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재 삼국지 1 - 형제의 의를 맺다 이희재 삼국지 1
이희재 지음 / 휴머니스트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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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 자랑할 만한 거장 만화작가이신 이희재 선생님과 <삼국지(삼국연의)>의 만남.

여태 내로라할 만한 소설가들이 한 번쯤은 자기 버전대로 풀어 세상에 내놓아 필력과 역량을 겨룬 소재가 "삼국지"일 텐데요. 만화 버전으로는 오래 전에 나온 고우영 화백님의 고전이 유명하고, 일본에서는 요코야마 미츠테루의 작품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텍스트에 충실하면서도 독자적인 관점과 스타일을 멋지게 표방, 구사한 정전격 작품이 그 정도이며 그 외 패러디라든가 변칙풍 시도는 셀 수 없이 많이 이뤄져 왔습니다. 모범적이면서도 편안히 접근할 수 있는 결정판에 대해선 항상 우리들 독자 모두가 수요랄까 목마른 갈망이 멈춰지지 않았던 게 이 고전인데, 이번에 거장 이희재 선생님 버전으로 전 10권이 완간되어, 화백님의 팬과 삼국지 열혈 독자 모두를 설레게 만드네요.

선생님의 화풍, 작풍은 누구나 공감하듯, 불편한 현실의 모순이나 비위를 있는그대로 지면에 묘사하고 독자의 경각을 유도하면서도, 동글동글한 선과 조형의 미에서 잘 드러나듯 세계에 대한 따스한 애정과 희망, 낙관을 끝내 포기하지 않는 휴머니즘이 그 기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삼국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중국 4대 기서가 다 그렇듯, 누구나 한 번쯤은 아동용 윤색버전과 성인판, 완역본을 다 접하고 성장하지만, 애들한테 읽히려고 하면 "이처럼 잔인하거나 난감한 장면이 많은데..." 하며 머뭇거려지는 게 또 보통입니다. 그렇다고 원작의 감흥과 품격이, 애들 눈을 의식해서 지나치게 훼손되면 그건 고전을 읽히는 보람이 또 줄어듭니다.



이희재 선생님의 이번 "해석"은, 그런 상충하는 독자들의 바람과 욕구를 절묘하게 절충하여, 고전의 원의가 잘 전달되면서도 재미는 재미대로 있는, 한 멋진 정통파의 탄생이라는 점에서 흐뭇한 "사건"입니다. 이희재와 삼국지의 만남이란 그 자체가 하나의 사건임이 뭐 분명하죠. 아이들에게 읽혀도 멋진 입문용 삼국지 구실을 하겠지만, 어른들이 읽어도 예전 고우영 화백 버전 못지 않게, 현대적 감각과 사관이 잘 스며든 품격 있는 정전(正典)으로서 레퍼런스로서, 책장을 뿌듯이 채울 마음의 양식으로 손색이 없습니다.



십상시가 발호하고 정치가 문란해지니 민중의 삶은 도탄에 빠지고, 이런 어수선한 분위기를 틈타 황건적이라는 불순한 무리들이 질서를 어지럽히며 막대한 민폐를 끼치고 다닙니다. 선생님의 화풍은 언제나 그래 왔듯, 모나지 않고 둥글둥글 편안하면서도 캐릭터들의 개성, 혹은 일시적 기분이나 내면의 변화까지 세밀하게 표현하죠. 단호하면서도 생각 깊은 노식, 꼬장꼬장한 주준 등의 표정을 보십시오. 주견 없는 황제의 곁에서 대국(大局)의 진로를 염려하기는커녕 한 톨의 비루한 사익만 행여 다칠세라 노심초사하는 간신배의 심리도 동작과 대사 속에 잘 드러납니다.



혹세무민하며 나라의 근간을 훼손하려는 흉악한 의도를 지닌 장각이지만 그저 과장되게 일그러진 악당의 전형적인 풍모라기보다, 그 나름 배포와 엉뚱한 속셈을 몇 겹 감춘 무게가 느껴지게 무대에 등장하네요. 역사적 팩트만 짚으면 너무도 살벌하고 비관적인 기간과 고비를 짚었지만, 역시 최후의 희망만은 포기하지 않으려는 작가 특유의 낙관주의가 반영되어, 인물들의 모습은 마냥 위협적으로 표현되었다기보다 뭔가 전체적으로 친근감이 풍기는 듯합니다.



위-촉-오 삼국의 정립을 다루기 전, 중국은 여러 소국이 난립하여 약육강식, 부국강병의 노선을 두고 치열하게 다툰 역사가 있습니다. 오른쪽 위 컷은 춘추전국, 그 아래는 다시 이전으로 거슬러올라가 하와 상(은) 시대를 언급합니다. 어린 독자에게라면 자연스럽게 "공자, 맹자" 등의 출현, 활약이 이 시대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지 소양을 심어 줄 계기로도 삼습니다. 고대사의 타임라인이 대략이라도 머리 속에 정리되어야, 단대사건 문화사건 다양한 사항이 머리 속에 제 자리를 빠르게, 또 바르게 잡습니다.



이희재 선생님 특유의, 편안하면서도 꽉 찬 듯, 여유 있으면서도 행간이 밀도 있는 멋진 컷들입니다. 황제, 귀인, 고관들이 즐겨 쓰던 차일, 혹은 일산을 닮은 아름드리 뽕나무를 두 번 부각하며, 주인공 유비의 고귀한 태생과 그 운명을 암시해 줍니다. 영웅은 이처럼 출발부터가 범상치 않고, 시련이 있어도 그 앞길을 재능과 덕성으로 헤쳐나가기 마련이지만, 앞으로 어떤 고비에서 실수와 과책을 범해 그 뜻이 꺾이는지, 혹은 비장한 몰락을 맞는지도 함께 지켜볼 일입니다. 문학 본연의 감동과 정서의 정화라는 기능은 이런 장대한 서사시적 요소를 통해 어린 시절부터 맛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동탁이라는 천하에 몹쓸 악당, 역적이 등장하는데요. 온갖 악행을 저지른 자의 운명은 반드시 하늘이 정한 인과율, 응보의 법칙에 의해 처참한 파국으로 향함을 작가는 건전한 세계관을 통해 직설적으로 독자에게 깨우칩니다. 그렇다고 너무도 사악한 얼굴선, 표정이 특정 캐릭터에게 구현되는 것도 부담스러운데, 이희재 선생님 같은 거장의 원만하고도 신랄한 화풍 속이니 우리 독자들은 마음을 놓고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습니다. 동탁이라는 절대악, 그리고 도원결의 삼형제 중 한 명인 주인공 장비의 모습이 어떤 점에서 차이날 지 대조해 보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어려운 한자성어를 쓰지 않으면서도, 일을 야무지게 매조지하지 않으면 반드시 후환이 생겨 애쓴 수고를 무위로 만든다는 교훈을 잘 전달합니다. 악독한 간신이 정치적 생존의 중대한 고비를 넘겨 안도의 한숨을 쉬고 이후 반전의 틈을 엿보는 가증스러운 표정 등이 생생히 표현되었네요. 어려서 사리 분간이 안 서는 황제, 단견과 무지의 한계를 극복 못 하고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태후, 이들을 돌이킬 수 없는 함정으로 몰아넣는 못된 환관 들이 국가를 존망의 기로로 끌고 가는 과정이 잘 나타납니다.



