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인 - 상
박영규 지음 / 교유서가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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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속담에 "나도 살고 남도 살린다(Live and let live)"라는 게 있습니다. 우리 나라 말에도 활인지불이라는 게 있어서 결정적인 상황에 척 나타나 궁지에 몰린 이들을 돕는 정의로운 존재를 칭송하는 어구로 삼기도 합니다. 신분제의 족쇄가 엄연하고 특히 천인으로 낙인 찍힌 이들에게는 사회 곳곳에서 숨통을 조이며 활로를 막는 전근대 사회였다고 해도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어서 운명적인, 혹은 기묘한 우연이 끼어들어 귀한 목숨을 살리기도 합니다. 그런 이야기는 언제 읽어도 통쾌하고 감동적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고귀한 행동은 꼭 영웅적인 결단 같은 게 아니라 해도, 그저 소소한 선의에서 비롯했다 쳐도 결과가 심대하며 아마 어디서건 어떤 방법으로건 그 의당한 보상을 받고야 말 것입니다. 아니라면 그건 이미 사람 사는 세상이 아닙니다.



대비원은 동서 두 곳이 있어서 고려 시대부터 급한 환자를 살리고 빈민을 돕는 기능을 했다고 합니다. 그 이름도 부처님의 대자대비에서 유래했겠죠. 의료인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사람을 살리는 필수적인 사회 직능인데도 이상하게 고려, 조선 시대에는 중인의 몫이었고 근세 유럽에서도 간호사는 천시되던 게 일반적이었다 하니 모순도 이만저만 모순이 아닙니다. 캐릭터 탄선(p39)은 명문가의 자제라고 나오지만 양홍달은 노비 출신의 어머니를 만나 태생부터 천인이었습니다. 왜 같은 일을 하는데도, 심지어 더 나은 숙련도와 기여를 하는데도 천대를 받아야 할까요? 부당한 게 당연히 여겨지니 그게 미개한 시대인 겁니다. 여튼 그들이 하는 일이 활인, 즉 사람을 살리는 일이기에 그 기관은 활인원(p39)으로 불립니다.



재미있는 건, 뜻있는 이들(주로 유생)에게 천하의 패륜이자 역적질로 여겨졌던 이성계의 역성 혁명이, 탄선 같은 이들에게는 은둔과 두문의 계기가 되었으나, 반대로 양홍달 같은 이에게는 그나마 신분 이동의 숨통이 조금이나마 트이는 호재였다는 사실입니다. 천인뿐 아니라 많은 빈농들에게도 권문 세가의 대거 몰락과 과전법 실시 등 전제 개혁은 쌍수를 들어 환영할 변화와 조치, 정책 전환이었습니다. 양홍달(과 같은 사람들)은 오히려 방원의 총애를 얻어 역으로 권문세가의 반열에까지 올랐다는 건데 소설 속 사정에 그치는 게 아니라 실제로도 천한 신분을 말끔히 씻고 문자 그대로 팔자를 고친 이들이 많았습니다.



여흥 민씨는 조선 말뿐 아니라 고려 시대부터 명문가였고 심지어 신흥 무인 이성계 가문과 처음 혼사를 틀 때에도 여전히 많이 자측으로 무게가 기우는 대단한 벌열이었습니다. 노상직, 윤철중 등을 이방원의 장인이자 원경왕후의 부친인 민제가 가르쳤다고 나오는데(p90), 민제는 요즘 방영되는 KBS 사극 <태종...>에서 사위 이방원도 직접 가르치는 걸로 설정될 만큼 학식이 높은 이였습니다. 하필이면 이방원의 즉위 후 그 처가에 대한 대대적 숙청이 이뤄지는 통에 (이미 죽은) 노상직 등에 대한 공초가 더욱 불리하게 진행됩니다. 제아무리 한때 세도가 등등하던 이들도 한번 권세로부터 끈이 떨어지면 이처럼 처량한 신세로 떨어지니 권력이란, 위세란, 이처럼이나 무상하고 무상합니다.



