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

점례이야기



빈털터리 주제에

200% 특근도 까먹고

기름때 벗기고 거울 앞에서 광내고

휘파람 불며 나가보면

점례는 다방 한구석 외진 자리에서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뻗어오르는 초록빛 플라타너스

흔들리는 잎새들 위

푸지게 내리던 햇살.

점례를 만나면

지겨운 일감도 악살 떠는 관리자 놈도

행상 나가는 어머니 무거운 뒷모습도

알 수 없는 곳으로 날아가버렸다


휘파람 소리 찍찍 날리는 삼류 영화관

힘센 양키들 말 달리며 갈기는 총알에

인디언 평원 피로 물들고

부잣집 처녀 업고 검사가 된 촌놈

제 홀에미 무식하다 내모는

영화를 보며 박수치고 눈물 짜다

거리에 나서면 어느새 저녁

불켜진 공장 뒷담을 돌 때

힘센 양키가 되고 싶던 꿈도

흘러가는 공장 폐수 속에서 물거품이 되고

멋진 여주인공 생각에 수다 떨던 점례도

담 너머 웅웅 굴러가는 기계 소리에

울적해져 말이 없고

그렇구나.

우리는 총잽이도 돈 많은 검사 부인도 아니구나


"제일 소원인 것은

무시당하지 않고 사는 것인데

그럴려면 이빨 물고 세상일에 싸워야 하는데

.....약해빠져서 눈물만 많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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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시인의 10주기 추모모임이 있었다고 했다. 딱히 가슴에 새긴 이름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그의 시들을 꺼내야 겠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제 더는 누군가를 가슴에 새길 자리도 없다. 너무 많은 이름들이 쓰여있고 그들은 세상에서 지워졌다. 세상을 송두리째 빈약한 가슴에 새길수는 없는 노릇이니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더 새기려면 이미 새겨진 누군가를 지워내야 하는 옹색한 가슴팍을 한탄할밖에..

흥얼거리는 노랫말의 시작이 되었던 시.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이 노래를 들으면, 이 노래를 부르면 어느 쨍한 6월의 거리가 떠올려진다. 희뿌연 최루가스 속에 한쪽으로 기울어진 남학생과 그 학생을 끌어안은 다른 학생의 망연한 모습.

이한열이다.

노래로 먼저 닿은 시는 자꾸 곡조를 붙여 읽게 된다. 가락을 따라 읽게 된다. 느린 진양조가 어울린다.

어디선가 그의 시와 수필을 모아 선집으로 묶어낸다는 말을 들은것도 같다. 그것을 다시 읽을지는 모르겠다.


많은 시들 속에서 나는 이 촌스럽기 그지없는 시에 한동안 꽂혔다.

하필이면 점례. 하필이면 소원.

총잽이도 돈 많은 검사 부인도 아닌것은 서럽지 않다. 세상이 내 혈관에 주사기를 꽂을 때 눈 앞에 보여주는 비현실적 상황에 번번이 속곤 했다.

한 생을 살아가기 위해 기꺼이(?) 저당 잡혀야 할 것들이 많았다. 시간을, 돈을, 희망을, 생명을, 행복을, 자존을, 마침내 사람다움을..

빼앗겼지만 내가 모자라서라고 이해하게 되는 비현실. 현실을 위해 탈현실을 해야하는 우리는 현실적인가..


"제일 소원인 것은

무시당하지 않고 사는 것인데

그럴려면 이빨 물고 세상일에 싸워야 하는데

.....약해빠져서 눈물만 많고."


마지막 연을 읽으며 눈물 많은 자신을 확인한다.

어쩌면 이제 눈물만 남은건지도 모를일이다. ​ 


꾸역꾸역 박영근의 시들을 읽는다. 다만 눈물바람이 아니라 거기에서 자라나는 우렁우렁한 솔을 보고 싶어서 말이다.

