), 피해자에 각각 속하는 이들로 섭외되어 교육적으로 더 유익했다고 생각합니다. 

전쟁사는 이런 프로그램이 그 어떤 책이나 보고서보다 더 입체적으로 조명할 수 있는 소재이며, 이미 방송 포맷을 통해 생생하게 전달, 정리된 내용이, 이렇게 도판이 보강된 텍본을 통해 다시 안정적으로 독자를 만나니 우리 독자들에게는 그야말로 최고의 미디어 체험이 됩니다. 이 중에서 제가 집중하여 시청하고 읽었던 대목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 파트였는데, 전남대 사학과 박현도 교수가 프로그램도 잘 진행하시고 유익한 정보도 많이 전달했었습니다. 저때로부터 1년 7개월여만에 하마스와 이스라엘 간에 전면전이 터져 오늘에 이르니 시의성 또한 뛰어납니다. 

경제편도 아주 유익한데, 피렌체와 그를 둘러싼 토스카나 일대에서 세력을 떨쳐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들었다놓았다 한 메디치 가문이 책 처음에 다뤄집니다. TV에서는 이대 사학과 교수 남정국씨가 풍부한 경제 지식을 동원하여, 왜 이때 메디치 가(家)가 유럽과 지중해 무역을 쥐락펴락할 수 있었는지 시청자들에게 조감시켜 주었습니다. 제가 특이하게 본 건 고대 조영헌 교수가 진행한 "국제도시 상하이" 편이었는데, 상하이는 일찍 영국 조계에 든 채 20세기 초에도 대단히 경제적으로 번성했었으며, 공산 혁명 후 수십 년 간 닫혔다가 덩샤오핑, 장쩌민 등 훌륭한 지도자들의 활약으로 다시 과거의 영광을 회복했음을 멋지게 브리핑해 주었으며, 책에도 상당히 깔끔하게 잘 정리되었습니다. 

아마 <벌거벗은 세계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인기있는 에피소드가 많이 포함된 게 잔혹사 편이겠으며 책도 이 세트에서 제5권으로 편입된 잔혹사 편이 가장 많이 팔린 줄로 알고 있습니다. 체르노빌 폭발 사고는 사실상 소련 붕괴의 트리거가 되었으며, 다만 최근 MS사의 조치가 뉴스를 탔듯 미국의 스리마일 원전은 다시 가동에 들어가니 역사의 아이러니를 실감합니다. 이란의 히잡 혁명은 여성의 표현 욕구, 자립을 위한 몸부림은 아무도 말릴 수 없음을 다시 확인하게 하며, 미국의 서부 개척사는 저돌적인 산업의 확장세 속에 이름없는 희생자들이 얼마나 많이 발생했는지에 대해 독자의 맹성을 촉구하기도 합니다. 

한정판 세트가 정말 예쁘게 뽑혀서 시청자들이 두고두고 기념으로 간직할 만합니다. 보기만 해도 뿌듯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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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 건 죽음
앤서니 호로위츠 지음, 이은선 옮김 / 열린책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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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미스테리 장르물에서 가장 친근한 소재라면 사설 탐정의 좌충우돌, 영화 등 모험 사업 현장에서의 삐걱거림, 그리고 셀럽의 죽음 등입니다. 어렸을 때는 이런 소재로 대중장르물에서 이처럼 풍성한 이야기가 가능한 건 오로지 미국뿐이겠다 싶었는데, 지금 우리 나라 모습을 보면 이런 쪽에서는 오히려 일본을 능가합니다. 거꾸로 20세기 들어 미국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영국 작가가 쓴 이 작품을 읽고 느낀 건, 머지않아 한국에서도 호손 시리즈 같은 게 나올 만하겠구나 하는 점이었습니다. 온갖 연예인, 셀럽, 인플루언서 들이 대중과 접촉하고 희한한 화젯거리를 만들어내며 때로 미심쩍은 인명 희생까지 빚어지니 말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첫째챕터 씬#27을 보면 영화촬영현장이 얼마나, 더군다나 야외촬영이라면 온갖 애로사항이 돌발적으로 꽃피는지 잘 나옵니다. 그런데 이 대목을 읽으면서 저는, 앞으로는 AI가 매우 정교하게 생성하는 그래픽의 위력 덕분에 이런 상황이 벌어지기가 잘 힘들어지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사람들이 이제는 CG에 매우 질려합니다. 그래서 일부러라도 현지에서 찍는 건데(언론에 노출하여 토픽도 의도적으로 생산하고), 이 역시도(바로 이 소설에 잘 나오듯) (별 의미도 없는) 지출이 만만치 않습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영화 산업은 그저 가오에 죽고사는 대사업가가 돈 버린다 생각하고 주변의 찬탄을 즐기는 맛으로 진행하는 것입니다. 그 주변에서 양심없는 스탭들이 눈 먼 돈 "줏어들 먹는" 풍조도 어디나 비슷하고 말입니다. 