"의술이 다 무슨 소용인가?" 그러나 중례는 소비로부터 받은 제안을 마치 화두처럼 숙고한 끝에 몸을 추스리고 공부를 향한 새로운 마음을 먹습니다(p100). 공부는 누구든지의 진로를 열어 줄 만큼 힘이 있는 옵션이며 본디 셋째여서 대통을 이을 가망이 없던 충녕대군도 <대학연의>를 파고드는 그 학구열과 재능 덕에 부왕에게 주목 받습니다(이 소설 속에서요). "그놈 참 귀도 밝다. 잔소리 말고 어서 활인원으로 가자!(p124)" 충녕은 노대에게 핀잔을 줍니다만 그 마음 속은 사뭇 다릅니다.



몸에 꼭 중병이 들어야 사람이 죽는 게 아니겠으며 이런저런 소소한 잡병이 하나 둘 들어서면 어느 순간부터 육신이 버텨내질 못합니다. 소철의 아내(p165)도 이런저런 압박, 스트레스, 시름으로 반쯤은 벌써 저세상에 발을 들여 놓았었으나 중례의 호침, 환약은 죽을 사람을 살립니다. 말 그대로 활인(活人)의 도(道)입니다.



"활인의 길을 택하겠습니까, 아니면 살인(殺人)의 길입니까?(p201)" 탄선의 일갈입니다. 실제로도 세종은 천인 장영실을 아끼는 등 열린 마음의 소유자였죠. 세종(이 소설에서 내내 주상으로 호칭되는)은 어려서 그 부왕(즉 이방원)이 책상을 걷어차며 모후(원경왕후)의 이마에 상처를 입힌 일을 기억합니다. 소설에서는 이 세종이 배우자인 심 왕후와 함께 곡기를 끊는, 즉 단식투쟁을 벌이려 하는 걸로 나오는 게 재미있습니다. 이런 면이 있어야 인간미가 풍기죠.



"마의 따위가 뭘 안다고 함부로 침을 놓은 것이냐!(p243)" 이 질문에 대해선 앞으로 이어질 소설의 모든 뒷이야기에서 차차 답이 이뤄질 것 같습니다. 기대됩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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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치 오브 매직 : 마법 한 줌 핀치 오브 매직 1
미셀 해리슨 지음, 김래경 옮김 / 위니더북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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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를 받았다는 건 어쩌면, 아주 평범한 생이 내리는 형벌인 지루함, 반복, 무의미의 덫에서는 벗어났다는 점에서, 또 그 저주를 풀어낼 시 보상이 기다린다는 점에서는, 축복의 다른 말일 수 있습니다. 특히나 이 두꺼운 아동 문학을 읽고서 베티 위더신즈네 세 자매(플리스와 찰리)의 모험담을 따라가는 동안에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베티뿐 아니라 요즘 아동문학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설령 자신의 저주 받은 운명을 깨닫는 순간이라 해도 정절망하지 않고 침착할 뿐 아니라 때로 상황을 즐기기까지 합니다. 이유가 뭘까요? 제가 어려서 본 <나자리노>에서 젊은 주인공은 운명의 여인을 만났을 때 자리에서 얼어붙듯 동작, 시선, 표정, 생각 등 모든 것을 멈춥니다. 영화 통틀어서 이 장면이 가장 슬픈데 저주받은 청년은 그 사랑스러운 여자를 애초에 만나지 말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안 그래도 불행의 저주가 휩싸고 도는데 애꿎은 여인까지 뭐하러 저주의 여정에 동참시키겠습니까. 그런데 그건 옛날 영화일 뿐이며 이 이야기에서의 베티는 전혀 그런 머뭇거림이 없이 경쾌합니다. 오히려 무대를 깔아줘서 고맙다는 투입니다. 두 여동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저씨가 내 처지를 알면...(p130)" 그런 한가한 소리를 안 할 텐데 말입니다. 그런데 세이머스 핑거티라는 아일랜드식 이름을 한 어떤 "한물간" 아저씨는 그러잖아도 어려운 상황을 더욱 가망 없이 만드는 데 일조하는 듯합니다. 여튼 수십 명에게 자유를 찾아 주었다는 죄목으로 영어의 신세가 된 그는 (독자의 눈에) 실상 베티와 그 자매들이 뒤집어쓴 저주의 사슬이 얼마나 만만찮은 두께와 무게인지 새삼 확인 도장이나 찍어 주는 듯합니다. 어차피 인생은 시련과 문제 풀이의 연속입니다. 누구에게나 말이죠. 저 앞 p104에서도 콜턴은 플리스와 베티를 시험하지 않았습니까.