기어이 잎을 내고 몸부림치며 휘청거리지만 가지를 뻗어내는 솔 한그루를 보고 싶어서 말이다.

아무도 무시 당하지 않는 세상, 키 작은 나무와 키 큰 나무가 어우러져 이루는 숲을 보고 싶어서 말이다.

시퍼렇게 그려지는 시들을 진양조로 읽는다. 점례의 소원을 담아 읽는다. 컴컴하고 쿰쿰한 냄새가 나는 다방 구석에 새초롬 앉아 있던 점례에게 푸진 햇살을 안기듯 읽는다.

청춘의 사랑조차 비루하게 만드는 현실의 보풀을 하나씩 떼어내며 읽는다.

점례야..점례야. 눈물 많은 점례야. 자꾸만 불러가며 읽는다.

살아서 사랑하자고..살아서 부대끼자고..살아서 시퍼렇게 웃어보자고 점례에게 거짓말 같은 약속을 하며 읽는다.


박영근은 없다. 점례는 아직도 거기 있는데..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샛바람에 떨지 마라..떨지 마라..

점례야 점례야 더는 울지 마라..무시 당하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네가 아니더냐. 우리가 아니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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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간지옥을 벗어날 길이 없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주일에 한 번은 햇빛을 ! 제 몸

에 불을 놓아 여공들의 엄마가 되었던, 노동이라는 이름

의 갓난아기를 낳았던 전태일의 소지를 다시금 읽은들


 내 몸에 불을 놓은들

 국가와 자본, 동패도 달라지지 않는다


 귀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이 즐비한 술집마다 들어차

있다

 분노한 자들처럼 술 퍼마시고 돈을 쓴다

 다이어트 콜라를 마시며 자위의 트림을 해댄다

 제 눈을 찔러 제 앞이 희뿌연 시장의 저녁들

 힘을 모은다는 건 과학의 정언이지 마술같은 기회가

아닐진데


 더욱더 나누고 차이를 인정하고 상상하고 정주하지 않

겠다며 정주하는 주막

 그것마저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 떼지어 사교에

젖는다


 피범벅 죽음을 옆에 두고도 습관과 일상이 계속되고

있다

 시위와 욕망의 밤낮을 가진 두 얼굴.


 오늘도 해방 세상을 향한 노동의 첫 마음이 진군하려

는지

 총파업의 쇠북 소리 이명처럼 울려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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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색적인 제목을 가진 시집.

표제작인 연작시 대가리를 먼저 찾아 읽었다.

[국가는 계산적이었다

 냉정하게 분류하고 머리 숫자를 중요시했다]

로 시작하는 대가리1, 대가리2..

몇 명이 죽었고, 죽을것이고, 죽을지도 모른다고 했을 때, 그것을 감내하고 낼 수 있는 수익이 더 크다면 몇개의 대가리를 고임돌로 쓸 수 있다는 계산법이 통하는 나라.

수익은 대가리 수로 채워지고 대가리 수로 증폭된다. 대가리의 효용.

버려지는 대가리와 선택되는 대가리에는 어떤 차이가 존재할까. 목소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늙은 대가리들의 안하무인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던 권력이 있으니 말이다.

소리 내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살해협박에 순순히 가만히 있던 대가리들은 오롯이 수장되고 매장되고 화장되고 해체되었다.

5월은 그렇다.

어린이 날도 어버이 날도 스승의 날도 있는..모든 관계들이 고맙고 감사하고 사랑스럽다는 걸 강조하며 시작된다.

5월의 심장 즈음에 두개의 반란이 마주 서 있다.

권력을 향한 총의 반란과 역시 권력을 향한 피의 반란. 권력을 독점하자는 총의 반란은 성공을 했다. 그래서 한 때 성공한 쿠테타는 혁명이라는 망언이 돌아다니기도 했다. 여전히 돌아다니고 있다. 망령처럼..