전국 시대의 난맥상을 정리한 시황제가 패권을 장악했으나 폭압 통치의 후유증으로 황조는 이후 자체 붕괴하고, 중국인들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농민 출신 군주 유방이 세운 한 제국이 새로 등장하여 질서가 잡혀가다, 역적 왕망의 찬탈로 황통이 단절되는 비극을 맞습니다. 광무제라는 중흥 군주가 나타나 난국을 수습하던 지난 내력을 보여 줌으로써, 삼국 시대가 열리기 전 어렵사리 이어온 국가(한 제국)의 정통성이, 왜 그토록 뛰어난 영걸들에 의해 옹호될 필요가 있었는지 미리 독자들에게 납득을 시켜 줍니다.

1권은 진궁과 함께 도망치다 여백사의 집에 들러 유숙하던 중, 오해로 집주인을 죽이고서도, 반성은커녕 "내가 천하를 버릴지언정 천하가 나를 버리게는 하지 않을 것"이라며 음습하면서도 집요한 생존욕구를 표현하는 조조의 행보까지 다룹니다. 무튼 일세를 호령한 효웅의 풍모란 결코 만만한 게 아님을 작품은 독자들에게 잘 일깨우는 서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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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일반판)
스미노 요루 지음, 양윤옥 옮김 / ㈜소미미디어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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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아름다우면서도 슬픈 이야기네요. 슬프지만 마냥 슬프기만 한 건 아니고(그래도 꽤 슬픕니다), 아주 슬픈 결말을 미리 알려 주고 시작하는 이야기지만, 둘 사이의 이상한 "관계"가 재미있게 발전하는 모습이 웃기기도 하고 유쾌하기도 해서, 결말을 알게 된(원하지 않았지만) 독자로서도 약간 미안할 만큼 재미있게 따라갈 수 있습니다.

원치 않게 "결말"을 알게 된 건 우리 독자들뿐 아니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1인칭 남자 주인공"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 야마우치 사쿠라, 아직 여고생에 지나지 않는 한창 나이인데다 예쁘고 매력 있어서 모든 "클래스메이트"들에게 인기 최고인 그녀가, 실은 췌장의 질환 때문에 시한부 생을 사는 중인지는, 그녀의 가족들만 빼고는 아무도 모릅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소설은 처음에 대뜸 야마우치 사쿠라의 죽음부터 알려 주고 시작하기 때문에, 독자로서는 1) "공병일기"의 노출부터가 주인공 남자애의 관심을 끌기 위한 야마우치의 의도적인 작전이었다, 라거나, 2) 얘는 아프지도 않은데 지금 연극을 하는 것이다, 같은, 근거 없지만 그래도 품고 싶은 어떤 기대를 가질 여지가 없습니다. 하긴 그런 식으로 얘기를 끌고 가면 독자의 마음은 상쾌해지겠지만 너무 통속적일 것도 같고요, 아마 작가가 "그럴 생각은 전혀 없으니 미리 기대를 접길" 독자들에게 귀띔(내지 선긋기)을 시도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1인칭 남자주인공은 소설이 다 끝나가도록 "이름"이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맨 나중에, 아주 김빠지고 우스운 본명이 나오긴 하는데, 아마 이 이름 때문에 놀림깨나 당했겠네요). 이름이란 본디 타인이 나를 불러주는 용도일 뿐 내가 나에게 쓸모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자기완결적"인 이 이상한 남학생한테는 필요가 없음을 알리려는 작가의 의도겠습니다. 여주인공 야마우치는 (나중에 잘 드러나듯) 이 남학생을 좋아하지만, 그녀 역시 한 번도 이름을 부르지 않고, "나의 비밀을 아는 클래스메이트", "사이좋은 클래스메이트" 등으로 부르다가(웃기는 건 그를 좋아하는 야마우치뿐 아니라, 그를 지독히 싫어하는 다른 급우들도 저마다의 감정을 담은 수식어 뒤에 "클래스메이트"를 붙여 그를 부른다는 점이죠), 나중에는 "나의 클래스메이트"까지 승급하게 됩니다. 우리 독자 입장에서는 아무리 아닌 척해도 야마우치가 "...한 클래스메이트"를 너무도 좋아하는 게 눈에 보이는데, 관계 맺음에 서투른 이 바보녀석은 그런 감정이 뭔지 전혀 모르는지, 아니면 그런 게 자신한테는 필요 없으니까 매번 무시하는 건지 야마우치와 도통 발전할 기미가 안 보입니다.

이딴 녀석을 뭐가 좋다고, 저렇게 괜찮은 퀸카가 한번 잘해보려고 그 주위에서 뱅뱅 도는 건지 불만이 가득한 건 소설 속의 급우들뿐 아니라(특히 다카히로는 그를 한 대 쳐서 넘어뜨리기까지 합니다), 우리 독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네 생각에 우리 반에서 가장 예쁜 여자애는 누구야?" "그렇구나, 그럼 난 몇번째일까?" "내가 예쁘다면 어떤어떤 점이 예쁜 건지 말해 줄래?" 신칸센을 타고 먼 여행까지 하며 최고급 호텔에서 일박을 하고 돌아올 때까지만 해도, 우리 독자들 역시 "이런 애가 저딴 놈한테 반할 리가 없잖아!"라며 야마우치의 진의에 대해 감을 못 잡습니다만, 사실 여기까지 읽으면 "달리 생각할 여지가 없겠구나" 같은 체념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 독자들은 두 가지 점에서 낙담하게 되는데, 하나는 참말로 괜찮은 야마우치가 가망 없는 이런 녀석에게 정말로 빠졌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설령 녀석이 각성하고 진짜 매력남으로 거듭난다 친들 둘 사이의 로맨스가 지속될 수 없다는 사실에서입니다. 야마우치는 작품 속에서 두 번 나오는 것처럼, "어른이 되기 전에" 지상을 떠날 운명이기 때문이죠.