"버니 할머니도 이걸 노래라고 보나?(p154)" "그래도 노래가 효과는 있었잖아.(p155)" 이 대목에서 역시 그 탑이 예사롭지 않았다는 게 다시 증명되었습니다. 베티 등은 특히 여기서 중요한 말을 하는데, "비록 희망 사항에 그칠 수도 있지만 (지금 자신들이) 뭔가 중요한 사실을 알기 직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거죠. 세상사가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풀기 어렵고 난감한 순간이 다가왔을 때 쓸데없이 쫄 필요가 없습니다. 이 문만 잘 열면 그때부터 새로운 세상, 적어도 어떤 단계가 열릴 수 있습니다. 반대로, 주저앉으면 저주는 일평생 그대로 따라다닐 겁니다. 도전해 볼만한 유인도 동기도 충분합니다. 공정한 게임이라면 게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끔찍한(?) 노래의 효과에 대해서는 저 뒤 p371에서 다시 한 마디가 나옵니다.



어쩌면 부적응자들에게는 자유가 박탈되고 일정한 통제, 예측 가능성 하에서 살아가는 감옥이 더 제격일 수 있습니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도 비슷한 말이 나오죠. 드디어 자유를 찾은 콜턴은 말합니다. "감옥 밖이 얼마나 광활한지 잊고 있었어.(p197)" 사실 감옥 밖에서 내내 산 우리들도 이 점은 잊기 일쑤이니 콜턴을 탓할 일도 아닙니다. 감옥에 갇히지 않아도 일정 범위 안에서 나올 줄 모르는 자발적 수인(囚人)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자인 저는 이 책에 나오는 인물들 중 소샤가 좀 마음에 들었습니다. 나머지 애들도 매력적이고 용기와 낙천성이 대단하지만 소샤 특유의 쿨함과 약간 멍청한 듯 안정감 있는 감정선(p276이라든가 p323에서처럼) 때문이었던 듯합니다. 엄마하고 알고 보면 가장 잘 통하는 애도 따지고 보면 얘 아닐까요? 전 적어도 그리 생각이 들었습니다.



"너 같은 꼬맹이도 날 도와줬는데 뭔가 보답을 하고 싶어(p361)." 이래서 인간, 혹은 무엇이든가와의 관계는 보람 없이 묻히거나 썩어 버리지 않고 환하게 꽃이 피기도 합니다. 너무 늦었을까요? 미안할까요?(p393) 그 리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세상은 공평(p406)합니다. 여러 경로로 결국은 그렇게 됩니다. "베티는 담대한 자였다. 특히 언니 동생과 함께라면(p420)" 이게 저주를 깬 대가입니다. 우리도 거울(p421)을 한번 보고 무엇이 우리 발목을 잡는지, 왜 대담하게 이를 벗어 버리지 못하는지 생각 좀 해봅시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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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너의 심장이 멈출 거라 말했다
클로에 윤 지음 / 팩토리나인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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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와 뜨겁게, 자신의 모든 걸 하얗게 불태울 만한 사랑을 한 번 해 보고 죽어도 죽어야 세상 구경을 한 보람이 있다고 하겠는데요. 개인적으로 "버킷리스트", 뭔가 섬뜩한 느낌이 드는 이 말을 구태여 써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원을 곧잘 잊기에 별 거리낌 없기 남들 따라 쓰며 나만의 목록도 작성해 보곤 합니다. 그런데 곁에 사랑하는 연인이 있으면 이 목록을 채우는 작업이 더 각별한 느낌일 듯도 합니다. 물론 실제로 이런 걸 해 본 사람이라야 느낌을 논할 자격이 있겠습니다.



"다른 여자들은 내 얼굴 보면 심장이 두근거린다는데 넌 여자 아냐?(p74)" 남성 독자 입장에서 등장인물의 이런 대사를 읽으면 좀 오글거리지만 여튼 그럴 만한 사람이 그러겠다고 여기고 이야기에 몰입해 나갔습니다. 생각 외로 이 소설은 남성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1인칭 시점이었습니다. 어떤 상황이나 배경이건 간에 사람은 자신과 영혼의 빛깔이 비슷한 사람과 만나 연을 만들어나가는 법입니다. p33에는 "아주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이라는 여주의 "중2병 같은 대사(원문 그대로입니다)가 나옵니다. 제 느낌으로는 남자 주인공의 이런저런 대사가 더 그런 듯 싶었지만.