살아있다고 소리치는 민중들의 대가리에 정조준된 피의 반란은 조용히 수습되었다. 작디 작은 땅덩어리에 그들의 사망원인은 퍼지지 못했고, 아무도 그것을 물으려 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았고 묻지 않은 피의 반란은 오랜 시간 땅으로 스며들어 꽃을 키웠고 나무를 키워 그 붉은 5월을 드러내었다.

대학에 들어가서야 광주를 알았다. 4.19를 아는 것 만으로도 이상한 아이 취급을 받았던 시절에 광주는 충격을 넘어 분노였다

민주광장에 모여 성명서를 읽고 학생회 선배들을 격문을 쏟아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는지를 이야기했다. 얼마나 많은 대가리들이 처절하게 떨어졌는지를 이야기했다. 그 때 신입생 하나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갔다.

"광주에서 왔습니다. 지금 선배들께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이야기하셨습니다. 우리 오빠가 총에 맞았습니다. 몇백이 죽고 몇천이 죽고 그게 다 무슨 소용입니까? 목숨은 하납니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말이죠. 대체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한 사람에게 하나씩밖에 없는 목숨. 그것을 잃은 것입니다. 단 한사람이 죽었어도 모든 걸 잃은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숫자로 분노케 하지 마십쇼. 숫자보다 더 큰것을 빼앗긴 겁니다."라고 했다.

울먹이긴 했지만 끝내 울지 않고 우리들이 분노하는 허상에 분노하였다. 숫자가 대체 뭐란 말인가. 한 사람이 죽으면 분노의 양이 줄고 수천이 죽으면 분노의 양이 더해지는가..나는 그 자리에서 울었던 것 같다. 나의 분노게이지는 대가리 수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었는가 반문하다 마땅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던 까닭이다.


그 후로 오랜 시간이 흘렀다.

전설을 이야기하듯 회고하는 이야기들이 술집에서 이어졌다. 회한으로 동지가를 부르고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것으로 오르가즘도 없을 자위를 하며 지낸다.

술집 밖에선 여전히 노동자들이 죽어가고 쫓겨가고 쓰러지고 있지만 경계에 서서 머뭇거리는 나는 여전히 술집으로 발길을 잡아 한탄과 자괴감에 취할 뿐이다.

지나쳐 온 시간을 아이들은 역사시간에 현대사로 배운다.

4.19를, 5.18을, 6.10을..

그 시간을 살아낸 사람은 '그런 일이 있었어'라고 진술한다.


시집을 읽어내는 건 고역이었다. 취조실에 앉아 작성된 진술서를 살피며 반절씩 접어 진술이 틀리지 않았음에 동의하는 지장을 찍어야 할 때처럼 말이다.

얼마나 많은 형을 받게 될지는 모를 일이나 죄 많은 대가리를 목 위에 얹고 있는 한 감내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너무 많은 목숨을 잃었다. 너무 많이 잃어서 누가 죽었다는 기사를 보며 '전엔 300명도 죽었는데 뭘..'이라는 잔혹한 생각을 하게 되는 건 아닌지.

그렇게 세상과 권력의 공범이 되어가는 건 아닌지..두렵다.

비탄에 빠진 세상은 넋두리가 구하지 못할거다. 수없이 던져진 저 대가리들이 씨앗이 되고 꽃을 피우고 소리보다 강력한 반란의 향기가 되어 세상에 그득해질거다.

지금은 술집을 나서야 할 때다.

어여쁜 대가리들은 만나야 할 때다.

참혹하게 떨어졌으나 부릅 뜬 눈 감지 않은 그 대가리들과 마주할 때다.


5월이다.

자책과 자괴가 서로 먼저 죽겠다고 가슴 속에서 광란을 하고 있다.

살아있어야 할 대가리. 목소리를 내는 대가리가 되어야 한다. 큰 목소리를 만들어 아직 병원에 누워있는 백남기를 깨우자.