미국이나 우리나 능력은 부족하고 양심은 더 부족한 변호사들이 제도의 맹점에 편승하여 가뜩이나 더러운 판을 더 더럽히며 공익을 대변하기는커녕 있던 질서도 더 어지럽힙니다. 이 소설에도 별의별 희한한, 타락하고 배배꼬이며 나쁜 쪽으로만 혈안이 된 변호사들이 몇 등장하죠. 소설을 다 읽어 보면 애초에 이 변호사라는 작자들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일이 이만큼 꼬이지도 않았겠다 싶을 건데 현실도 마찬가지입니다. 변호사가 사건을 해결하는 게 아니라 없던 새 사건까지 만드는 판이니 말입니다. 

앞에서 이미 말했지만 영미(중에서도 특히 미국) 장르물에 등장하는 재미있는 양념, 전채, 디저트, 코믹 릴리프, 나아가 메인 디시가 바로 탐정이라는 직종입니다. 한국에서는 그간 흥신소가 준불법이었기에 양지에 자주 등장하지 않았으나 이제 법제화가 허용되었기에 앞으로 어떻게 사회에 인식될지가 관심 대상이죠. 미국 장르물의 탐정들은, 어떤 경우 대단히 경박하고, 어떤 때는 귀족적이며, 어떤 때는 범죄자와 다를 바 없이 타락한 속성이었습니다. 호손은 경우 전에 형사였고 지금은 개인 영업이니 former or turned 공히 detective입니다. 그 성격은, 마치 현대 일본 장르물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캐릭터들처럼 예측불허형입니다. 작가 호로위츠(실물)가 우리에게 처음 이름을 올린 홈즈물(현대판)의 그 주인공과는 아주 대조적이죠. 

호로위츠(실물 작가)는 언제나처럼 작품 중에서 self-referential한 스타일을 구사합니다. 작가는 미국에서라면 이미 영화제작 등 다른 인접 분야에 한 발 들여놓고 활동을 겸업하는 일이 많았는데 이를테면 p138에도 그런 분위기가 물씬 배어나죠. 작가란 확실히 스릴 넘치면서도, 여성들의 선망 어린 시선을 즐겨받고 때로는 도에 넘치는 갈채를 받는(본인은 그렇게 생각않는) 그런 직종입니다. 대개는 사회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대학을 나와, 이런저런 여성들과 염문도 뿌리고, 그러다 오지게 사고를 쳐 신불자가 되고... "그녀는 정말로 일요일 저녁에 린드허스트 부근의 외딴 오두막집에 있었을까?(p191)" 당연히 그에게 먼저, 대뜸, 들었어야 할 의심이 아니었습니까. 

