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적인 세상에서 사는 지혜
발타자르 그라시안 지음, 이동연 편역 / 평단(평단문화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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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누구나 초월적이고 고아한 가치를 추구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속한 세상은 대단히 타산적이며 그 나름의 합리성에 의해 빈틈없이 작동되는데, 이런 논리에만 따르는 사람을 두고 우리는 속물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세상의 트렌드에만 따르지 않겠다며 간혹 우리는 귀여운 일탈도 꿈꾸는데, 난 너희들과 다르다며 공연히 엇박을 내는 이런 태도가 어쩌면 속물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발타사르 그라시안은 이미 한국 독자들도 꽤 알고들 있는 근세의 철학자 겸 성직자인데, 현대인에게도 깊은 공감을 주면서도 솔직담백한 가르침을 남겨 오늘날에도 애독됩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발타사르 그라시안보다 근 백 년 뒤의 철학자 장 자크 루소는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p33에서 저자는 자연 그 상태만으로는 세상에 널리 쓸모있게 불릴 수 없고, 다듬고 또 다듬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탁월함은 우리들 중 누구에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탁월함을 수련하지 않고, 제멋대로 휘두르며 그저 내세우는 허영에 좌우된다면 이는 재능이 아니라 야만과 폭력으로 떨어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또 재주가 있으면 잘 다듬어서 쓸모있게 사회에서 활용이 되도록 해야지, 그대로 묻어둔다면 그 역시 큰 회한으로 남는다고 합니다. 성직자의 말씀치고는 상당히 의외의 울림을 줍니다.  

빌타사르 그라시안의 책에서는 마치 세상살이에 달통한 노련한 선배의 팁 같은 충고도 여럿 나옵니다. 예를 들어 p100 같은 곳을 보면, 우리는 누구나 어떤 과제나 목표에, 혹은 누군가와의 관계에 매몰되어 너무 깊숙하게 빠져들기도 합니다. 몰입이나 열중은 성공을 위해 꼭 필요한 단계이죠. 그러나 결국 목표가 달성 안 되고 좌절하기도 하는 게 보통입니다. 이럴 때를 대비하여, 마치 미노타우로스의 라비린토스에 빠져든 테세우스처럼(물론 테세우스는 이때 목적을 이룬 상태였지만), 아리아드네의 실패를 미리 마련하여 그를 통해 미궁을 빠져나왔듯이 이 수렁에서 발을 뺄 장치를 예비할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중근세 성직자치고는 놀랄 만큼 실용적인 충고입니다. p212를 보면, 대비책이라는 건 여행 중인 나그네에게 고향과도 같다는 말이 나옵니다. 

동서고금의 재사(才士)들을 보면 공연히 상대를 자극하여 자신이 얼마나 머리가 좋고 상황을 잘 바꿀 수 있는지 과시하는 수가 있습니다. p152를 보면 발타사르 그라시안은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고, 나중에 수습해야 할 이런저런 말썽을 미리부터 파종(播種)하는 우(愚)를 범하지 말라는 취지로 충고합니다. 복잡성이라는 게 갈수록 증가하는 요즘이며, 제아무리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 해도 모든 변수를 다 감안하여 효과적으로 작동하는 모델을 만들어 일일이 대비할 수는 없습니다. 가능하면 주변을 깔끔하게 정돈하여, 미래에 닥칠지 모르는 숱한 변수를 우리의 통제 범위 안에 넣어 놓아야 합니다. 

자제력은 지혜를 지키는 문이라고 합니다(p222). 진정 능력이 있는 사람은 입을 다물어도 그 눈빛이나 태도가 진중하여 절로 그 사람됨을 눈치챌 수 있다고도 합니다. 사실 필요도 없는 상황에 공연히 큰 모험을 거는 건, 나의 소중한 재능이나 기회를 무익한 위험에 노출하는 결과를 낳는다고 합니다. 발타사르 그라시안은 책 곳곳에서 자신을 쓸데없이 노출하지 말라고 하는데, 큰 싸움을 앞두고 내 정보가 노출되어 전략적으로 이로울 바가 무엇이겠냐는 취지로 읽힙니다. 그래서 복수 중에 재미있는 종류의 복수는, 적에게 무시로 일관하여 그를 망각 속에 빠뜨린다는 것이란 말도 p250에 나옵니다.    

만반의 준비를 갖추는 건 물론 좋습니다. 그러나 목표에 걸맞는 수준이라야 하며, 지나치게 거창한 준비는 당사자를 거꾸로 지치게 만들 뿐입니다. 그래서 지금 어디로 가는 중인지 방향도 언제나 감 잡아야 하겠지만, 반대로 먼 지점만 보다가 현장을 놓쳐서는 또 곤란하다고도 합니다(p93). 나무와 숲을 동시에 주시하며 미시와 거시 사이에서 중용을 지키는 게 처세의 핵심이겠는데, p68을 보면 자신만의 독특한 관점을 타인과 차별되게 지키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합니다. 확실히 이 저자분은 현대적 감각을 풍기는 철학자이며, 다만 그 표현을 대중적으로 할 필요도 있다고 하며 소통과 융화의 미덕에 대한 강조도 끝까지 빼놓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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