더 큰 목소리를 만들어 이익의 제물로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노동자들을 끌어안자.

막막한 현실에 더는 내려갈 곳도 없는 곳까지 숙여야 하는 대가리. 어차피 한세상이라면 빳빳하게 들고 들이대보자.

혹시 아는가.

참 대견한 대가리네..라며 누군가 쓰다듬어줄지..


고희림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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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금니를 무는 버릇이 있군요

의사가 숨은 버릇 하나를 찾아냈을 때

입을 다문 건

부끄러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헐어가는 입으로 물고 있는 것들,

옛 애인의 소문이나

책 속의 쓰레기 같은 정신이나

매운 사탕과자나

썩고 있는 우울,

나의 만찬들을 씻어내기 싫어서였다

버릇을 고치지 않으면 금이 가겠는데요

의사가 자꾸 버릇이라고 말할 때

손으로 입을 막아 버린 건

어금니가 부서지도록 깨물어야 안심이 되는 것,

그것이 나라고 말할 수 없어서였다

위험한 버릇이라지만

내게 정말 위험한 건

꽃이름 따위를 말하느라 입을 벌리는 순간

삶의 허공을 깨무는 일이다

오늘도 노련하게 어금니에 힘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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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은 생소한 이름이지만 어찌어찌하다 이 시집을 손에 넣은 건 '버릇'때문이다.

책을 꾸역꾸역 사서 쟁여놓는 버릇.

타로카드를 뒤집어 내 운명을 점쳐보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그깟 종이 카드 하나를 뒤집는 것 만큼의 의미 밖에 없는 운명, 혹은 삶이라면 얼마나 가벼운가.

묵직한 삶을 꿈꾸고 '이만하면 잘 살았어'라고 회고하고 싶다는 소망을 품고 말이다. 결국 꿈인 것이며 실체가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주제에 종이 카드 하나 뒤집는 것에 운명을 맡기지 않겠다고 쉰소리를 하는건 '버릇'이다.

아마 '타로카드를 뒤집는 밤'이었다면 눈길도 안주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타로카드를 그리는 밤'이라지 않는가.

축적된 통계와 수치를 근거로 내어놓는 거기서 거기인 점괘가 아니라


신의 유머 같은 내 운명의 타로 카드에

나는 슬픔을 섞지 않은 빛깔로 몇 번이고 덧칠을 했다

(타로카드를 그리는 밤. 중에서)


라고 고백하는 영민함에 나도 모르게 '그렇지!'라며 웃었다.


아침,

잠에서 깨어나 물을 마실 때 나는 밤새 악물려있던 어금니를 감각한다.

도대체 꿈 속에서 무슨일이 벌어졌던건지 기억도 없는데 나는 언제나 이를 악물고 잠을 깬다.

그렇게 어금니는 균열이 생겼고 하나 둘 장렬히 전사하기 시작했다.

처음 어금니가 부서졌을 때 치과를 찾았다. 의사는 '이를 악무는 버릇이 있군요'라고 했다.

'위험한 어금니들도 있네요. 미리 치료해 둬야겠어요'라고 덧붙였다. 의사의 말을 들으며 나는 부서져버려 빈 공간이 된 어금니를 혀로 만져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귀가 딱 맞는 치아들 사이에 생긴 공간. 어쩌면 숨구멍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살겠다고 씹어대던 노동의 강도가 허물어 놓은 것일지도 모르고, 견뎌야 할 일상들이 허물어 놓은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낮 동안엔 헐겁게 맞물려 있던 이들이 잠이 들면 결사항전의 자세로 앙다물려 있는데는 이유가 있겠구나 싶었다

의사는 부서진 어금니를 치료하자고 했지만 싱긋이 웃으며 '다음에요.'라고 했다.

그 후 치과를 찾지 않았다.

