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교양 세계기독교고전 33
성 아우구스티누스 지음, 김종흡 옮김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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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아버지, 즉 교부(敎父) 중에서도 으뜸가는 존경을 받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신교에서는 "어거스틴"이란 명칭이 더 익숙합니다만)는 유복한 환경에서 출생, 젊어서 아주 방탕한 삶을 살다 어떤 계기를 맞아 극적으로 회심한 후, 이후 기독교 신학 천 년을 좌우할 중요한 가르침과 저서를 남긴, 인생과 업적과 영성 모든 면에서 경이로운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분뿐 아니라 명망 높은 집안에서 나고 자라 하고 싶은 것 다 하며 청춘기를 보내던 중 돌연 경건한 마음으로 독실한 신앙에 빠져든 이들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등) 꽤 많은데요. 저는 한때 교회 측에서 어떤 신앙과 삶의 모범을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전형화, 정형화한 프로젝트의 일종이 아닐까 아주 삐딱하게 의심도 해 보았습니다만 이들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당대 기록이 많이 남아 있으니 그럴 수도 없는 일입니다.

여튼 한 개인이, 신앙이나 종교 문제를 떠나 당시 유럽 세계에 알려진 거의 모든 기술적 지식, 학문의 방법론, 경건한 도덕과 윤리까지 이처럼 방대한 체계 안에 넣어 심도 있는 논변, 정리, 비판, 종합을 가했다는 사실은 정말 놀랍습니다. 이 책의 제목은 "기독교 교양"입니다만, 라틴어 원제가 DE DOCTRINA CHRISTIANA이므로, "기독교의 교의" 나아가 "교리"라고 이해해도 될 것 같습니다. 단, 교의, 교리라 옮기면, 대체 왜 "현대 교회에서 잘 다루지 않는 이슈에 대해 저자가 이처럼이나 방대하고 세심히 논술하는지, 요즘 독자들은 다소 의아해할 수 있습니다. "교양"이란 말 속에는 좁은 의미의 교리 외에 다양한 통찰, 의견, 프레임 등이 포함될 수 있으므로, 이 번역서의 의도에는 그런 점에서 공감 찬동이 가능합니다.

"이런 주제들이 기독교와 대체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의 시대 유럽, 또 소아시아 일대라면 지식을 다루는 집단, 신분, 조직이 교회가 유일했습니다. 교회의 사명은 뭇 백성들의 영혼을 달래고 도덕성을 회복하는 데에도 있었겠으나, 글자를 알고 책을 보관하며 필사를 통해 지식을 전파하는 기능 대부분까지 떠맡았기에, 성직자 상당수는 교사이자 학자이기까지 했죠. 하물며 존경 받는 "교부"의 위상이라면 그 학식과 통찰 면에서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을 겁니다. 이런 구구한 평가도 필요 없는 게, 이 책을 읽어 보면 저자가 얼마나 다방면의 지식과 학문에 대해 확고한 이해를 갖췄는지 잘 깨달을 수 있습니다.

제목이 "기독교의 독트린"이기에, 물론 바른 심성, 바른 지혜에까지 이르려면 어떻게 마음을 닦고 경건한 생활 태도를 유지해야 할 지에 대해서도 저자는 자상한 언급을 합니다. 예전에 제가 같은 저자의 <고백록> 리뷰 속에서 "놀아본 형" 같은 표현을 썼습니다만, 유흥과 쾌락(快樂)과 타락(墮落)의 극한까지 가 본 분이, "이제 사람이 사람으로서의 정도를 가려면 어떻게 해야 흐트러짐 없는 정진이 가능할지" 그 세세한 방법론까지 마련하여 잘 타이르시는 품이란, 인생사의 온갖 풍상과 신산, 우여곡절(영어로는 이걸 vicissitude라고 하죠)을 거친 마스터의 풍모와 경지를, 우리 독자들이 감히 그 일부나마 엿보는 듯한 느낌입니다.

책은 총 4부로 이뤄졌습니다만 저는 특히 2부 중 번역과 해석에 대한 그의 박식하고 미려한 분석과 논평에 주목했습니다. 무려 천 육백 년 전의 학자가 도도히 서술한 내용치곤, 그 기본적 이치와 방법론이 현대 성경 본문 비평(뿐 아니라 널리 비교문학, 언어학, 기호학 전반)에도 고스란히 적용되는 타당성을 지녔기에 또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요점만 말하자면, 소위 "역동적 동등성" 원칙이 주장하는 바와 별 다를 바가 없습니다. 문언에 기계적으로 구애받지 말고, 전후 문맥을 잘 살펴 당대인의 건전한 교양이 납득, 이해할 수 있는 번역이 이뤄져야 한다는 뜻이죠.