"나는 당신의 적이 아니에요 호손. 도우려는 사람이지(p241)." 그 말을 지금 새삼스럽게 하는 호로위츠(캐릭터)나, 이런 말을 새삼스럽게 상대방에게서 구태여 꺼내게 만드는 디텍티브 호손이나 참 답답하고 코믹한 인물들입니다. 그런데 호로위츠의 작품들에서 독특하게 사람의 마음을 끄는 게 이런 불완전한 허점투성이들이 풍기는 매력이며 독자에게 선사하는 재미입니다. ㅎㅎ p354에서 호로위츠는 느닷 봉변을 당한 후에도 그답게(?) 해학적인 상황 해석을 늘어놓는데 눈치빠른 독자는 벌써 여기서 사건이 어떤 결말을 향해 치닫을지 감 잡았을 터입니다. 전개가 스피디하면서도 수다스럽고 아마도 영어 원문으로 읽었으면 훨씬 더 재미있었을, 호로위츠-호손 요철 듀오의 본격 활약상이 기대되는 두번째 작품이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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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로 보고 그림으로 듣는 음악인류학 - 불교와 세계종교
윤소희 지음 / 민족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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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비잔티움 제국도 인근의 야만 슬라브 족을 다룰 때 우아하고 그윽하며 사람의 정서를 근원에서부터 진정시키는 교회 음악과 미술의 탁월함을 충분히 활용했습니다. 이처럼 종교 의식의 진행에는 진중하고 아름다운 음악의 역할이 필수적이며, 이런 이치는 아시아에서 훨씬 이른 시기부터 발견되고 구체화했습니다. 이 책의 부제에는 "불교"라는 단어가 들어갔지만, 책의 내용은 그에 한정되지 않아서, 불교 음악을 중심으로 장대하고 정치한 논의가 이뤄지되, 가장 먼저 탄생한 종교음악인 불교 음악 이후에 등장한 유교, 도교 음악까지 분석합니다. 또 책 후반부에는 이미 중세때 접점이 있었던 이슬람에 불교 음악이 남긴 흔적(예컨대 황홀경 체험을 중시하는 수피즘)이라든가, 알고 보면 본질이 상통하는 기독교 음악과의 관계까지 논급되니 실로 엄청난 스펙트럼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세종은 우리 국어 교과서에도 나왔던 <월인천강지곡>을 지었고, 그 아들 수양대군 이유는 이에 화답하여 <석보상절>을 썼는데 모두 불교 사상이 가득 밴 문학작품이자 음악 가사입니다. 책 p143에도 나오듯 원래는 궁중악과 범패(=불교음악)이 함께 연주되었으나, 국행수륙제가 이후 폐지되면서 범패는 민속에서만 연주되었으며 이것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범패의 속성을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p146에 나오듯 불교 음악의 원류는 힌디 경전인 <베다>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으며, 세종과 그 아들 이유가 만든 정간보 역시 불교 음악의 큰 틀에 기대었습니다(p149). 

세종 연간에 시작하여 성종 때 완성된 게 조선이라는 국가 시스템입니다. 성종은 세종의 증손자입니다. 세종부터가 불교에 대한 그윽한 신앙심을 지닌 인물이었는데, 나라가 성리학을 신봉하는 신진 사대부를 주축으로 세워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했습니다. 아마도 총명하고 조화로운 그의 정신이, 불교의 지극한진리에 깊이 감화된 바 있었던 덕이겠습니다. 성종은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 정치의 중심부에 재야 사림을 끌어들인 최초의 군주였으나, 조정에는 여전히 전통의 불교 진영에 한 발을 걸친 인사들이 포진했었습니다. p82에는 성종 대(代)에 완간된 <악학궤범>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조선의 아악이라고 하면 궁상각치우의 5음계만 생각하지만, p85에 자세히 나오는 대로 격팔상생의 원리에 따라 12음이 탄생합니다. 이는 또한 적절한 대응 과정을 거쳐 24절기에 연결되는데 동양 철학 고유의 심오한 경지까지 음악을 통해 엿보는 게 가능하죠. 

유계(劉季)가 세운 한나라는 후대의 몇몇 통일 왕조처럼 마냥 국수적이거나 쇄국적이지 않았고 서역과 두루 교류했습니다. 이연년이라는 인물은 책 p105에도 니오듯이 사마천의 <사기> 중 열전의 한 부분에서 주제로 다뤄지는 인물입니다. 이 사람은 "영행열전"에서 다뤄지는데, 영행이라 함은 권력자의 측근에서 듣기 좋은 말을 하며 총애를 입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사실 <사기>나 <한서>나 이연년이 독립적으로 서술되지는 않았고 <한서>에도 열전 파트 중 "영행전" 속에서 평론됩니다. 예나 지금이나 윗사람의 사랑을 받으려면 노래를 잘하는 게 하나의 방법인가 본데, 이연년이 확실히 음악 전반에 조예가 깊었는지 한실 조정의 악부(樂府)를 그가 만들었다가, 이후 실각한 후에는 대거 축소되었다는 말이 p107에 나옵니다. 