그래서? 부서진 어금니 옆의 이가 이중의 노동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씹는 방향을 바꿨다. 오래지 않아 어금니가 시큰거리기 시작했다.

이운진의 소박한 시어들이 엮어내는 시들 속에서 유난히 눈에 띤 이 시는 어떤 데자뷰같은 것이었다.

나도 그랬었지. 나도 그렇지.

아직도 이를 악무는 버릇이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여전히 아침이면 뻐근해지는 턱관절은 딱히 이유가 궁금하지도 않은 눈치다.

도사견처럼 꿈의 귀퉁이를 물고 늘어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도저히 실현 될 가능성이 없는 것을 꿈 꾼 댓가일게다. 책 속에서 얻는 싸구려 감상과 치졸한 위로와 과대포장되는 유희에 놀아난 댓가이거나 차마 동의하지 못할 말들을 뱉어낸 것에 대한 어금니의 자책일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위험한 버릇이다.

모든 어금니들이 부서져버리고 온전히 씹어 삼키지 못한다면 육체는 비루해지고 정신은 피폐해질거다.

그렇게 삶에서 멀어지며 도태되며 퇴화되어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사인이 불분명한 미라가 되어질 지도 모른다.


조근조근하게 제 삶에 덧칠을 해 내는 이운진을 주목한다. 쓸데없는 버릇이 데리고 온 위안인 셈이다.


위험한 버릇이라지만

내게 정말 위험한 건

꽃이름 따위를 말하느라 입을 벌리는 순간

삶의 허공을 깨무는 일이다


꿈의 귀퉁이를 물고 늘어지는게 폐허가 되어버린 삶의 허공을 깨무는 것보다는 낫다는 돌팔이 의사같은 진단을 내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입을 다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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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자 하나가

    - 식민지 시절, 식민지 아동인 내 어머니가 일본풍 계면 가락에 맞추어 줄넘기를 하며 부르던 노래


천전소학교 여자 선생님

자기 부모 없는 사람 손을 들어라

육십 자 아동 그 안에서

박미자 하나가 손을 들었다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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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시절을 지냈던  4남매의 맏이, 엄마는 집안의 기둥이었다고 했다. 지주의 딸은 아니었지만 아비가 남긴 재산이 있어 굶지는 않았고 주머니엔 사탕이 있었다고 했다. 아비 없는 살림을 어찌해야 할지 고민에 고민을 하던 외할머니는 아비의 죽마고우에게 재산을 의탁했고 아비의 죽마고우는 죽마를 부러뜨리고 야반도주를 했다.

하루 아침에 거렁뱅이가 된 외할미와 엄마와 엄마의 동생들은 갈월동 한복판에서 대여섯개 남은 보따리를 보며 망연자실했다고 했다. 해방이 되기 얼마전의 일이라고 했다. 엄마의 아비는 창씨개명도 했었다고 했다. 하루아침에 게이꼬가 되었던 엄마는 낯선 이름에 자주 대답하지 않았고 그럴때마다 외할아버지에게 혼이 났었다고 했다. 나라의 독립이라든가 민족의 자존심이 없어서 창씨개명을 한 것이 아니라 올망졸망 새끼들이 다칠세라 숨죽인 결과였다고 했다. 엄마는 그 이야기를 할 때마다 그랬다.

'느이 외할아버지가 친일파나 앞잽이는 아니었어 얘. 집에 숨어든 사람들은 꼭 밥 먹이고 재워서 흔적없이 고스란히 보내곤 했어. 말 잘들으니 감시가 덜했고 그게 어떻게 보면 여럿 살리는 길이 되기도 한거지. 할아버지 부끄러워마라. 내 아비래서가 아니라 좋은 분이셨다.'

해방이 되고 찾은 이름 경숙은 반가웠다고 했다. 게이꼬는 어쩐지 꼬집히는 것 같은 이름이라 싫었다고 했다. 철없는 이모는 영숙이보다 에이꼬가 좋았다고 중얼대다 엄마에게 머리카락 한 줌을 뽑혔다고도 했다.