야마우치 사쿠라는 스스로도 그렇게 말하듯, 남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매력을 마음껏 뽐내는 그런 존재입니다. 이는 급우들 사이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그런 방식 말고도, 신칸센을 이용한 먼 여행 중 몰상식한 아줌마 패거리들에게 부당한 봉변을 당하는 어느 할머니를 구해 준 정의파 같은 행동에서도 드러납니다. 그녀의 판단이 옳고 정확했을 뿐 아니라, 그녀에게는 알지 못하는 이들 사이에서도 주의의 동조를 얻어내는 뭔가 모를 힘이 있기에, 낯선 주위의 어른들도 즉각 그녀에게 호응을 보냈던 거죠. 반면 주인공은 이런 사쿠라의 개성과 정반대 성격일 뿐 아니라, 그가 걷는 길이랄까 방향성(이 말은 작품 중에 직접 나옵니다) 같은 게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니 주인공 같은 이가 사쿠라를 숨어서 짝사랑하는 게, 우리 독자나 극중 급우들이나 상식에 맞을 텐데, 현실은 정반대가 되고 있으니 그게 기가 찬 거죠. 나중에 사쿠라의 입을 통해 드러나듯, "타인과의 관계가 아니라도 자기 매력이 형성된" 그를 진심으로, 생이 얼마 안 남은 시점에서 그 귀한 시간을 그와 함께 보내야 했을 만큼, 좋아했던 겁니다. 이해가 안 되지만 본디 사랑이란 감정부터가 그리 불가해한 속성이니 어쩔 수 없습니다.

"너의 췌장이 먹고 싶어."는 소설 첫머리에 주인공이 야마우치 사쿠라한테 보낸 문자 메시지입니다. 야마우치가 죽었을 뿐 아니라, 아프기까지 했다는 게 처음부터 다 드러나기 때문에, 이런 섬뜩한 메시지를 보낸 동기가 뭔지, 혹시 지병이 아니라 이 말이 씨가 되어(충격을 받았다거나) 그녀가 죽은 건 아닌지, 독자로서는 뜬금없이 던져진 정보 때문에 더 당혹스러워집니다. 이 소설은 이런, 불쾌하거나 혼란스러운 독자의 감정을 두고, "사실은 그게 아니라 말이죠, 당신이 생각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이라며 조곤조곤 아름다운(그러나 여전히 슬픈!) 사연을 들려 주며 다독이는 내러티브가 일품입니다. "그래서 췌장이 먹고 싶었다는 거였구나..." 뭐, 글쎄, 좋아하면, 동경하면, "그가 되고 싶다면", 그런 절절한 감정을 "먹고 싶다"는 말로 표현하는 그 정도의 의도가 아니라(그런 건 책을 안 읽어도 알 수 있죠), 그 이상의 아스라하고 안타깝고 뭉클한 느낌이 이 기묘한 문장에는 배어 있습니다(라는 건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읽고 동감해 가야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죽고 나면 교코(야마우치의 절친인 여학생)의 마음을 갖고 또 그렇게 갖고 놀 거니?" 이 말을 읽을 때만 해도, "햐 참 눈에 콩깍지가 씐다는 게 이런 거구나. 니가 죽고 나면 이런 남자애를 누가 거들떠나 보겠니?" 같은 생각이 드는 우리 독자들이지만, 결말에 나오듯(이거 스포일러지만 이 말을 서평에서 안 할 수는 없겠네요 죄송) 교코는 결국 주인공과 또 잘 엮이고 꽤 친해집니다(다만 주제도 모르는 이 녀석은 교코의 매력을 끝내 몰라 봤는지 연인 사이로는 못 발전할 듯한 기미). 이 가망 없는 놈을 이만큼이라도 사람으로 만든 건 결국 야마우치의 "은혜"입니다. 감정이 천성적으로 무딘 녀석은 장례식장에도 "겁이 많아서" 찾아가지 못했고(야마우치의 표현), 며칠 뒤에야 상갓집에 와선 "공병문고"를 보여 달라고 합니다. "네가, 네가 걔였구나 그러니까..." 사쿠라의 어머니도 울고, 아마도 태어나서 처음이었겠으나 주인공도 자신이 보낸 문자를 사쿠라가 결국 읽었다는 걸 알고, "자신을 이해해 준 데 "대해 감사하며 눈물을 흘립니다. 소설 전체가 너무도 마음에 들었지만 특히 여기가 저로선 최고였습니다.

서문에서 한국 독자들을 향해 수줍게, 겸손하게 인사를 건네는 작가 스미노 요루 님의 다소곳한 말도 좋았고, 일문학 번역의 최고봉인 양윤옥 선생님의, 원문인 듯 자연스러운 옮김도 너무도 좋았습니다("안알랴줌" 같은 건, 일어에도 그 상당어구가 있었던 게 아닐까 착각이 들 만큼 잘 어울리더군요 - 물론 그럴 리가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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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라이어티 - 오쿠다 히데오 스페셜 작품집
오쿠다 히데오 지음, 김해용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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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버라이어티"는 이 작품집의 제목일 뿐이고 수록 작품 중에 실제로 그런 이름을 가진 글은 없습니다만 그의 "버라이어티한(정확하게는 various한)" 작품 세계를 엿볼 수 있는 멋진 소우주 같은 책입니다. 애써 "버라이어티하게" 이야기를 꾸리지 않아도 그의 작품은 억지스럽지 않게 넓은 세계를 자연스레 커버하더라는 게 우리 독자들이 또 다 읽어 와서 아는 사실입니다. 서로 색깔이 많이 다른 단편과 엽편이 묶여 있고, 중간에는 (일본 잡지 구독이 그리 여의치 않은 환경인) 국내 독자들에게는 큰 선물이 될, 배우 잇세 오가타 씨, 드라마작가 야마다 다이치 씨와의 대담까지 실려 있습니다. 서로 죽이 잘 맞는 이들끼리의 진지하면서도 유쾌하고 솔직한 대화가 독자 보기에도 즐겁고, 저 예인들의 내면을 슬쩍 엿볼 수 있는 가외의 보람까지 얻을 수 있습니다(오쿠다 히데오는 가뜩이나 솔직한 분이긴 하지만).