특히 p83을 보십시오. "(전략)...inter homines라고 하든지, 아니면 inter hominibus라고 하든지 중요한 게 아니다....(후략)" 같은 말이 있는데, 물론 아우구스티누스는 당대인 중 고전 라틴어의 최고 권위자 중 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inter라는 대격(목적격. 4격) 지배 전치사 뒤에 homines가 와야 문법적으로 정확하다는 점을 모를 리가 없으나, 이미 고전어에 대한 바른 지식이 대중 사이에서 잊혀진 현실을 감안해, "바른 뜻만 통하면 무슨 상관이겠는가" 같은 통 큰 소통을 시도하는 거죠. 저는 이 대목에서 나무아미타불만 잘 외워도 극락 왕생할 수 있다고 가르친 원효 대사(아우구스티누스보다 대략 이백 년 뒤의 분입니다만 전혀 그 존재도 몰랐겠죠)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그 바로 밑에 보면 "... 소위 야비한 말투는 발음이 우리의 선인들과 다르다는 것이다..." 같은 문장이 있는데, 이 책 역자께서 저본으로 삼은 J F Shaw의 영역본을 저도 갖고 있어 찾아봤습니다. 해당어는 barbarism이었고, 라틴어 원본에는 barbarismus라고 되어 있더군요. barbarism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이 저서에서 그만의 독특한 맥락으로 쓴 것도 아니고, 지금도 언어학에서 두루 쓰이는 개념 중 하나이며(이 점에서도 그의 놀라운 통찰과 학문적 기여, 혜안이 드러납니다) 대략 "비표준적 어법" 정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Shaw의 원문이 what is a barbarism but the pronouncing of a word in a different way from that in which those who spoke Latin before us pronounced it? 이므로, "우리 선인들이 발음하던 방식과 다르다는 것 외에, barbarism이라 구태여 깎아내릴 게 무엇이냐?"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그 뒤 페이지에 보면, 결국 아우구스티누스는 헬라어 원문에서처럼 속격을 쓰지 말고, 라틴어에 자연스러운 여격을 쓰라고 권하는 겁니다. 사실 헬라어에도 라틴어나 마찬가지로 "소유의 여격(possessive dative)" 용법이 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사도 바울의 헬라어 원문에서는 속격을 썼기에, 라틴역에서도 이를 곧이곧대로 따르려 했다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게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입니다. 실제로 성 히에로니무스의 불가 라틴 역에도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p84 밑에서 두번째 줄, quam과 homines 사이에 있는 "보다"는, 아예 빠지거나, 아니면 괄호로 묶어야 뜻이 잘 통할 것 같습니다. 이 대목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불가 라틴 번역도 뜻이 매끄럽지 않음을 들어, quam 같은 비교 전치사를 넣어 뜻을 분명히하기를 권하는 거죠.


우상의 숭배와 관련하여,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방인들의 노예 상태를 벗어나는 데에 아무 쓸모가 없다"고 한 대목이 있습니다. 또한 그는 "수학"이라든지, 혹은 "논리학상의 엄정한 규칙"이라든지 하는 게, 인간이 비로소 고안한 게 아니라, 다만 인간이 준수해야 할 법도에 가깝다고 지적합니다. 이는 그의 시대로부터 거진 천 년이 지나, 예컨대 영국의 프랜시스 베이컨 등이 말한 "네 개의 우상"이라든가, 대륙의 계몽주의 철학자들이 통렬히 지적한 "이성의 권위"와 별다를 바가 없습니다. 다만 그 존엄의 연원을 "신"에 두었느냐, 아니면 "인간 정신의 영원한 발전과 각성, 계몽"이라는 독립적인 목표에 두었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개인이 자의로 초점을 흐리지 않고, 누구나 준수해야 할 엄정한 규칙이 있음을 강조하는 점에서 오늘날의 독자들도 능히 수긍할 수 있는 이지적인 풍모가 엿보이는 서술입니다.

"이교도들이 하는 바른 말은 언제나 우리가 이용해야 한다" 여기서 "이용"이라 함은 성경 본문의 해석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뿐 아니라 모든 현자, 학자(그 시대의)들은, 성경의 해석 안에 그때까지 알려진 모든 진리, 통찰을 다 담아내려 했으며, 기왕이면 한 권의 책으로 모든 비의와 질서와 진리가 설명되는 게 바람직하겠으므로(물론 인류는 이 무모한 과제를 오래 전에 포기했지만) 해석론에 총력을 집중한 건 그 시대의 기준으로는 너무도 당연했을 터입니다. "이교도들이 하는 바른 말"에 방점이 놓일 뿐이며, 이교도들이 하는 얼토당토 않은 말을 주저없이 배척함 역시 앞서의 요구와 같은 정도로 요구되는 결단입니다.

말은 그런 말을 할 자격과 소양이 있는 자의 입에서 나와야 설득력을 가질 뿐입니다. 관계(가장 기초적인 가족과의 관계 설정)에 실패한 자가 어떻게 관계의 참뜻과 비결을 말할 수 있으며, 마음 속에는 시기, 질투, 원한, 왜곡 등 부정적인 정서와 감정만 가득한 이가 무슨 자격으로 남에게 "이 길이 맞다"며 천박한 싸구려 사탕발림으로 가득찬 권유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말에 솔깃해하는 자 역시, 선택받고 건전하고 도덕적인 길을 애써 외면하고, 더러운 거름밭에서 뒹구려는 충동이 천성적으로 더 강하기에 구태여 그 말에 귀가 기울여지는 겁니다. 이성과 바른 마음가짐, 명철한 논리는 우리 동양의 성현들도 "파사현정, 사불범정" 같은 말 속에 이미 강조했던 덕목들입니다. 묘하게도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이 책에서 "달을 볼 것이며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연연하지 말라" 비슷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신을 향한 것이든, 진리를 겨냥한 것이든, 인간이 참된 마음을 품고 영혼의 행복에 도달하는 데에 결국 길은 여럿이면서도 또한 하나임을, 이 고전은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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