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재 삼국지 1 - 형제의 의를 맺다 이희재 삼국지 1
이희재 지음 / 휴머니스트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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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 자랑할 만한 거장 만화작가이신 이희재 선생님과 <삼국지(삼국연의)>의 만남.

여태 내로라할 만한 소설가들이 한 번쯤은 자기 버전대로 풀어 세상에 내놓아 필력과 역량을 겨룬 소재가 "삼국지"일 텐데요. 만화 버전으로는 오래 전에 나온 고우영 화백님의 고전이 유명하고, 일본에서는 요코야마 미츠테루의 작품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텍스트에 충실하면서도 독자적인 관점과 스타일을 멋지게 표방, 구사한 정전격 작품이 그 정도이며 그 외 패러디라든가 변칙풍 시도는 셀 수 없이 많이 이뤄져 왔습니다. 모범적이면서도 편안히 접근할 수 있는 결정판에 대해선 항상 우리들 독자 모두가 수요랄까 목마른 갈망이 멈춰지지 않았던 게 이 고전인데, 이번에 거장 이희재 선생님 버전으로 전 10권이 완간되어, 화백님의 팬과 삼국지 열혈 독자 모두를 설레게 만드네요.

선생님의 화풍, 작풍은 누구나 공감하듯, 불편한 현실의 모순이나 비위를 있는그대로 지면에 묘사하고 독자의 경각을 유도하면서도, 동글동글한 선과 조형의 미에서 잘 드러나듯 세계에 대한 따스한 애정과 희망, 낙관을 끝내 포기하지 않는 휴머니즘이 그 기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삼국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중국 4대 기서가 다 그렇듯, 누구나 한 번쯤은 아동용 윤색버전과 성인판, 완역본을 다 접하고 성장하지만, 애들한테 읽히려고 하면 "이처럼 잔인하거나 난감한 장면이 많은데..." 하며 머뭇거려지는 게 또 보통입니다. 그렇다고 원작의 감흥과 품격이, 애들 눈을 의식해서 지나치게 훼손되면 그건 고전을 읽히는 보람이 또 줄어듭니다.



이희재 선생님의 이번 "해석"은, 그런 상충하는 독자들의 바람과 욕구를 절묘하게 절충하여, 고전의 원의가 잘 전달되면서도 재미는 재미대로 있는, 한 멋진 정통파의 탄생이라는 점에서 흐뭇한 "사건"입니다. 이희재와 삼국지의 만남이란 그 자체가 하나의 사건임이 뭐 분명하죠. 아이들에게 읽혀도 멋진 입문용 삼국지 구실을 하겠지만, 어른들이 읽어도 예전 고우영 화백 버전 못지 않게, 현대적 감각과 사관이 잘 스며든 품격 있는 정전(正典)으로서 레퍼런스로서, 책장을 뿌듯이 채울 마음의 양식으로 손색이 없습니다.



십상시가 발호하고 정치가 문란해지니 민중의 삶은 도탄에 빠지고, 이런 어수선한 분위기를 틈타 황건적이라는 불순한 무리들이 질서를 어지럽히며 막대한 민폐를 끼치고 다닙니다. 선생님의 화풍은 언제나 그래 왔듯, 모나지 않고 둥글둥글 편안하면서도 캐릭터들의 개성, 혹은 일시적 기분이나 내면의 변화까지 세밀하게 표현하죠. 단호하면서도 생각 깊은 노식, 꼬장꼬장한 주준 등의 표정을 보십시오. 주견 없는 황제의 곁에서 대국(大局)의 진로를 염려하기는커녕 한 톨의 비루한 사익만 행여 다칠세라 노심초사하는 간신배의 심리도 동작과 대사 속에 잘 드러납니다.



혹세무민하며 나라의 근간을 훼손하려는 흉악한 의도를 지닌 장각이지만 그저 과장되게 일그러진 악당의 전형적인 풍모라기보다, 그 나름 배포와 엉뚱한 속셈을 몇 겹 감춘 무게가 느껴지게 무대에 등장하네요. 역사적 팩트만 짚으면 너무도 살벌하고 비관적인 기간과 고비를 짚었지만, 역시 최후의 희망만은 포기하지 않으려는 작가 특유의 낙관주의가 반영되어, 인물들의 모습은 마냥 위협적으로 표현되었다기보다 뭔가 전체적으로 친근감이 풍기는 듯합니다.