첫 단편 <나는 사장이다!>와 <매번 고맙습니다>는 38세의 가장 나카이 가즈히로가 대기업 광고기획사를 나와 독립 창업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갖가지 웃지 못할 사연, 새로 배워 가는 사회의 쓰디쓴 교훈 등을, 오쿠다 히데오 특유의 능수능란 흥미진진 화법으로 잘 담아내는 이야기들입니다. 단편이라지만 하나하나가 좀 긴 편인데다 둘이 같은 주인공 같은 상황으로 엮여 있으니 긴 중편 하나를 감상한 느낌이고, 앞으로도 시리즈로 계속 나와줬으면 하는 바람도 들었습니다. 묘한 게, 이런 쪽 이야기를 찰지게 엮어 내는 게 오쿠다 히데오의 가장 큰 매력이고 저력이지만 너무 이런 쪽으로만 내달리면 또 드라마작가와는 구별되어야 할 그의 영역이 좀 침해, 퇴색하는 느낌일 텐데, 그는 용케(의식을 하는 것 같지는 않으나) 그런 선택은 피하고 있죠.

나카이 가즈히로는 광고회사에서 꽤 능력 있는, 앞길이 창창한 인재일 뿐 아니라 상사, 동료, 부하들과의 관계도 꽤 좋습니다. 엘리트답게 성격도 무난할 뿐 아니라 세계관도 건전하고, 이 두 단편에서 아직 신출내기나 다름없게 세상을 새로 배워나가는 모습에서 보듯 영혼에도 때가 덜 묻은 풋풋한 인성입니다. 그가 늦은 나이에도 능력은 능력대로, 성품은 성품대로 이처럼 장래성을 간직한 채 꾸려나갈 수 있는 건 본디 인간됨됨이가 바르고 태도까지 건전해서이며, 이와는 반대로 조직에의 적응이나 업무 능력 모든 면에서 미진한 채 퇴출되는 인생은, 나카이 사장과는 모든 점에서 극과 극의 대조를 이루는 부실덩어리이기에 그런 경로를 밟는 거죠. 실제로 가네코 사장(닳고닳아 온갖 구질구질한 잔재주로 세파를 헤쳐나가는) 같은 이가, 답답해하면서도 나카이를 이모저모로 배려하고(물론 이용도 해 먹습니다만) 상황을 이끌고 나가는 건, 이 사람의 책임감 있고 유능하면서도 뭔가 때가 덜 묻은(서서히 자신처럼 때를 태워 나가야 할ㅋ) 모습이 마음에 들어서입니다.

그 밑의 부하직원들도 다 마찬가지죠. 다이코도에서 같이 데려나온 오카자키, 배신 때릴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오지즈키, 너무 키가 커서 사무직 여직원으로 도통 채용이 안 되는 유카(알고보니 눈치가 빠른 데다 본래 미인이기까지 한, 나카이 표현대로라면 "복권 당첨" 같은 존재) 등도, 어딘가 어설프지만 이 신출내기 사장을 믿고 따르는 게 다 그런 인간적인 매력 때문입니다. 우리 독자들이 욕깨나 할 것 같은 하라다 과장하고도 결국 좋게, 엘리트로서의 자존심 다 버려 가며 관계를 회복하는 장면을 보면, 이 작가분은 어떻게 자신이 경험도 하지 않은 상황, 풍속도, 현실을 이처럼 그럴싸하게 묘사하는지 절로 감탄이 나오더군요. 다분히 정형화, 통속화한 채이지만 여튼 캐릭터들도 지면에서 빠꼼히 얼굴을 내밀고 금방 나오기라도 할 듯 실감이 넘칩니다.

사실 오쿠다 히데오 씨도 여태 여러 매체에 간헐적으로 내비춰 온 모습이 그런 쪽이었지만, 또 작품집 뒤의 <세븐틴>에 나오는 (시바 견을 닮았다는) 아이 짱도 그런 개성이지만, 남 웃기길 좋아하고 낙천적인 성품을 지닌 게 잇세 오가타 씨와 매우 잘 통할 것 같았고, 대담 내용을 보니 실제로 그런 게 확인되더군요. 감독의 눈치를 보다 어느새 자신의 해석을 과감히 곁들인다는 잇세 씨, (나란히 비교할 구조는 아니지만) 편집자의 눈치를 (그 정도 거물인데도) 여전히 안 볼 수 없는(괜히 약한 척하는 건지도) 오쿠다 씨, 이 둘이 죽이 척척 맞아 돌아가는 대담도 독자로서는 놓칠 수 없을 멋진 선물이겠습니다.

<드라이브 인 섬머>는 당사자로서는 죽을 맛인데 보는 구경꾼 입장에서는 웃지 않을 수 없는, 어느 나라 문화권에서나 장르가 형성되어 있는 코믹 소극 대본으로 제격인 이야기지만 이야기 자체만으로도 너무 우습고 흥미롭습니다. 벤츠를 타고 기분 좀 내려는 가장한테는 참으로 달갑지 않게, 찌는 듯 더운 날씨에 일본 전체에서 가장 최악으로 길이 막히는 코스를 달리면서, 웬 달갑지 않은(뻔뻔스럽기까지 한) 군식구를 잔뜩 태우고 운행하다 나중에 끔찍한 봉변까지 당하는 노리오 씨의 기막힌 사연입니다. 쓰레기 같은 프리터 족에게 성희롱성 추근댐(나중에는 가벼운 신체 접촉)까지 겪고도 아무렇지도 않아하는 아내 히로코의 속내가 뭔지(처음에는 이것 때문에 독자들이 불안해할 수 있죠 - 아니면 기대?ㅋ)는 나중에 가서 슬슬 드러납니다. 그녀로서는 그렇게 해서라도 남편한테 반기를 들고 싶었던 거죠.

