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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트 - 에드윈 드루드의 미스터리
찰스 디킨스 지음, 정의솔 옮김 / B612 / 2017년 3월
평점 :
찰스 디킨스가 미스테리 소설을 썼다는 점도 놀랍지만 이 작품은 디킨스가 그 창작 도중 급작스럽게 뇌출혈을 일으켜 비교적 이른 시기에 사망한 사실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로 로체스터 지방에서 벌어진, 숙부가 조카를 살해한 사건이 당시에 큰 화제와 충격을 불렀고, 디킨스 본인도 이에 관심을 가진 만큼 이 소설의 멋진 완성에 대해 가진 집념이 상당했으므로, 한 시대를 대표할 만한 문호의 죽음에 대해 애석해하는 이들은 그 안타까운 마음을 이 작품에다 내쳐 쏟아붓다시피했으며, 이 열기와 관심은 오늘날까지도(말 그대로입니다) 이어집니다. 책에도 나오지만, "당신의 결말이 기다린다"는 말이 아주 자연스럽게 느껴질 만큼, 디킨스의 열혈 독자들은 이 미완성작에 자신만의 엔딩을 채워 넣으며 컬트적인 헌신과 쾌감을 드러내기도 했고, 어떤 작가들은 실제로 헌정 겸 패러디 겸 해서 속편격 스토리를 (디킨스의 독특한 문체와 분위기까지 흉내 내어) 발표했습니다. "로스트"는 이 번역본에서만 붙인 제목이고(실제로 등장인물 에드윈 드루드가 실종되었으니), 원제목은 "에드윈 드루드의 미스테리"입니다.
마치 그 즈음 막 유행하기 시작하던 장르물처럼 "~의 미스테리"라고 제목은 붙었지만, 만약 완성되었다면 과연 디킨스가 이 작품을 추리 장르물처럼 끌고 나갔을지는 좀 의문입니다. 작품은 초반부에는 각종 희한한 개성을 지닌 인물들, 허위 의식과 과시욕으로 똘똘 뭉친 경매업자, 엄격한 교육자와 사교계에서 주목을 끌어 보려는 속물로서 두 얼굴을 지닌 부인(교사), 스스로를 3인칭으로 부르는 코믹한 석공, 지능이 떨어지고 성격이 괴팍한 야생 소년(의 동생?), 후견인에 의해 사립학교에 보내진 고아들(이들이 사실상 주인공입니다), 조카이자 제자를 살해하고 그 약혼녀를 가로채려는 무시무시한 음악 선생, 이렇게 다채로운 캐릭터들이 등장하며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디킨스의 소설이 언제나 그렇듯 우스울 때는 끝도 없이 우습고, 인간 내면의 섬뜩한 잔인성, 비열한 이중성을 묘사할 때는 소름을 돋게 하며, 얄팍한 속물 근성이나 한심할 만큼 표리부동한 행태를 묘사할 때는 절로 경멸감을 부르는 그 탁월한 묘사가, 이 유작, 미완성작에서도 일품입니다. 이름을 못 본 채 우연히 이 책을 집어 들고 읽은 독자라도 "디킨스의 작품!"임을 몇 페이지 넘기지 않아 눈치챌 만큼입니다. 마치, "사자가 앞발만 들이밀어도 그게 사자인 줄 누구나 알 수 있듯" 말입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작품은 미완성이며, 말미에 마치 애거사 크리스티 여사의 스타일(이후 많은 후배들에 의해 모방, 발전된)처럼 관련 인물 여럿이 모여 "드디어 최후의 진상이 밝혀질 듯한" 미완성의 한 챕터가 더 실려 있긴 하지만, 여튼 6부로 본문이 나뉘어져 있습니다. 왜 이 소설이 (진귀하게도) 디킨스 유일의 미스테리물이란 건지는 4부 13장까지 읽어 가야 알 수 있습니다. 빅토리아 시대 중산층 특유의 현학적이고 섬세한 감정과 의사의 표현 그 정신없는 향연이 펼쳐지는 통에, 웬만해선 지금 "살인, 혹은 실종"이라는 끔찍한 범죄의 발생으로 점차 긴장이 고조되는 줄 모르고 지나칠 수도 있습니다. 과연 디킨스의 의도가 "근사한 미스테리의 창작"에 국한되었는지는 평자, 연구자마다 의견이 갈리고요, 우리는 그의 유작이다, 장르물로의 외도다 하는 괜한 선입견에 휘둘리지 않고 "여태 읽어 온 디킨스풍 이야기"가 주는 본격(문학) 재미에 충분히 빠져들 수 있습니다.
