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라이어티 - 오쿠다 히데오 스페셜 작품집
오쿠다 히데오 지음, 김해용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3월
평점 :
절판


"버라이어티"는 이 작품집의 제목일 뿐이고 수록 작품 중에 실제로 그런 이름을 가진 글은 없습니다만 그의 "버라이어티한(정확하게는 various한)" 작품 세계를 엿볼 수 있는 멋진 소우주 같은 책입니다. 애써 "버라이어티하게" 이야기를 꾸리지 않아도 그의 작품은 억지스럽지 않게 넓은 세계를 자연스레 커버하더라는 게 우리 독자들이 또 다 읽어 와서 아는 사실입니다. 서로 색깔이 많이 다른 단편과 엽편이 묶여 있고, 중간에는 (일본 잡지 구독이 그리 여의치 않은 환경인) 국내 독자들에게는 큰 선물이 될, 배우 잇세 오가타 씨, 드라마작가 야마다 다이치 씨와의 대담까지 실려 있습니다. 서로 죽이 잘 맞는 이들끼리의 진지하면서도 유쾌하고 솔직한 대화가 독자 보기에도 즐겁고, 저 예인들의 내면을 슬쩍 엿볼 수 있는 가외의 보람까지 얻을 수 있습니다(오쿠다 히데오는 가뜩이나 솔직한 분이긴 하지만).

첫 단편 <나는 사장이다!>와 <매번 고맙습니다>는 38세의 가장 나카이 가즈히로가 대기업 광고기획사를 나와 독립 창업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갖가지 웃지 못할 사연, 새로 배워 가는 사회의 쓰디쓴 교훈 등을, 오쿠다 히데오 특유의 능수능란 흥미진진 화법으로 잘 담아내는 이야기들입니다. 단편이라지만 하나하나가 좀 긴 편인데다 둘이 같은 주인공 같은 상황으로 엮여 있으니 긴 중편 하나를 감상한 느낌이고, 앞으로도 시리즈로 계속 나와줬으면 하는 바람도 들었습니다. 묘한 게, 이런 쪽 이야기를 찰지게 엮어 내는 게 오쿠다 히데오의 가장 큰 매력이고 저력이지만 너무 이런 쪽으로만 내달리면 또 드라마작가와는 구별되어야 할 그의 영역이 좀 침해, 퇴색하는 느낌일 텐데, 그는 용케(의식을 하는 것 같지는 않으나) 그런 선택은 피하고 있죠.

나카이 가즈히로는 광고회사에서 꽤 능력 있는, 앞길이 창창한 인재일 뿐 아니라 상사, 동료, 부하들과의 관계도 꽤 좋습니다. 엘리트답게 성격도 무난할 뿐 아니라 세계관도 건전하고, 이 두 단편에서 아직 신출내기나 다름없게 세상을 새로 배워나가는 모습에서 보듯 영혼에도 때가 덜 묻은 풋풋한 인성입니다. 그가 늦은 나이에도 능력은 능력대로, 성품은 성품대로 이처럼 장래성을 간직한 채 꾸려나갈 수 있는 건 본디 인간됨됨이가 바르고 태도까지 건전해서이며, 이와는 반대로 조직에의 적응이나 업무 능력 모든 면에서 미진한 채 퇴출되는 인생은, 나카이 사장과는 모든 점에서 극과 극의 대조를 이루는 부실덩어리이기에 그런 경로를 밟는 거죠. 실제로 가네코 사장(닳고닳아 온갖 구질구질한 잔재주로 세파를 헤쳐나가는) 같은 이가, 답답해하면서도 나카이를 이모저모로 배려하고(물론 이용도 해 먹습니다만) 상황을 이끌고 나가는 건, 이 사람의 책임감 있고 유능하면서도 뭔가 때가 덜 묻은(서서히 자신처럼 때를 태워 나가야 할ㅋ) 모습이 마음에 들어서입니다.

그 밑의 부하직원들도 다 마찬가지죠. 다이코도에서 같이 데려나온 오카자키, 배신 때릴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오지즈키, 너무 키가 커서 사무직 여직원으로 도통 채용이 안 되는 유카(알고보니 눈치가 빠른 데다 본래 미인이기까지 한, 나카이 표현대로라면 "복권 당첨" 같은 존재) 등도, 어딘가 어설프지만 이 신출내기 사장을 믿고 따르는 게 다 그런 인간적인 매력 때문입니다. 우리 독자들이 욕깨나 할 것 같은 하라다 과장하고도 결국 좋게, 엘리트로서의 자존심 다 버려 가며 관계를 회복하는 장면을 보면, 이 작가분은 어떻게 자신이 경험도 하지 않은 상황, 풍속도, 현실을 이처럼 그럴싸하게 묘사하는지 절로 감탄이 나오더군요. 다분히 정형화, 통속화한 채이지만 여튼 캐릭터들도 지면에서 빠꼼히 얼굴을 내밀고 금방 나오기라도 할 듯 실감이 넘칩니다.

