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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일반판)
스미노 요루 지음, 양윤옥 옮김 / ㈜소미미디어 / 2017년 4월
평점 :
품절
참 아름다우면서도 슬픈 이야기네요. 슬프지만 마냥 슬프기만 한 건 아니고(그래도 꽤 슬픕니다), 아주 슬픈 결말을 미리 알려 주고 시작하는 이야기지만, 둘 사이의 이상한 "관계"가 재미있게 발전하는 모습이 웃기기도 하고 유쾌하기도 해서, 결말을 알게 된(원하지 않았지만) 독자로서도 약간 미안할 만큼 재미있게 따라갈 수 있습니다.
원치 않게 "결말"을 알게 된 건 우리 독자들뿐 아니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1인칭 남자 주인공"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 야마우치 사쿠라, 아직 여고생에 지나지 않는 한창 나이인데다 예쁘고 매력 있어서 모든 "클래스메이트"들에게 인기 최고인 그녀가, 실은 췌장의 질환 때문에 시한부 생을 사는 중인지는, 그녀의 가족들만 빼고는 아무도 모릅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소설은 처음에 대뜸 야마우치 사쿠라의 죽음부터 알려 주고 시작하기 때문에, 독자로서는 1) "공병일기"의 노출부터가 주인공 남자애의 관심을 끌기 위한 야마우치의 의도적인 작전이었다, 라거나, 2) 얘는 아프지도 않은데 지금 연극을 하는 것이다, 같은, 근거 없지만 그래도 품고 싶은 어떤 기대를 가질 여지가 없습니다. 하긴 그런 식으로 얘기를 끌고 가면 독자의 마음은 상쾌해지겠지만 너무 통속적일 것도 같고요, 아마 작가가 "그럴 생각은 전혀 없으니 미리 기대를 접길" 독자들에게 귀띔(내지 선긋기)을 시도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1인칭 남자주인공은 소설이 다 끝나가도록 "이름"이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맨 나중에, 아주 김빠지고 우스운 본명이 나오긴 하는데, 아마 이 이름 때문에 놀림깨나 당했겠네요). 이름이란 본디 타인이 나를 불러주는 용도일 뿐 내가 나에게 쓸모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자기완결적"인 이 이상한 남학생한테는 필요가 없음을 알리려는 작가의 의도겠습니다. 여주인공 야마우치는 (나중에 잘 드러나듯) 이 남학생을 좋아하지만, 그녀 역시 한 번도 이름을 부르지 않고, "나의 비밀을 아는 클래스메이트", "사이좋은 클래스메이트" 등으로 부르다가(웃기는 건 그를 좋아하는 야마우치뿐 아니라, 그를 지독히 싫어하는 다른 급우들도 저마다의 감정을 담은 수식어 뒤에 "클래스메이트"를 붙여 그를 부른다는 점이죠), 나중에는 "나의 클래스메이트"까지 승급하게 됩니다. 우리 독자 입장에서는 아무리 아닌 척해도 야마우치가 "...한 클래스메이트"를 너무도 좋아하는 게 눈에 보이는데, 관계 맺음에 서투른 이 바보녀석은 그런 감정이 뭔지 전혀 모르는지, 아니면 그런 게 자신한테는 필요 없으니까 매번 무시하는 건지 야마우치와 도통 발전할 기미가 안 보입니다.
이딴 녀석을 뭐가 좋다고, 저렇게 괜찮은 퀸카가 한번 잘해보려고 그 주위에서 뱅뱅 도는 건지 불만이 가득한 건 소설 속의 급우들뿐 아니라(특히 다카히로는 그를 한 대 쳐서 넘어뜨리기까지 합니다), 우리 독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네 생각에 우리 반에서 가장 예쁜 여자애는 누구야?" "그렇구나, 그럼 난 몇번째일까?" "내가 예쁘다면 어떤어떤 점이 예쁜 건지 말해 줄래?" 신칸센을 타고 먼 여행까지 하며 최고급 호텔에서 일박을 하고 돌아올 때까지만 해도, 우리 독자들 역시 "이런 애가 저딴 놈한테 반할 리가 없잖아!"라며 야마우치의 진의에 대해 감을 못 잡습니다만, 사실 여기까지 읽으면 "달리 생각할 여지가 없겠구나" 같은 체념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 독자들은 두 가지 점에서 낙담하게 되는데, 하나는 참말로 괜찮은 야마우치가 가망 없는 이런 녀석에게 정말로 빠졌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설령 녀석이 각성하고 진짜 매력남으로 거듭난다 친들 둘 사이의 로맨스가 지속될 수 없다는 사실에서입니다. 야마우치는 작품 속에서 두 번 나오는 것처럼, "어른이 되기 전에" 지상을 떠날 운명이기 때문이죠.