진나라가 북쪽 여러 오랑캐에 의해, 그 전에 황족 내분에 의해 멸망한 후에는 5호 16국 시대가 열렸고 이후 남북조 시대가 전개되었는데 이때부터는 중원이 멀리 서역의 문화에 대해서도 관대해집니다. 또 이때 불교가 구마라집(p132) 등 승려들의 노력으로 본격 교세를 화하(華夏)에서 넓히게 됩니다. 저자는 이때의 대대적인 문화 교류와 발전에 대해 p112 이하에서, 퓨전(남), 크로스오버(북)이란 말로 그 격동상을 요약합니다. 또 이후 등장한 당나라의 영향은 실로 동아시아 일대에 큰 흔적을 남겼는데, 일본도 이무렵부터 중국 문화를 본격 수입하였고 그 대표적 유물이 p113에 나오는 쇼쇼인[正倉院] 소장의 당비파입니다.  

건달이라는 말은 현대에 이르러 어떤 경우에도 좋은 뜻으로는 쓰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원 간다르바는 불교의 호법신(護法神)이며 결코 나쁜 의미가 아니었으니(p185), 이것이 조선 중기 이후 전개된 억불숭유의 잔재라고 저자는 말씀하십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불교는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의 바미얀 석굴 파괴라든가, 12세기 말 델리 술탄국 아이바크의 날란다 승원 절멸조치와 같은 여러 박해를 외부 세력으로부터 받았는데, 모두가 그 평화지향적 성격 탓이었습니다. 책 p187 이하에서는 산대극이 어떻게 탄생했으며 내용상 변천을 겪었는지가 컬러 사진들과 함께 자세히 서술됩니다. 

어느 종교든 율법과 경전을 중시하는 게 정통파이며 명상, 황홀경, 신비체험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분파는 이단시됩니다. 그렇다고 수피즘이 언제나 이슬람 주류에서 벗어났던 건 아니고 오히려 술탄이나 샤의 정책 기조에 따라 더 환영받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책 p242를 보면 20세기 초 튀르키예 이슬람이 수피즘을 이단으로 규정했다고 나오는데 이때는 이미 터키에서 세속주의에 밀려 이슬람이 크게 위축되었을 때입니다. 책에서는 시인, 음악가, 신학자, 수피 수도사였던 메블레비 루미에 대해 자세히 설명됩니다. 저자는 문화상품과 종교적 순수성의 양립 가능성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해 보자고 제안합니다. 17세기 투르크의 빈 포위는 기독교 세계의 존속 여부에 큰 고비가 되었는데, 이 영향으로 심벌즈라는 튀르키예 악기가 들어왔고 모차르트의 터키행진곡이 탄생했다는 저자의 분석은 흥미롭습니다. 

불교 음악에서 시작하여 전세계 음악사, 문화사를 아우르는 저자의 필치에서 실로 통섭의 위대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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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적인 세상에서 사는 지혜
발타자르 그라시안 지음, 이동연 편역 / 평단(평단문화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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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누구나 초월적이고 고아한 가치를 추구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속한 세상은 대단히 타산적이며 그 나름의 합리성에 의해 빈틈없이 작동되는데, 이런 논리에만 따르는 사람을 두고 우리는 속물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세상의 트렌드에만 따르지 않겠다며 간혹 우리는 귀여운 일탈도 꿈꾸는데, 난 너희들과 다르다며 공연히 엇박을 내는 이런 태도가 어쩌면 속물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발타사르 그라시안은 이미 한국 독자들도 꽤 알고들 있는 근세의 철학자 겸 성직자인데, 현대인에게도 깊은 공감을 주면서도 솔직담백한 가르침을 남겨 오늘날에도 애독됩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발타사르 그라시안보다 근 백 년 뒤의 철학자 장 자크 루소는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p33에서 저자는 자연 그 상태만으로는 세상에 널리 쓸모있게 불릴 수 없고, 다듬고 또 다듬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탁월함은 우리들 중 누구에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탁월함을 수련하지 않고, 제멋대로 휘두르며 그저 내세우는 허영에 좌우된다면 이는 재능이 아니라 야만과 폭력으로 떨어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또 재주가 있으면 잘 다듬어서 쓸모있게 사회에서 활용이 되도록 해야지, 그대로 묻어둔다면 그 역시 큰 회한으로 남는다고 합니다. 성직자의 말씀치고는 상당히 의외의 울림을 줍니다.  