사실 오쿠다 히데오 씨도 여태 여러 매체에 간헐적으로 내비춰 온 모습이 그런 쪽이었지만, 또 작품집 뒤의 <세븐틴>에 나오는 (시바 견을 닮았다는) 아이 짱도 그런 개성이지만, 남 웃기길 좋아하고 낙천적인 성품을 지닌 게 잇세 오가타 씨와 매우 잘 통할 것 같았고, 대담 내용을 보니 실제로 그런 게 확인되더군요. 감독의 눈치를 보다 어느새 자신의 해석을 과감히 곁들인다는 잇세 씨, (나란히 비교할 구조는 아니지만) 편집자의 눈치를 (그 정도 거물인데도) 여전히 안 볼 수 없는(괜히 약한 척하는 건지도) 오쿠다 씨, 이 둘이 죽이 척척 맞아 돌아가는 대담도 독자로서는 놓칠 수 없을 멋진 선물이겠습니다.

<드라이브 인 섬머>는 당사자로서는 죽을 맛인데 보는 구경꾼 입장에서는 웃지 않을 수 없는, 어느 나라 문화권에서나 장르가 형성되어 있는 코믹 소극 대본으로 제격인 이야기지만 이야기 자체만으로도 너무 우습고 흥미롭습니다. 벤츠를 타고 기분 좀 내려는 가장한테는 참으로 달갑지 않게, 찌는 듯 더운 날씨에 일본 전체에서 가장 최악으로 길이 막히는 코스를 달리면서, 웬 달갑지 않은(뻔뻔스럽기까지 한) 군식구를 잔뜩 태우고 운행하다 나중에 끔찍한 봉변까지 당하는 노리오 씨의 기막힌 사연입니다. 쓰레기 같은 프리터 족에게 성희롱성 추근댐(나중에는 가벼운 신체 접촉)까지 겪고도 아무렇지도 않아하는 아내 히로코의 속내가 뭔지(처음에는 이것 때문에 독자들이 불안해할 수 있죠 - 아니면 기대?ㅋ)는 나중에 가서 슬슬 드러납니다. 그녀로서는 그렇게 해서라도 남편한테 반기를 들고 싶었던 거죠.

<더부살이 가능>은 식당에서 알바를 하는 여러 딱한 과거를 지닌(그렇다고 짐작되는) 여인들의 이야기입니다. 교코는 순박하고 순종적인 여성이고 남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하는데(못된 주방 책임자 도시코에게 맡아 놓고 구박을 받는), 동료들은 그녀를 좋아하여 집에 한번 놀러가고 싶어하지만 극구 마다하는군요. 불쑥 찾아가보니 초라한 살림이지만 딱히 무슨 사연은 없어 보이기도 하는데, 다만 눈썰미 좋은 에이코는 (교코가 채 감추지 못한)남자 속옷, 담배 냄새, 매번 퇴근 때마다 사 가던 도시락 등의 단서로부터, "저 벽장 안에 누가 급히 숨었겠음"을 넉넉히 추론해 냅니다. 스포일러라서 이 서평에 적을 수는 없지만 결말은 (그런 교코에게는 꽤나 안 어울리는, 아니, 반대로 잘 어울릴지도 모르는) 충격적인 진상이 하나 기다리고 있더군요. 평범한 여인들이 어떻게 사회와 가정의 구조적인 폭력에 시달리다 사회의 막장에서 원치 않는 고생을 하며 고단한 일상의 질곡 틈바구니에서 간신히 한숨 돌리는지, 어떤 과정으로 결국은 사회의 모든 비의와 모순의 희생양은 결국 그들이 되는지, 절묘한 컷으로 담아낸 단편이었습니다. "한류 드라마"를 즐겨 본다는 설정이 나오는데, 피곤한 밑바닥 삶을 사는 여성들에게 그런 용도로 힐링을 해 주는 컨텐츠로 쓰이는구나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습니다.

오쿠다 히데오의 다른 작품들에서도, 특히 소외받는 여성들이라든가 타민족(무엇보다, 저들 일본인 밑에서 노예 같은 처지에 놓였었던 우리 한국인들)에게 선입견 없는 따스한 시선을 보내는 게 경향처럼 많이 드러나죠. 또 여성들에 대해 언제나 동조적인 공감을 짙게 표현하는(하긴, 안 그러면 드라마 작가로서 생존이 가능할지) 야마다 다이치 씨와도 이 노련한(그러면서도 본성이 그런 건지 여전히 순진한 이미지의) 작가는 지음의 관계처럼 대화의 줄기를 서로 요철의 모듈을 채우듯 흥겹게 펼쳐 나가네요. 둘 다 "희극을 동경하고" 그 희극의 재현과 창조에 천부적인 재주를 가진 이들인데, 두 분 다 "어둠과 마주하지 못하는 현대"에 우려를 표한다는 게 흥미로웠습니다. 이분들이 "현대의 어둠과 마주하는" 방식이 바로 여태 독자, 시청자들에게 펼쳐 보인 그 특유의 스타일들이 아닐까 생각해 봤습니다.