3억(p26) 같은 큰 돈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금하고 또 받아챙기는 게 배경이 한국이라고 해도 정말 이국적인 분위기입니다. 여자는 마치 그레이스 켈리(p33) 같은 외모에 주디라는 이름의 개인비서까지 곁에 둔 30대 여성인데 이런 여성에게 "일단 허우대는 멀쩡하니 합격"이란 말을 듣는 게 남자 입장에서 부럽기도 했습니다. 대체 누구인데 초면인 상대를 두고 전과 조회까지 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둘이서 과연 뭘 하겠다는 건가. 이게 예사롭지 않으니 버킷 리스트가 이 정도면 찐으로 그런 이름이 붙어도 될 만한 내용입니다. "아니지, 어을-티메이틀리(ultimately). 궁극적으로 더 가까워졌으면 좋겠다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거야(p81)." 그러나 언제나 신경 쓰이는 건 "중량 초과(p82)"죠. 인생(전체)이건 그 특수한 극점에서의 관계이건 적당한 게 힘든 겁니다.



매 챕터가 시작할 때는 로버트 하인라인이라든가 소크라테스라든가 프리다 칼로라든가 혹은 유명한 영화의 대사라든가에서 선발된 제사(題詞)가 독자를 맞는데 p120의 10장 첫머리는 이 소설의 작가 클로에 윤의 <감사>에서 인용구가 뽑힙니다. "하찮을 것을 주고 빛나는 것을 받아라." 제 생각일 뿐이지만 그 반대가 돼야 좋지 않을까요? 쉽지도 않을 것 같은데 잘 모르겠습니다. 여튼 짝사랑이란 다 그 나름의 애환이 절절합니다. 이 대목에 나오는 게 정말 짝사랑인지는 살짝 의심이 되지만.



<메멘트 모리>는 유명한 구절이긴 하나 그 제목으로 된 책(p189)이 누구의 무슨 내용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인간은 개밥이 될 만큼 자유롭다." 살벌하군요. 도로타는 당연히 알겠지만 우리의 미스터 전은 왜 여기서 무지를 드러내는 걸까요. 그렇다고는 하나 두 사람 모두 저 구절에 깊이 공감할 듯은 합니다.



"나는 언제나 여자들과 사랑 비슷한 것을 했지만 사랑이 뭔지 모르는 나로서는 내가 사랑을 했는지(중략) 답을 내릴 수 없었다(p220)" 역시 그 다운 말입니다. p221에서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그녀의 "중2병 같은 대사"가 여기서 또다시 나옵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영문을 알았기에 더 이상 그리 들리지는 않습니다.



"때 묻지 않은 건지, 어느 구석이 모자란 건지 (중략) 지나가는 모든 것에 손을 흔들었다(p278)." 이도 저도 아닌, 아마 이제는 달관의 경지에 들어서가 혹 아닐까요? 시한부 인생뿐 아니라 그 어떤 "한정판"도 인간의 눈에 아름답게 보입니다. 등장인물들의 이름, 사고, 행동은 그처럼이나 이국적인데 배경은 또 이곳이라 더 시크한 장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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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독서 능력을 키워 주는 독서대화
이미숙 지음 / 이비락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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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는 저자와의 대화이자 삶에의 간접 체험입니다. 일일이 다른 나라나 (위험도 다분한) 자연계를 체험할 수는 없고 책을 통해 저런 걸 간접으로 접하며 견문과 시야를 넓힐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책을 그저 혼자 읽어 내는 것만으로도 지성 발달에 큰 도움이 되는 activity이지만 기왕이면 독후 활동이나 병행 과제로서 타인과 대화를 나누는 것도 무척 생산적입니다. 이 외에, 솔직히 대다수의 어린이들은 책읽기를 어려워하므로(아니, 어른이라고 뭐가 다르겠습니까?) 독서를 돕는다는 뜻에서, 같이 발걸음을 떼어 주는 식으로, 특히 그 부모님들이 아이와 대화를 수시로 나눈다는 의의도 있습니다.