살길이 막연했던 맏이는 영민하게 움직여 하꼬방 하나를 얻고 외할머니와 장사를 하며 단단한 기둥이 되어가기 시작했다고 했다.

숨 쉴만 하니 전쟁이 일어났다고 했다. 집에 남자라곤 없으니 이고지고 피난 갈 염도 못하고 구구로 집구석에 숨어 있었단다. 어린 남동생들은 너무 어려 힘을 보태기는 커녕 오히려 손이 가고 힘이 가는 동생들이었다.

사람들이 피난을 떠나고 몇 남지 않은 동네에서 이모는 고무줄 놀이를 했단다.

철없는 것..엄마는 힐난했지만 땀을 콩죽같이 흘리며 끝없이 고무줄 위를 뛰는 이모가 가여워 같이 고무줄을 했다고 했다.

'하다보니까, 내가 더 잘했지 뭐니. 느이 이모가 울고불고..호호..기집애가 샘은 많아가지고 언니면 다냐고 달려드는데..호호'


엄마는 고무줄 놀이를 하며 불렀던 노래를 가끔 부르곤 했었다.

'장백산 줄기 줄기 피어~린 자욱..'

내가 어릴 때, 나는 고무줄을 하며 이런 노래를 불렀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줄넘기, 고무줄을 할 때 부르는 노래들. 엄마와 나와 시인의 어머니가 부른 노래는 고스란히 상처의 역사이다.

선화공주를 얻기 위해 서동이 깜찍하게 유포(?)했다는 서동요는 현실이 되었다. 아이들이 불러대는 노래는 상징이었다.

내용이 무엇인지 어떤 가락인지 따위는 사실 중요치 않았다. 시름을 덜어내고 위로를 받고 하는 것은 어른의 몫이었고, 아이들은 그저 노래를 부른것이다.

다행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그 내용과 이데올로기까지 송두리채 알아버렸다면 얼마나 참혹했을까.

장백산을 불렀던 엄마는 빨치산이 아니었고,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던 나도 반공주의자는 아니다.


허수경 시인의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은 '발견'과 '교감'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먼 시간 전에 이미 있었던 것들이 '발견'되는 순간 시간을 건너 '교감'하게 되는 것.

절창이라 할만한 시들이 많았지만 나는 이 시 앞에서 꼬질꼬질한 옷차림에 바가지머리를 한 여자애를 발견했다. 지금은 엄마, 혹은 할머니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고 있는 그녀의 어린 시간을 말이다. 보듬고 쓰다듬고 끌어안고 싶어졌다.

쓰라리고 따갑고 위험한 시간의 길을 걷느라 깡총깡총 뛰었을 ..비명 대신 내용이 무엇이든 상관없는 노래를 불러야 했을 어린 여자애를 말이다.

아이들은 노래한다.

노래는 아이들이 한다.

가장 솔직하고 가장 적나라하게 어떤 시기를 이야기 한다.

아이들의 곡조는 여전히 상처다.


어버이날이라고 깜짝 방문한 아들녀석이 종일 흥얼대던..곡조가 머리 속에 맴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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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은 고기를 물어다 암컷에게 바치는 짐승처럼

내 사랑의 수준은 딱 그만큼


먹다 남은 썩은 고기를 물어다

암컷에게 바치고 군침을

삼키며 썩은 고기를 다시 노리는 내 본능,

비루한 내 수준

아슬아슬한 내 수준


좀 남겨주지 않을까? 기대를 부풀리면서

구름이 뭉게뭉게 흘러가는 하늘을 올려다보면서도

끊지 못하는 썩은 고기에 대한 간절한 생각.

다 먹기야 하겠어?


쓸쓸하다. 이 정도면 암컷이 문제가 아니다

외롭다. 이 정도면 암컷이

덜어줄 수 있는 문제가 더이상 아니다.