야마우치 사쿠라는 스스로도 그렇게 말하듯, 남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매력을 마음껏 뽐내는 그런 존재입니다. 이는 급우들 사이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그런 방식 말고도, 신칸센을 이용한 먼 여행 중 몰상식한 아줌마 패거리들에게 부당한 봉변을 당하는 어느 할머니를 구해 준 정의파 같은 행동에서도 드러납니다. 그녀의 판단이 옳고 정확했을 뿐 아니라, 그녀에게는 알지 못하는 이들 사이에서도 주의의 동조를 얻어내는 뭔가 모를 힘이 있기에, 낯선 주위의 어른들도 즉각 그녀에게 호응을 보냈던 거죠. 반면 주인공은 이런 사쿠라의 개성과 정반대 성격일 뿐 아니라, 그가 걷는 길이랄까 방향성(이 말은 작품 중에 직접 나옵니다) 같은 게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니 주인공 같은 이가 사쿠라를 숨어서 짝사랑하는 게, 우리 독자나 극중 급우들이나 상식에 맞을 텐데, 현실은 정반대가 되고 있으니 그게 기가 찬 거죠. 나중에 사쿠라의 입을 통해 드러나듯, "타인과의 관계가 아니라도 자기 매력이 형성된" 그를 진심으로, 생이 얼마 안 남은 시점에서 그 귀한 시간을 그와 함께 보내야 했을 만큼, 좋아했던 겁니다. 이해가 안 되지만 본디 사랑이란 감정부터가 그리 불가해한 속성이니 어쩔 수 없습니다.
"너의 췌장이 먹고 싶어."는 소설 첫머리에 주인공이 야마우치 사쿠라한테 보낸 문자 메시지입니다. 야마우치가 죽었을 뿐 아니라, 아프기까지 했다는 게 처음부터 다 드러나기 때문에, 이런 섬뜩한 메시지를 보낸 동기가 뭔지, 혹시 지병이 아니라 이 말이 씨가 되어(충격을 받았다거나) 그녀가 죽은 건 아닌지, 독자로서는 뜬금없이 던져진 정보 때문에 더 당혹스러워집니다. 이 소설은 이런, 불쾌하거나 혼란스러운 독자의 감정을 두고, "사실은 그게 아니라 말이죠, 당신이 생각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이라며 조곤조곤 아름다운(그러나 여전히 슬픈!) 사연을 들려 주며 다독이는 내러티브가 일품입니다. "그래서 췌장이 먹고 싶었다는 거였구나..." 뭐, 글쎄, 좋아하면, 동경하면, "그가 되고 싶다면", 그런 절절한 감정을 "먹고 싶다"는 말로 표현하는 그 정도의 의도가 아니라(그런 건 책을 안 읽어도 알 수 있죠), 그 이상의 아스라하고 안타깝고 뭉클한 느낌이 이 기묘한 문장에는 배어 있습니다(라는 건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읽고 동감해 가야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죽고 나면 교코(야마우치의 절친인 여학생)의 마음을 갖고 또 그렇게 갖고 놀 거니?" 이 말을 읽을 때만 해도, "햐 참 눈에 콩깍지가 씐다는 게 이런 거구나. 니가 죽고 나면 이런 남자애를 누가 거들떠나 보겠니?" 같은 생각이 드는 우리 독자들이지만, 결말에 나오듯(이거 스포일러지만 이 말을 서평에서 안 할 수는 없겠네요 죄송) 교코는 결국 주인공과 또 잘 엮이고 꽤 친해집니다(다만 주제도 모르는 이 녀석은 교코의 매력을 끝내 몰라 봤는지 연인 사이로는 못 발전할 듯한 기미). 이 가망 없는 놈을 이만큼이라도 사람으로 만든 건 결국 야마우치의 "은혜"입니다. 감정이 천성적으로 무딘 녀석은 장례식장에도 "겁이 많아서" 찾아가지 못했고(야마우치의 표현), 며칠 뒤에야 상갓집에 와선 "공병문고"를 보여 달라고 합니다. "네가, 네가 걔였구나 그러니까..." 사쿠라의 어머니도 울고, 아마도 태어나서 처음이었겠으나 주인공도 자신이 보낸 문자를 사쿠라가 결국 읽었다는 걸 알고, "자신을 이해해 준 데 "대해 감사하며 눈물을 흘립니다. 소설 전체가 너무도 마음에 들었지만 특히 여기가 저로선 최고였습니다.
서문에서 한국 독자들을 향해 수줍게, 겸손하게 인사를 건네는 작가 스미노 요루 님의 다소곳한 말도 좋았고, 일문학 번역의 최고봉인 양윤옥 선생님의, 원문인 듯 자연스러운 옮김도 너무도 좋았습니다("안알랴줌" 같은 건, 일어에도 그 상당어구가 있었던 게 아닐까 착각이 들 만큼 잘 어울리더군요 - 물론 그럴 리가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