<더부살이 가능>은 식당에서 알바를 하는 여러 딱한 과거를 지닌(그렇다고 짐작되는) 여인들의 이야기입니다. 교코는 순박하고 순종적인 여성이고 남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하는데(못된 주방 책임자 도시코에게 맡아 놓고 구박을 받는), 동료들은 그녀를 좋아하여 집에 한번 놀러가고 싶어하지만 극구 마다하는군요. 불쑥 찾아가보니 초라한 살림이지만 딱히 무슨 사연은 없어 보이기도 하는데, 다만 눈썰미 좋은 에이코는 (교코가 채 감추지 못한)남자 속옷, 담배 냄새, 매번 퇴근 때마다 사 가던 도시락 등의 단서로부터, "저 벽장 안에 누가 급히 숨었겠음"을 넉넉히 추론해 냅니다. 스포일러라서 이 서평에 적을 수는 없지만 결말은 (그런 교코에게는 꽤나 안 어울리는, 아니, 반대로 잘 어울릴지도 모르는) 충격적인 진상이 하나 기다리고 있더군요. 평범한 여인들이 어떻게 사회와 가정의 구조적인 폭력에 시달리다 사회의 막장에서 원치 않는 고생을 하며 고단한 일상의 질곡 틈바구니에서 간신히 한숨 돌리는지, 어떤 과정으로 결국은 사회의 모든 비의와 모순의 희생양은 결국 그들이 되는지, 절묘한 컷으로 담아낸 단편이었습니다. "한류 드라마"를 즐겨 본다는 설정이 나오는데, 피곤한 밑바닥 삶을 사는 여성들에게 그런 용도로 힐링을 해 주는 컨텐츠로 쓰이는구나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습니다.

오쿠다 히데오의 다른 작품들에서도, 특히 소외받는 여성들이라든가 타민족(무엇보다, 저들 일본인 밑에서 노예 같은 처지에 놓였었던 우리 한국인들)에게 선입견 없는 따스한 시선을 보내는 게 경향처럼 많이 드러나죠. 또 여성들에 대해 언제나 동조적인 공감을 짙게 표현하는(하긴, 안 그러면 드라마 작가로서 생존이 가능할지) 야마다 다이치 씨와도 이 노련한(그러면서도 본성이 그런 건지 여전히 순진한 이미지의) 작가는 지음의 관계처럼 대화의 줄기를 서로 요철의 모듈을 채우듯 흥겹게 펼쳐 나가네요. 둘 다 "희극을 동경하고" 그 희극의 재현과 창조에 천부적인 재주를 가진 이들인데, 두 분 다 "어둠과 마주하지 못하는 현대"에 우려를 표한다는 게 흥미로웠습니다. 이분들이 "현대의 어둠과 마주하는" 방식이 바로 여태 독자, 시청자들에게 펼쳐 보인 그 특유의 스타일들이 아닐까 생각해 봤습니다.

<여름의 앨범>은 이종사촌 사이인 아이들이, 어른의 죽음을 통해 인생의 고통에 대해 좀 더 알게 되고, 자신의 현실을 바로 보는 성숙함을 체득해 간다거나 상대의 아픔을 배려하는 어른스러움을 배워 나간다는 좀 슬픈 줄거리입니다. <크로아티아 VS 일본>은 두 페이지밖에 안 되는 엽편인데, 이게 지금 크로아티아 시청자 입장에서 하는 말이라는 점을 알고 봐야 작가의 의도, 혹은 작품의 완성도가 강렬히 와 닿겠습니다. 크로아티아는 실제로 1998년 피파월드컵에서 3위까지 했고, 지금도 빅 리그에 일류 선수를 다수 뛰게 하는 축구 강국이죠. 근데 이게, 최소한의 분량으로 큰 볼륨의 메시지를 담은 그 성취는 놀라우나(그게 바로 엽편의 본질입니다), 기껏해야 한국, 중국(번역이 된다면) 독자들에게 감흥을 줄 뿐, 철저히 타자인 유럽 독자들이나, 심지어 완전한 객체인 크로아티아인들이 읽으면 영 별로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뭐야, 왜 당연한 얘기를?"). 이는 언제나 일본인 입장에서만 모든 사리를 판단하는(한국인들의 딱한 자기중심적 습성도 이와 다를 바 없습니다) 스탠스라야 이 의외의 1인칭 내러티브가 충격으로 다가올 테고, 그런 점에서 보편적 휴머니티를 통해 (뜻하지 않게) 세계 독자에 두루 호소하는 매력을 지닌 오쿠다 히데오의 진면목이 잘 드러나는 작품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세븐틴>은 딱히 최루성 장면 구성이나 인위적인 감동 유발형 대사가 없는데도 불구하고(사실 오쿠다 히데오는 그런 기법 구사를 극히 꺼리는 작가죠), 절로 눈물이 핑 도는 반응을 독자에게 자아내는, 거 참 단편은 이래야 단편이다 싶었던 명작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마도 자신을 매우 닮은, 꽤 예쁘지만 이기적이고 무엇보다 철없이 자기 감정에만 충실한 딸이, 이제 남자친구를 하나 사귀어 드디어 크리스마스 이브날 "처녀"를 떼어버릴 작정임을 알게 됩니다. 하긴 요즘은 "남자가 조르고 여자가 승낙하는" 구태의연한 과거가 아님도 잘 아는 엄마지만, 엄마인데 여자애의 외박이 어떻게 걱정 안 될 수 있겠습니까. 애 자존심도 세워줘야 하고, 부모라고 무작정 사생활(사생활이죠!ㅠ)에 간섭하고 들 수도 없지만, 걱정은 걱정대로 되니 그녀로선 선을 넘어 딸의 서랍을 조심스럽게 들춰 보게 됩니다.