위-촉-오 삼국의 정립을 다루기 전, 중국은 여러 소국이 난립하여 약육강식, 부국강병의 노선을 두고 치열하게 다툰 역사가 있습니다. 오른쪽 위 컷은 춘추전국, 그 아래는 다시 이전으로 거슬러올라가 하와 상(은) 시대를 언급합니다. 어린 독자에게라면 자연스럽게 "공자, 맹자" 등의 출현, 활약이 이 시대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지 소양을 심어 줄 계기로도 삼습니다. 고대사의 타임라인이 대략이라도 머리 속에 정리되어야, 단대사건 문화사건 다양한 사항이 머리 속에 제 자리를 빠르게, 또 바르게 잡습니다.



이희재 선생님 특유의, 편안하면서도 꽉 찬 듯, 여유 있으면서도 행간이 밀도 있는 멋진 컷들입니다. 황제, 귀인, 고관들이 즐겨 쓰던 차일, 혹은 일산을 닮은 아름드리 뽕나무를 두 번 부각하며, 주인공 유비의 고귀한 태생과 그 운명을 암시해 줍니다. 영웅은 이처럼 출발부터가 범상치 않고, 시련이 있어도 그 앞길을 재능과 덕성으로 헤쳐나가기 마련이지만, 앞으로 어떤 고비에서 실수와 과책을 범해 그 뜻이 꺾이는지, 혹은 비장한 몰락을 맞는지도 함께 지켜볼 일입니다. 문학 본연의 감동과 정서의 정화라는 기능은 이런 장대한 서사시적 요소를 통해 어린 시절부터 맛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동탁이라는 천하에 몹쓸 악당, 역적이 등장하는데요. 온갖 악행을 저지른 자의 운명은 반드시 하늘이 정한 인과율, 응보의 법칙에 의해 처참한 파국으로 향함을 작가는 건전한 세계관을 통해 직설적으로 독자에게 깨우칩니다. 그렇다고 너무도 사악한 얼굴선, 표정이 특정 캐릭터에게 구현되는 것도 부담스러운데, 이희재 선생님 같은 거장의 원만하고도 신랄한 화풍 속이니 우리 독자들은 마음을 놓고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습니다. 동탁이라는 절대악, 그리고 도원결의 삼형제 중 한 명인 주인공 장비의 모습이 어떤 점에서 차이날 지 대조해 보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어려운 한자성어를 쓰지 않으면서도, 일을 야무지게 매조지하지 않으면 반드시 후환이 생겨 애쓴 수고를 무위로 만든다는 교훈을 잘 전달합니다. 악독한 간신이 정치적 생존의 중대한 고비를 넘겨 안도의 한숨을 쉬고 이후 반전의 틈을 엿보는 가증스러운 표정 등이 생생히 표현되었네요. 어려서 사리 분간이 안 서는 황제, 단견과 무지의 한계를 극복 못 하고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태후, 이들을 돌이킬 수 없는 함정으로 몰아넣는 못된 환관 들이 국가를 존망의 기로로 끌고 가는 과정이 잘 나타납니다.



전국 시대의 난맥상을 정리한 시황제가 패권을 장악했으나 폭압 통치의 후유증으로 황조는 이후 자체 붕괴하고, 중국인들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농민 출신 군주 유방이 세운 한 제국이 새로 등장하여 질서가 잡혀가다, 역적 왕망의 찬탈로 황통이 단절되는 비극을 맞습니다. 광무제라는 중흥 군주가 나타나 난국을 수습하던 지난 내력을 보여 줌으로써, 삼국 시대가 열리기 전 어렵사리 이어온 국가(한 제국)의 정통성이, 왜 그토록 뛰어난 영걸들에 의해 옹호될 필요가 있었는지 미리 독자들에게 납득을 시켜 줍니다.

1권은 진궁과 함께 도망치다 여백사의 집에 들러 유숙하던 중, 오해로 집주인을 죽이고서도, 반성은커녕 "내가 천하를 버릴지언정 천하가 나를 버리게는 하지 않을 것"이라며 음습하면서도 집요한 생존욕구를 표현하는 조조의 행보까지 다룹니다. 무튼 일세를 호령한 효웅의 풍모란 결코 만만한 게 아님을 작품은 독자들에게 잘 일깨우는 서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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