"로체스터 지방에서 실제로 벌어진 사건이 모티브"라는 선입견이 없다면, 청년(소년에 가까운) 에드윈 드루드의 실종, 혹은 죽음은 우선 그와 큰 다툼을 벌인 네빌 랜들랜스에게 그 혐의, 책임이 쏠리지 않았을까요? 작품 중에서뿐 아니라 프레임 밖에서 읽어나가는 우리 독자들 눈으로 봐도 말입니다. 네빌의 품성, 기질에 대해 소설은 매우 섬세한 기초와 성격을 마련합니다. 그는 이제 좋은 시설에서 교육받고, 훌륭한, 혹은 모범으로 삼을 만한 관계의 네트워크를 마련받습니다만, 유년기에 혹심한 고생을 한 탓에, 스스로도 자백(?)하듯 야만인, 하층민의 기질을 정신에서 완전히 지우지 못합니다. 더군다나 그는 외견상 검은 빛의 피부인데, 인종에 따라 그 가치와 품격이 결정되던 시절 이는 치명적인 약점이 될 만했습니다. 결국 그는, 친한 친구로 잘 지낼 것이 기대되었던 주위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큰 사고를 칠 뻔합니다. 이런 일이 전에 있었으니, 느닷 일어난 에드윈의 실종 후 그에게 의혹의 시선이 쏠리는 게 너무도 당연합니다.
영국과 법계가 다른 한국에서도, "시신 없는 살인사건"은 일단 당국이 기소조차 하기 힘들며, 에드윈은 말 그대로 아직은 실종자일 뿐입니다. 하지만 주위의 따가운 시선 때문에 네빌(그래도 자신이 스스로를 객관화해서 볼 줄 아는 인물이며, 진짜 구제불능은 내가 왜 이런 지경에 놓이냐면서 끝도 없는 합리화를 일삼게 마련이죠)은 유폐 아닌 유폐 생활을 하게 되며, 이런 네빌과 우연히 대화를 주고받게 된 인물이, (알고보니) 셉티머스 크리스파클의 후배(이자 생명의 은인)인, 잘생긴 타르타르입니다. 전반부에서 다소 우습게, 선대가 정혼해 준 상대와 약혼을 해제(해소)한 로사와 혹시 잘 엮이지나 않을까 독자가 절로 기대하게 되는, 아마도 와완성을 봤다면 후반부를 주도하고 나갈 듯한 힘 있는 남성 캐릭터이죠. 거듭 강조하지만 디킨스 작품의 힘은 이런 캐릭터들의 선명하고 유쾌하며 때로는 섬뜩한 행진에 있습니다.
로사를 "예쁜이(역주에도 나오지만 pussy입니다)"로 부르던 에드윈(의젓하게도 합의 하에 약혼 관계를 해소하는 모습을 보며 독자들은 웃지 않을 수 없습니다)은, 어느날 아편 중독자로부터 달갑지 않은 예언을 듣고 실종됩니다. 한편, 이 여성 중독자는 소설 맨처음에 재스퍼(조카한테 엄청 친한 척하는 그 이중인격[보다는 정신분열이 의심되는]그 숙부)와 아편굴에서 함께 만나는 장면에서도 등장하는데, 사실 이런 설정을 보면 범인을 재스퍼로 모는 듯한 디킨스의 의도를 부인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이후 다른 작가들이 채워 넣은 여러 후속담 속에선, 에드윈이 죽지 않고 다시 등장한다든가, 버저드와 대처리가 알고 보니 같은 사람이었고 탐정이었다든가(이러면 진짜 미스테리 장르물이 되는 거죠) 하는 식으로 독자들을 신나게 하는 기발한 결말이 이뤄지곤 했습니다. 사실 재스퍼를 과연 어떤 성격으로 볼지에 따라 주제, 감동의 방향이 확 달라지는데, 이 인물의 이해를 어느 쪽으로 잡느냐를 놓고 그 해석자(독자)의 인성도 그 가늠이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책 뒤에 디킨스의 창작 노트 원본을, 한국어 번역이 이뤄진 채 재구성한 대목이 있습니다. 디킨스의 의식을 엿보는 데 좋은 자료가 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