"이렇게 생긴 아이였구나, 순박하고 착하며 주위를 즐겁게 해 주길 즐기는 듯 생긴 게, 이기적인 내 딸과는 잘 어울리겠는걸." 아닐 수도 있지만 이렇게 생각을 해야 그나마 마음이 편하고, 자기 마음이 편한 것보다 딸을 이해하고 믿고 싶은 엄마 마음이 그런 법이겠죠. 자신이 먼저 남자 아이 집에다 전화를 걸어 볼까 생각도 했지만, 그 역시 자기 딸, 그리고 누군지 모르지만 그 남자애한테도 결국은 어른으로서 배려하는 마음가짐이 아니다 싶어서 그만두던 차에, 뜻밖에 모르는 목소리에게서 전화가 오는데, 받아 보니 남자애의 어머니군요. 아들이 여자친구네 집에서 자고 온다기에, 폐를 끼치는 셈도 되고 아들 어머니는 그 나름대로 신경이 쓰이기에 전화를 걸었답니다. 그러니 이 아이들은 둘 다 자기 집에다 대고 거짓말을 한 셈인데, 속 깊은 어머니는 저쪽 모친(이 역시 얼마나 사려깊은 분입니까!)이 마음 편히 휴일을 보내게, 선의의 거짓말로 잘 안심시키고 맙니다. 이야기도 감동적이지만, 작가가 평소 얼마나 인간 본성에 대한 훈훈하고 낙관적인 마음을 품고 있기에 이런 간단한 사연으로도 사람 마음을 감동시킬까 하는 감탄이 절로 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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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트 - 에드윈 드루드의 미스터리
찰스 디킨스 지음, 정의솔 옮김 / B612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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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디킨스가 미스테리 소설을 썼다는 점도 놀랍지만 이 작품은 디킨스가 그 창작 도중 급작스럽게 뇌출혈을 일으켜 비교적 이른 시기에 사망한 사실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로 로체스터 지방에서 벌어진, 숙부가 조카를 살해한 사건이 당시에 큰 화제와 충격을 불렀고, 디킨스 본인도 이에 관심을 가진 만큼 이 소설의 멋진 완성에 대해 가진 집념이 상당했으므로, 한 시대를 대표할 만한 문호의 죽음에 대해 애석해하는 이들은 그 안타까운 마음을 이 작품에다 내쳐 쏟아붓다시피했으며, 이 열기와 관심은 오늘날까지도(말 그대로입니다) 이어집니다. 책에도 나오지만, "당신의 결말이 기다린다"는 말이 아주 자연스럽게 느껴질 만큼, 디킨스의 열혈 독자들은 이 미완성작에 자신만의 엔딩을 채워 넣으며 컬트적인 헌신과 쾌감을 드러내기도 했고, 어떤 작가들은 실제로 헌정 겸 패러디 겸 해서 속편격 스토리를 (디킨스의 독특한 문체와 분위기까지 흉내 내어) 발표했습니다. "로스트"는 이 번역본에서만 붙인 제목이고(실제로 등장인물 에드윈 드루드가 실종되었으니), 원제목은 "에드윈 드루드의 미스테리"입니다.

마치 그 즈음 막 유행하기 시작하던 장르물처럼 "~의 미스테리"라고 제목은 붙었지만, 만약 완성되었다면 과연 디킨스가 이 작품을 추리 장르물처럼 끌고 나갔을지는 좀 의문입니다. 작품은 초반부에는 각종 희한한 개성을 지닌 인물들, 허위 의식과 과시욕으로 똘똘 뭉친 경매업자, 엄격한 교육자와 사교계에서 주목을 끌어 보려는 속물로서 두 얼굴을 지닌 부인(교사), 스스로를 3인칭으로 부르는 코믹한 석공, 지능이 떨어지고 성격이 괴팍한 야생 소년(의 동생?), 후견인에 의해 사립학교에 보내진 고아들(이들이 사실상 주인공입니다), 조카이자 제자를 살해하고 그 약혼녀를 가로채려는 무시무시한 음악 선생, 이렇게 다채로운 캐릭터들이 등장하며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디킨스의 소설이 언제나 그렇듯 우스울 때는 끝도 없이 우습고, 인간 내면의 섬뜩한 잔인성, 비열한 이중성을 묘사할 때는 소름을 돋게 하며, 얄팍한 속물 근성이나 한심할 만큼 표리부동한 행태를 묘사할 때는 절로 경멸감을 부르는 그 탁월한 묘사가, 이 유작, 미완성작에서도 일품입니다. 이름을 못 본 채 우연히 이 책을 집어 들고 읽은 독자라도 "디킨스의 작품!"임을 몇 페이지 넘기지 않아 눈치챌 만큼입니다. 마치, "사자가 앞발만 들이밀어도 그게 사자인 줄 누구나 알 수 있듯" 말입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작품은 미완성이며, 말미에 마치 애거사 크리스티 여사의 스타일(이후 많은 후배들에 의해 모방, 발전된)처럼 관련 인물 여럿이 모여 "드디어 최후의 진상이 밝혀질 듯한" 미완성의 한 챕터가 더 실려 있긴 하지만, 여튼 6부로 본문이 나뉘어져 있습니다. 왜 이 소설이 (진귀하게도) 디킨스 유일의 미스테리물이란 건지는 4부 13장까지 읽어 가야 알 수 있습니다. 빅토리아 시대 중산층 특유의 현학적이고 섬세한 감정과 의사의 표현 그 정신없는 향연이 펼쳐지는 통에, 웬만해선 지금 "살인, 혹은 실종"이라는 끔찍한 범죄의 발생으로 점차 긴장이 고조되는 줄 모르고 지나칠 수도 있습니다. 과연 디킨스의 의도가 "근사한 미스테리의 창작"에 국한되었는지는 평자, 연구자마다 의견이 갈리고요, 우리는 그의 유작이다, 장르물로의 외도다 하는 괜한 선입견에 휘둘리지 않고 "여태 읽어 온 디킨스풍 이야기"가 주는 본격(문학) 재미에 충분히 빠져들 수 있습니다.

"로체스터 지방에서 실제로 벌어진 사건이 모티브"라는 선입견이 없다면, 청년(소년에 가까운) 에드윈 드루드의 실종, 혹은 죽음은 우선 그와 큰 다툼을 벌인 네빌 랜들랜스에게 그 혐의, 책임이 쏠리지 않았을까요? 작품 중에서뿐 아니라 프레임 밖에서 읽어나가는 우리 독자들 눈으로 봐도 말입니다. 네빌의 품성, 기질에 대해 소설은 매우 섬세한 기초와 성격을 마련합니다. 그는 이제 좋은 시설에서 교육받고, 훌륭한, 혹은 모범으로 삼을 만한 관계의 네트워크를 마련받습니다만, 유년기에 혹심한 고생을 한 탓에, 스스로도 자백(?)하듯 야만인, 하층민의 기질을 정신에서 완전히 지우지 못합니다. 더군다나 그는 외견상 검은 빛의 피부인데, 인종에 따라 그 가치와 품격이 결정되던 시절 이는 치명적인 약점이 될 만했습니다. 결국 그는, 친한 친구로 잘 지낼 것이 기대되었던 주위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큰 사고를 칠 뻔합니다. 이런 일이 전에 있었으니, 느닷 일어난 에드윈의 실종 후 그에게 의혹의 시선이 쏠리는 게 너무도 당연합니다.