p61 이하에는 이솝 우화 중 "사자와 생쥐"를 읽고 가상의 아동(실재 인물일 수도 있죠. 이미숙 저자님의 아들인지도 혹시 모르겠습니다) 정민이와 그 어머니가 나누는 대화가 있습니다. "사자와 생쥐"뿐 아니라 이 책의 모든 에피소드는 이 정민이하고 엄마가 이야기를 이끌어 나갑니다. 정민이뿐 아니라 모든 아이들은 책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만의 개성 있는 해석이나 반대 의견을 피력합니다. 학교에서 유도하는 어떤 판에 박힌 결론이 아니라고 해서 면박을 주거나 하면 아이는 마음에 상처를 받고 기가 죽습니다. 이게 심하면 일종의 교과서 공포증이나 강박에 걸려 학습 진도에 거의 영구적인 장애를 겪기도 합니다. 엄마와 정민이가 나누는 대화는 그 자체로 흥미로울 뿐 아니라 사실은 우리 어른들이 과연 이 텍스트로부터 충분한 의미를 추출했는지 점검하는 계기도 제공합니다. 진짜 배워야 할 건 애들도 애들이지만 우리 어른들이니 말입니다.



<새벽 2시, 혼자만의 방에서>라는 작품을 아실까요? 저는 처음 들어 봤는데 이처럼 이 책은 엄마(혹은 아빠)와 아이가 함께 읽고 토론(?)할 만한 여러 좋은 책들을 소개해 주는 노릇도 합니다. 주인공 수정이는 고독 소녀가 그 별명인데 정민이는 제법 의젓하게 주인공에게 감정이입하며 엄마한테 오히려 설명을 해 줍니다. 아이가 이처럼 능동적으로 독후 활동을 하면 엄마 입장에서 얼마나 대견하고 안심이 되겠습니까? 요즘은 인성과 소통이 중시되는 세상, 그저 기계처럼 공부만 잘하는 애보다 이처럼 이웃과 사회와 잘 교류하는 아이가 장래에 더 성공할 가능성이 크고, 꼭 속물처럼 성공이다 뭐다를 따지기 전에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도 이게 바람직합니다. 이 작품은 "도서관의 중요성"을 깨우쳐 준다는 점에서도 또한 바람직합니다.



사실 아이들이 어려워하는 건 시입니다. 함축성과 추상성 때문인데 오히려 아무 배경 지식 없이 열린 마음으로 접근하면 더 이해가 쉽습니다. 이게 안 되는 건 입시 위주 교육 때문에 교육 과정에서 정답으로 정해 놓은 답안과 자신의 생각이 어긋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작용해서입니다. 그래서 특히 시(詩)는 부모님의 효과적이고 자상한 지도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자는 시를 읽힐 때 "겉만 읽지 말고 숨어 있는 보물을 캐게 하자(p133)"고 제안합니다.



엄마와 정민이의 대화 끝에는 작품(책) 내용의 정리도 있고, 정민이 친구들(?)의 다양한 독서 감상문도 따라옵니다. 이 부분 역시 유익하며, 작품을 읽고 이해하는 다양한 시각을 접하며 어린 독자(뿐 아니라 어른들)의 지평을 넓힐 수 있고,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의 태도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도 생각하게 돕습니다. 백혈병과 싸우며 머리가 빠진 니키, 죄의식이라든가 자신이 믿는 가치를 위해 희생한다는 것의 의미를 깨우치게 해 준 앤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자신의 희망을 실현하기 위해 묵묵히 노력하는 장운이 등 이 채책에는 어린 영웅들도 무척 많이 등장합니다. 독서 대화의 소재를 애써 찾을 걸 고민할 필요 없이, 오히려 책을 다 읽고 나서 부모님과 아이 사이에 화젯거리가 너무 많아 고르는 일이 어려울 듯합니다. 대화를 엿보는 것도 이처럼 재미난데 직접 해 보면 어느 정도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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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이렇게 죽을 것이다 - 언젠가는 떠나야 할, 인생의 마지막 여행이 될 죽음에 대한 첫 안내서
백승철 지음 / 쌤앤파커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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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무척 두려운 순간입니다. 석가모니는 생로병사의 과정 모두가 고통이라고 했으나 우리말 속담에는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세상에 나서 부모에게 사랑 받고 알맞은 짝을 만나 사랑하는 즐거움을 누리고 자식을 낳아 크는 보람을 맛본 후에야 세상에 태어난 이유가 있는 법입니다. 그러나, 아니 거꾸로 그렇기에, 죽음은 생을 보람차게 산 사람이건 그렇지 않건 간에 두려운 순간이며 피할 수도 없습니다. 그럴 것 같으면 차라리 죽음을 담담히 당당하게 받아들이고 의연한 마음가짐을 미리 갖추는 게 현명한 선택일 수 있습니다.