<여름의 앨범>은 이종사촌 사이인 아이들이, 어른의 죽음을 통해 인생의 고통에 대해 좀 더 알게 되고, 자신의 현실을 바로 보는 성숙함을 체득해 간다거나 상대의 아픔을 배려하는 어른스러움을 배워 나간다는 좀 슬픈 줄거리입니다. <크로아티아 VS 일본>은 두 페이지밖에 안 되는 엽편인데, 이게 지금 크로아티아 시청자 입장에서 하는 말이라는 점을 알고 봐야 작가의 의도, 혹은 작품의 완성도가 강렬히 와 닿겠습니다. 크로아티아는 실제로 1998년 피파월드컵에서 3위까지 했고, 지금도 빅 리그에 일류 선수를 다수 뛰게 하는 축구 강국이죠. 근데 이게, 최소한의 분량으로 큰 볼륨의 메시지를 담은 그 성취는 놀라우나(그게 바로 엽편의 본질입니다), 기껏해야 한국, 중국(번역이 된다면) 독자들에게 감흥을 줄 뿐, 철저히 타자인 유럽 독자들이나, 심지어 완전한 객체인 크로아티아인들이 읽으면 영 별로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뭐야, 왜 당연한 얘기를?"). 이는 언제나 일본인 입장에서만 모든 사리를 판단하는(한국인들의 딱한 자기중심적 습성도 이와 다를 바 없습니다) 스탠스라야 이 의외의 1인칭 내러티브가 충격으로 다가올 테고, 그런 점에서 보편적 휴머니티를 통해 (뜻하지 않게) 세계 독자에 두루 호소하는 매력을 지닌 오쿠다 히데오의 진면목이 잘 드러나는 작품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세븐틴>은 딱히 최루성 장면 구성이나 인위적인 감동 유발형 대사가 없는데도 불구하고(사실 오쿠다 히데오는 그런 기법 구사를 극히 꺼리는 작가죠), 절로 눈물이 핑 도는 반응을 독자에게 자아내는, 거 참 단편은 이래야 단편이다 싶었던 명작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마도 자신을 매우 닮은, 꽤 예쁘지만 이기적이고 무엇보다 철없이 자기 감정에만 충실한 딸이, 이제 남자친구를 하나 사귀어 드디어 크리스마스 이브날 "처녀"를 떼어버릴 작정임을 알게 됩니다. 하긴 요즘은 "남자가 조르고 여자가 승낙하는" 구태의연한 과거가 아님도 잘 아는 엄마지만, 엄마인데 여자애의 외박이 어떻게 걱정 안 될 수 있겠습니까. 애 자존심도 세워줘야 하고, 부모라고 무작정 사생활(사생활이죠!ㅠ)에 간섭하고 들 수도 없지만, 걱정은 걱정대로 되니 그녀로선 선을 넘어 딸의 서랍을 조심스럽게 들춰 보게 됩니다.

"이렇게 생긴 아이였구나, 순박하고 착하며 주위를 즐겁게 해 주길 즐기는 듯 생긴 게, 이기적인 내 딸과는 잘 어울리겠는걸." 아닐 수도 있지만 이렇게 생각을 해야 그나마 마음이 편하고, 자기 마음이 편한 것보다 딸을 이해하고 믿고 싶은 엄마 마음이 그런 법이겠죠. 자신이 먼저 남자 아이 집에다 전화를 걸어 볼까 생각도 했지만, 그 역시 자기 딸, 그리고 누군지 모르지만 그 남자애한테도 결국은 어른으로서 배려하는 마음가짐이 아니다 싶어서 그만두던 차에, 뜻밖에 모르는 목소리에게서 전화가 오는데, 받아 보니 남자애의 어머니군요. 아들이 여자친구네 집에서 자고 온다기에, 폐를 끼치는 셈도 되고 아들 어머니는 그 나름대로 신경이 쓰이기에 전화를 걸었답니다. 그러니 이 아이들은 둘 다 자기 집에다 대고 거짓말을 한 셈인데, 속 깊은 어머니는 저쪽 모친(이 역시 얼마나 사려깊은 분입니까!)이 마음 편히 휴일을 보내게, 선의의 거짓말로 잘 안심시키고 맙니다. 이야기도 감동적이지만, 작가가 평소 얼마나 인간 본성에 대한 훈훈하고 낙관적인 마음을 품고 있기에 이런 간단한 사연으로도 사람 마음을 감동시킬까 하는 감탄이 절로 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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