영국과 법계가 다른 한국에서도, "시신 없는 살인사건"은 일단 당국이 기소조차 하기 힘들며, 에드윈은 말 그대로 아직은 실종자일 뿐입니다. 하지만 주위의 따가운 시선 때문에 네빌(그래도 자신이 스스로를 객관화해서 볼 줄 아는 인물이며, 진짜 구제불능은 내가 왜 이런 지경에 놓이냐면서 끝도 없는 합리화를 일삼게 마련이죠)은 유폐 아닌 유폐 생활을 하게 되며, 이런 네빌과 우연히 대화를 주고받게 된 인물이, (알고보니) 셉티머스 크리스파클의 후배(이자 생명의 은인)인, 잘생긴 타르타르입니다. 전반부에서 다소 우습게, 선대가 정혼해 준 상대와 약혼을 해제(해소)한 로사와 혹시 잘 엮이지나 않을까 독자가 절로 기대하게 되는, 아마도 와완성을 봤다면 후반부를 주도하고 나갈 듯한 힘 있는 남성 캐릭터이죠. 거듭 강조하지만 디킨스 작품의 힘은 이런 캐릭터들의 선명하고 유쾌하며 때로는 섬뜩한 행진에 있습니다.

로사를 "예쁜이(역주에도 나오지만 pussy입니다)"로 부르던 에드윈(의젓하게도 합의 하에 약혼 관계를 해소하는 모습을 보며 독자들은 웃지 않을 수 없습니다)은, 어느날 아편 중독자로부터 달갑지 않은 예언을 듣고 실종됩니다. 한편, 이 여성 중독자는 소설 맨처음에 재스퍼(조카한테 엄청 친한 척하는 그  이중인격[보다는 정신분열이 의심되는]그 숙부)와 아편굴에서 함께 만나는 장면에서도 등장하는데, 사실 이런 설정을 보면 범인을 재스퍼로 모는 듯한 디킨스의 의도를 부인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이후 다른 작가들이 채워 넣은 여러 후속담 속에선, 에드윈이 죽지 않고 다시 등장한다든가, 버저드와 대처리가 알고 보니 같은 사람이었고 탐정이었다든가(이러면 진짜 미스테리 장르물이 되는 거죠) 하는 식으로 독자들을 신나게 하는 기발한 결말이 이뤄지곤 했습니다. 사실 재스퍼를 과연 어떤 성격으로 볼지에 따라 주제, 감동의 방향이 확 달라지는데, 이 인물의 이해를 어느 쪽으로 잡느냐를 놓고 그 해석자(독자)의 인성도 그 가늠이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책 뒤에 디킨스의 창작 노트 원본을, 한국어 번역이 이뤄진 채 재구성한 대목이 있습니다. 디킨스의 의식을 엿보는 데 좋은 자료가 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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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교양 세계기독교고전 33
성 아우구스티누스 지음, 김종흡 옮김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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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아버지, 즉 교부(敎父) 중에서도 으뜸가는 존경을 받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신교에서는 "어거스틴"이란 명칭이 더 익숙합니다만)는 유복한 환경에서 출생, 젊어서 아주 방탕한 삶을 살다 어떤 계기를 맞아 극적으로 회심한 후, 이후 기독교 신학 천 년을 좌우할 중요한 가르침과 저서를 남긴, 인생과 업적과 영성 모든 면에서 경이로운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분뿐 아니라 명망 높은 집안에서 나고 자라 하고 싶은 것 다 하며 청춘기를 보내던 중 돌연 경건한 마음으로 독실한 신앙에 빠져든 이들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등) 꽤 많은데요. 저는 한때 교회 측에서 어떤 신앙과 삶의 모범을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전형화, 정형화한 프로젝트의 일종이 아닐까 아주 삐딱하게 의심도 해 보았습니다만 이들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당대 기록이 많이 남아 있으니 그럴 수도 없는 일입니다.

여튼 한 개인이, 신앙이나 종교 문제를 떠나 당시 유럽 세계에 알려진 거의 모든 기술적 지식, 학문의 방법론, 경건한 도덕과 윤리까지 이처럼 방대한 체계 안에 넣어 심도 있는 논변, 정리, 비판, 종합을 가했다는 사실은 정말 놀랍습니다. 이 책의 제목은 "기독교 교양"입니다만, 라틴어 원제가 DE DOCTRINA CHRISTIANA이므로, "기독교의 교의" 나아가 "교리"라고 이해해도 될 것 같습니다. 단, 교의, 교리라 옮기면, 대체 왜 "현대 교회에서 잘 다루지 않는 이슈에 대해 저자가 이처럼이나 방대하고 세심히 논술하는지, 요즘 독자들은 다소 의아해할 수 있습니다. "교양"이란 말 속에는 좁은 의미의 교리 외에 다양한 통찰, 의견, 프레임 등이 포함될 수 있으므로, 이 번역서의 의도에는 그런 점에서 공감 찬동이 가능합니다.

"이런 주제들이 기독교와 대체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의 시대 유럽, 또 소아시아 일대라면 지식을 다루는 집단, 신분, 조직이 교회가 유일했습니다. 교회의 사명은 뭇 백성들의 영혼을 달래고 도덕성을 회복하는 데에도 있었겠으나, 글자를 알고 책을 보관하며 필사를 통해 지식을 전파하는 기능 대부분까지 떠맡았기에, 성직자 상당수는 교사이자 학자이기까지 했죠. 하물며 존경 받는 "교부"의 위상이라면 그 학식과 통찰 면에서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을 겁니다. 이런 구구한 평가도 필요 없는 게, 이 책을 읽어 보면 저자가 얼마나 다방면의 지식과 학문에 대해 확고한 이해를 갖췄는지 잘 깨달을 수 있습니다.

제목이 "기독교의 독트린"이기에, 물론 바른 심성, 바른 지혜에까지 이르려면 어떻게 마음을 닦고 경건한 생활 태도를 유지해야 할 지에 대해서도 저자는 자상한 언급을 합니다. 예전에 제가 같은 저자의 <고백록> 리뷰 속에서 "놀아본 형" 같은 표현을 썼습니다만, 유흥과 쾌락(快樂)과 타락(墮落)의 극한까지 가 본 분이, "이제 사람이 사람으로서의 정도를 가려면 어떻게 해야 흐트러짐 없는 정진이 가능할지" 그 세세한 방법론까지 마련하여 잘 타이르시는 품이란, 인생사의 온갖 풍상과 신산, 우여곡절(영어로는 이걸 vicissitude라고 하죠)을 거친 마스터의 풍모와 경지를, 우리 독자들이 감히 그 일부나마 엿보는 듯한 느낌입니다.