빌타사르 그라시안의 책에서는 마치 세상살이에 달통한 노련한 선배의 팁 같은 충고도 여럿 나옵니다. 예를 들어 p100 같은 곳을 보면, 우리는 누구나 어떤 과제나 목표에, 혹은 누군가와의 관계에 매몰되어 너무 깊숙하게 빠져들기도 합니다. 몰입이나 열중은 성공을 위해 꼭 필요한 단계이죠. 그러나 결국 목표가 달성 안 되고 좌절하기도 하는 게 보통입니다. 이럴 때를 대비하여, 마치 미노타우로스의 라비린토스에 빠져든 테세우스처럼(물론 테세우스는 이때 목적을 이룬 상태였지만), 아리아드네의 실패를 미리 마련하여 그를 통해 미궁을 빠져나왔듯이 이 수렁에서 발을 뺄 장치를 예비할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중근세 성직자치고는 놀랄 만큼 실용적인 충고입니다. p212를 보면, 대비책이라는 건 여행 중인 나그네에게 고향과도 같다는 말이 나옵니다. 

동서고금의 재사(才士)들을 보면 공연히 상대를 자극하여 자신이 얼마나 머리가 좋고 상황을 잘 바꿀 수 있는지 과시하는 수가 있습니다. p152를 보면 발타사르 그라시안은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고, 나중에 수습해야 할 이런저런 말썽을 미리부터 파종(播種)하는 우(愚)를 범하지 말라는 취지로 충고합니다. 복잡성이라는 게 갈수록 증가하는 요즘이며, 제아무리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 해도 모든 변수를 다 감안하여 효과적으로 작동하는 모델을 만들어 일일이 대비할 수는 없습니다. 가능하면 주변을 깔끔하게 정돈하여, 미래에 닥칠지 모르는 숱한 변수를 우리의 통제 범위 안에 넣어 놓아야 합니다. 

자제력은 지혜를 지키는 문이라고 합니다(p222). 진정 능력이 있는 사람은 입을 다물어도 그 눈빛이나 태도가 진중하여 절로 그 사람됨을 눈치챌 수 있다고도 합니다. 사실 필요도 없는 상황에 공연히 큰 모험을 거는 건, 나의 소중한 재능이나 기회를 무익한 위험에 노출하는 결과를 낳는다고 합니다. 발타사르 그라시안은 책 곳곳에서 자신을 쓸데없이 노출하지 말라고 하는데, 큰 싸움을 앞두고 내 정보가 노출되어 전략적으로 이로울 바가 무엇이겠냐는 취지로 읽힙니다. 그래서 복수 중에 재미있는 종류의 복수는, 적에게 무시로 일관하여 그를 망각 속에 빠뜨린다는 것이란 말도 p250에 나옵니다.    

만반의 준비를 갖추는 건 물론 좋습니다. 그러나 목표에 걸맞는 수준이라야 하며, 지나치게 거창한 준비는 당사자를 거꾸로 지치게 만들 뿐입니다. 그래서 지금 어디로 가는 중인지 방향도 언제나 감 잡아야 하겠지만, 반대로 먼 지점만 보다가 현장을 놓쳐서는 또 곤란하다고도 합니다(p93). 나무와 숲을 동시에 주시하며 미시와 거시 사이에서 중용을 지키는 게 처세의 핵심이겠는데, p68을 보면 자신만의 독특한 관점을 타인과 차별되게 지키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합니다. 확실히 이 저자분은 현대적 감각을 풍기는 철학자이며, 다만 그 표현을 대중적으로 할 필요도 있다고 하며 소통과 융화의 미덕에 대한 강조도 끝까지 빼놓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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