"오래 수행한 고승일수록 자신의 죽음 날짜까지 예언한다고 합니다(p48)." 우리는 그런 수도자들처럼 높은 경지에 스스로 달할 수 없고, 서양 격언에도 "어느 누구도 자신이 죽을 날까지는 알 수 없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니 새파란 젊은이에게도 당장 내일이 그날일 수 있다는 성숙한 마음가짐으로 죽음을 예비하는 노력이 의미 있다고 하겠습니다. 한편으로, 불의의 사고를 당하든지 해서(그런 일은 결코 없어야 하겠지만) 불수의 상태로 장기간 의식 없이 누워있다거나 하면 이는 경우에 따라 당사자의 의사에 반하는 일일 수 있습니다. 미리 자발적인 의사에 따라 이런저런 조치를 하는 것도 하나의 선택입니다. 책에서는 이른바 연명치료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하는데 이 부분 관심 있는 이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만한 정보이며 생각할 거리가 많습니다.



임사 체험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이런 걸 절절히 증언하는 이들이 한국에도 있고 외국에도 있습니다. 들어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살짝은 고개가 갸웃해지기도 합니다. 저자는 이 역시 저산소 상태에서 겪는 뇌의 착각(p59)일 수 있다며 조심스럽게 의견을 개진하는데 그런 아티클을 어려서부터 읽어 온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저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그런 느낌들이 "아 이게 저승 문턱이구나"라고 여기면 딱딱 들어맞긴 하지만 그게 진짜인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죽음이 그래도 어떤 느낌을 주는,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그 무엇이기라도 했으면 하는 간절함이 그런 믿음을 이어가는 듯도 합니다. 정말 죽기라도 하면 느낌도 의식도 아무 흔적도 없는 완전한 무(無)가 아니겠습니까. 이런 생각에 도달하면 진심 슬프긴 합니다. 내가 nothing이라니.



희곡 속 줄리엣은 의도적으로 약을 먹고 가사 상태에서 생명을 이어갔다가 깨어났는데 이게 아니라 진짜 죽음을 맞은 노년이라 해도 아주 예외적으로 다시 깨어나는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동아시아에서도 전통적으로 삼일장을 치러 왔으며 죽음의 선고는 어느 문화권에서도 신중하게 이뤄집니다. 책에는 관 속에 손톱으로 긁은 자국도 간혹 나타난다고 하는데 혹여 그런 경우 운 좋게 개관을 다시 한다 해도 반드시 당사자가 살아나라는 법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 해도 아주 잠깐이나마 의식이 돌아왔다는 건 당사자를 그리 떠나보낸 유가족에게는 몹시 슬픈 일이겠습니다(당사자는 관 속에서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뇌사의 경우 대한의사협회에서는 이미 1993년에 주장하고 나선 적 있는데 물론 이익집단으로서 그들의 입장이 따로 반영된 움직임이었겠으나 여튼 이 문제가 저처럼이나 일찍 공론화가 되었습니다. 현재는 이 책 p119에 나오듯 운전면허증에 장기기증 의사를 밝히는 등 여러 제도가 실시되는 중이나 저자는 아직까지도 일반의 의식이 미흡하다며 아쉬움을 표합니다.



p154 이하에는 "현명한 죽음의 설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있습니다. 한편으로 슬퍼지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내가 세상에 살다 가는 뒷마무리를 이처럼 꼼꼼하고 깔끔하게 하는 게 인생에의 진정한 책임 표명이 아닐까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죽음은 무섭기도 하고, 한편으로 영원에의 합일이기도 합니다. 어떤 특정 종교에서의 가르침 같은 걸 떠나, 이승에서 성실하고 보람되게 산 사람은 죽음 이후에도 반드시 어둡고 차가운 그 무엇이 기다리는 절망 같은 걸 극복하지 않겠나 싶습니다. 이것이 서글픈 허무를 깨치는 진정한 생의 초극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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