책은 총 4부로 이뤄졌습니다만 저는 특히 2부 중 번역과 해석에 대한 그의 박식하고 미려한 분석과 논평에 주목했습니다. 무려 천 육백 년 전의 학자가 도도히 서술한 내용치곤, 그 기본적 이치와 방법론이 현대 성경 본문 비평(뿐 아니라 널리 비교문학, 언어학, 기호학 전반)에도 고스란히 적용되는 타당성을 지녔기에 또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요점만 말하자면, 소위 "역동적 동등성" 원칙이 주장하는 바와 별 다를 바가 없습니다. 문언에 기계적으로 구애받지 말고, 전후 문맥을 잘 살펴 당대인의 건전한 교양이 납득, 이해할 수 있는 번역이 이뤄져야 한다는 뜻이죠.

특히 p83을 보십시오. "(전략)...inter homines라고 하든지, 아니면 inter hominibus라고 하든지 중요한 게 아니다....(후략)" 같은 말이 있는데, 물론 아우구스티누스는 당대인 중 고전 라틴어의 최고 권위자 중 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inter라는 대격(목적격. 4격) 지배 전치사 뒤에 homines가 와야 문법적으로 정확하다는 점을 모를 리가 없으나, 이미 고전어에 대한 바른 지식이 대중 사이에서 잊혀진 현실을 감안해, "바른 뜻만 통하면 무슨 상관이겠는가" 같은 통 큰 소통을 시도하는 거죠. 저는 이 대목에서 나무아미타불만 잘 외워도 극락 왕생할 수 있다고 가르친 원효 대사(아우구스티누스보다 대략 이백 년 뒤의 분입니다만 전혀 그 존재도 몰랐겠죠)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그 바로 밑에 보면 "... 소위 야비한 말투는 발음이 우리의 선인들과 다르다는 것이다..." 같은 문장이 있는데, 이 책 역자께서 저본으로 삼은 J F Shaw의 영역본을 저도 갖고 있어 찾아봤습니다. 해당어는 barbarism이었고, 라틴어 원본에는 barbarismus라고 되어 있더군요. barbarism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이 저서에서 그만의 독특한 맥락으로 쓴 것도 아니고, 지금도 언어학에서 두루 쓰이는 개념 중 하나이며(이 점에서도 그의 놀라운 통찰과 학문적 기여, 혜안이 드러납니다) 대략 "비표준적 어법" 정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Shaw의 원문이 what is a barbarism but the pronouncing of a word in a different way from that in which those who spoke Latin before us pronounced it? 이므로, "우리 선인들이 발음하던 방식과 다르다는 것 외에, barbarism이라 구태여 깎아내릴 게 무엇이냐?"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그 뒤 페이지에 보면, 결국 아우구스티누스는 헬라어 원문에서처럼 속격을 쓰지 말고, 라틴어에 자연스러운 여격을 쓰라고 권하는 겁니다. 사실 헬라어에도 라틴어나 마찬가지로 "소유의 여격(possessive dative)" 용법이 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사도 바울의 헬라어 원문에서는 속격을 썼기에, 라틴역에서도 이를 곧이곧대로 따르려 했다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게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입니다. 실제로 성 히에로니무스의 불가 라틴 역에도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p84 밑에서 두번째 줄, quam과 homines 사이에 있는 "보다"는, 아예 빠지거나, 아니면 괄호로 묶어야 뜻이 잘 통할 것 같습니다. 이 대목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불가 라틴 번역도 뜻이 매끄럽지 않음을 들어, quam 같은 비교 전치사를 넣어 뜻을 분명히하기를 권하는 거죠.


우상의 숭배와 관련하여,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방인들의 노예 상태를 벗어나는 데에 아무 쓸모가 없다"고 한 대목이 있습니다. 또한 그는 "수학"이라든지, 혹은 "논리학상의 엄정한 규칙"이라든지 하는 게, 인간이 비로소 고안한 게 아니라, 다만 인간이 준수해야 할 법도에 가깝다고 지적합니다. 이는 그의 시대로부터 거진 천 년이 지나, 예컨대 영국의 프랜시스 베이컨 등이 말한 "네 개의 우상"이라든가, 대륙의 계몽주의 철학자들이 통렬히 지적한 "이성의 권위"와 별다를 바가 없습니다. 다만 그 존엄의 연원을 "신"에 두었느냐, 아니면 "인간 정신의 영원한 발전과 각성, 계몽"이라는 독립적인 목표에 두었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개인이 자의로 초점을 흐리지 않고, 누구나 준수해야 할 엄정한 규칙이 있음을 강조하는 점에서 오늘날의 독자들도 능히 수긍할 수 있는 이지적인 풍모가 엿보이는 서술입니다.

"이교도들이 하는 바른 말은 언제나 우리가 이용해야 한다" 여기서 "이용"이라 함은 성경 본문의 해석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뿐 아니라 모든 현자, 학자(그 시대의)들은, 성경의 해석 안에 그때까지 알려진 모든 진리, 통찰을 다 담아내려 했으며, 기왕이면 한 권의 책으로 모든 비의와 질서와 진리가 설명되는 게 바람직하겠으므로(물론 인류는 이 무모한 과제를 오래 전에 포기했지만) 해석론에 총력을 집중한 건 그 시대의 기준으로는 너무도 당연했을 터입니다. "이교도들이 하는 바른 말"에 방점이 놓일 뿐이며, 이교도들이 하는 얼토당토 않은 말을 주저없이 배척함 역시 앞서의 요구와 같은 정도로 요구되는 결단입니다.

말은 그런 말을 할 자격과 소양이 있는 자의 입에서 나와야 설득력을 가질 뿐입니다. 관계(가장 기초적인 가족과의 관계 설정)에 실패한 자가 어떻게 관계의 참뜻과 비결을 말할 수 있으며, 마음 속에는 시기, 질투, 원한, 왜곡 등 부정적인 정서와 감정만 가득한 이가 무슨 자격으로 남에게 "이 길이 맞다"며 천박한 싸구려 사탕발림으로 가득찬 권유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말에 솔깃해하는 자 역시, 선택받고 건전하고 도덕적인 길을 애써 외면하고, 더러운 거름밭에서 뒹구려는 충동이 천성적으로 더 강하기에 구태여 그 말에 귀가 기울여지는 겁니다. 이성과 바른 마음가짐, 명철한 논리는 우리 동양의 성현들도 "파사현정, 사불범정" 같은 말 속에 이미 강조했던 덕목들입니다. 묘하게도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이 책에서 "달을 볼 것이며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연연하지 말라" 비슷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신을 향한 것이든, 진리를 겨냥한 것이든, 인간이 참된 마음을 품고 영혼의 행복에 도달하는 데에 결국 길은 여럿이면서도 또한 하나임을, 이 고전은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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