암컷이 내가 갖다 바친 썩은 고기에

길고 아름다운 주둥이를 가져다대는 순간

나는 거침없이 싸운다


암컷을 잊고

썩은 고기를 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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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주철의 시는 도축장을 닮았다. 오래 칼을 잡은 도축사가 배를 가르고 뼈를 발라내고 뼛사이에 박힌 한 줌도 안되는 살을 도려내는 순간을 경이롭게 바라보듯 구석구석 샅샅이 발라낸다. 바름. 거기에 바름이 있다. 이것이 발라내는 것인지 올바른 것인지를 묻지 않는게 예의다. 도축사는 실수를 해도 칼은 실수하지 않을것 같아서이다.

이미 제 길을 꿰고 있는 잘 벼린 칼은 어제처럼, 그제처럼, 작년처럼, 더 오래 전 처음 짐승의 몸에 박히던 순간처럼 제 길을 만들어간다.

숨통이 이미 끊어진 것들은 저항없이 길을 내준다. 내장과 뼈와 거죽이 살아온 과정을, 혹은 죽은 사연을 고스란히 드러내지만 냉정하리만치 차가운 표정으로 칼의 길을 간다. 쭈욱~ 서걱서걱..칼에게 그것은 바르는 일이며 바른 일이다.

사랑은 얼마나 하찮은 무게를 갖는지 시를 읽고 또 읽는다. 유통기한이 있다고, 과학적 분석이 나오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한여름에 고소하게 부쳐 놓은 부침개처럼 하루를 못넘기고 쉬어 꼬부라져 하찮은 신파 쪼가리가 되고 만다는 것을 말이다.

영원한 사랑이라 이야기 하는 건, 부질없는 주문 같은 것이다. 없다는 걸 확실히 알기 때문에 있다고 우겨보는 애잔함같은..

치킨을 시켜 다리와 날개만 먹는 남자와 가슴살과 퍽퍽한 살만 먹는 여자.

삼겹살의 비계를 좋아하는 남자와 고소한 살점만 좋아하는 여자.

막 무쳐낸 김치를 좋아하는 남자와 새콤하게 꼬부라지는 맛을 좋아하는 여자.

소주가 좋은 남자와 맥주를 좋아하는 여자.

쌍화차를, 녹차를, 커피만 빼고 다 좋아하는 남자와 커피만 좋아하는 여자.

이 남녀는 오래 같이 산다. 어쩐지 잘 맞고 어쩐지 앙숙이다.

사랑해. 따위의 고백은 하지 않으며 해보지 않았다. 우습게도 둘 다 사랑을 믿지 않았다.

그렇게 시작한 남녀는 애써 싸우지 않는다. 그렇다고 호의적이지도 않다. 적당히 긴장하며 적당히 타협하며 적당히 산다.

눈이 마주치면 웃고, 등이 닿으면 서운해하면서..사랑이란건 그렇게 썩은 고기 한 점 앞에서 치사해질 수 있을만큼 가볍다.

유치해지는 것이 대수롭지 않은 열병같은 사랑은 믿지 않는다. 썩은 고기 한 점에 점유지분을 계산하는 욕심이 예쁘다.

암컷과 수컷에서 시작해서 남자와 여자, 사람과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은 이렇게 별 볼일 없다. 유구한 역사와 진화를 끌어들여 그럴싸하게 포장한다해도 헛수고다.

왜냐하면..썩은 고기는 사실 지천에 널려있고, 나눠 먹을 줄 아는 이도 지천에 널렸으니 굳이 나의 암컷이길 원하지 않아도 된다.


안주철의 시들..적나라한 시어들이 싱싱하다. 어쩌면 생경하거나 비릿할지도 모르겠지만..따끈하게 썰려나온 소의 간에 군침을 흘리는 족속이라면 기름장을 옆에 놓고 읽어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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