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을 그냥 지나쳤다. 집에 중환자가 있으면, 그렇게 하는거라고 ..

시어머님께서 많이 편찮으셨고 여전히 그렇다. 아직도 차도가 조금 있을 뿐 병원을 벗어나지 못하셨다. 의사표현도 아무것도 못하시는 어머님을 매일 뵙고 종알거린다. 혹여 반응하는 단어가 있을까해서 말이다.

그렇게 하다보니, 내가 꺼낼 수 있는 말들이 몇개 없구나 싶다. 꾸역꾸역 읽고 남김없이 배설해 버리지 않고서야 어떻게 흔적조차 남지 않는걸까?

어쨌든, 몸은 고되고 마음을 헛헛하다. 더불어 가난해짐으로 책을 얻어읽겠노라 공언을 했다. 이 무슨 뻔뻔함인가..

이런 저런 사정을 알고 있던 이웃이 책을 선물했다.

고맙게도...

 

  1945년을 세계는 함께 겪었다. 안 그런 해가 없겠지만 이 시기를 깃점으로 많은 것들이 변했다.

 세계의 판도는 동서로 남북으로 구획정리가 되기 시작하지 않았을까? 본격적인 현대사의 시작인 지점. 원래 시작은 1년이겠지만 0년으로 명명한 이유가 사뭇 궁금해진다. 출판사 서평에 나온 간략한 이야기 말고..그럴 수 밖에 없던 이야기가 궁금해진것이다.

 대학에 들어 가 처음 읽었던 책이 "해방 전후사의 인식"이었다.

 변화의 시작을 1945년을 되짚는 것으로 시작한다는 묘한 데자뷰를 혼자 느끼며 감사히 읽기로 한다.

 

 

 

 

 

 

 

가난에 쩔어 살아도 읽어보겠노라 주문한 책이 연휴 전에 도착했다.

 

 

 

 

 

 

 

 

 

 

 

 

 

 

참 아까운 정치인, 혹은 활동가 이정희의 이름을 보고서야 그녀의 근황이 궁금해졌다. 진보당원도 아니었고 무엇도 아니었지만 그녀를 응원했던 건 진심때문이었던 것 같다. 어디서건 자신의 몫을 해내고 있을거라고, 어떤 식으로든 다시 국민들에게 돌아올거라고, 믿고 있었던 까닭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반가움과 동시에 그녀의 시선을 읽고 싶었다.

이인휘의 폐허를 보다..이만큼 강건한 노동의 글을 다시 볼 수 있을까?

누가 그랬다. 더이상 "노동문학은 없다.문학노동만이 남았다"라고 말이다. 현장으로 들어간 작가보다 작가의 책상으로 올라간 노동이 더 많았다. 현실이 아닌 환상. 꿈. 막연함. 이런 것들이 담아내는 노동의 의미는 뒷맛이 썼다. 어쨌든 가검을 들고 설치는 사람들 사이에 제대로 벼린 날 선 진검을 든 검객이 나타난 셈이다.

미야모토 테루의 책과 파놉티곤..

 

주문한 네권의 책과 선물 받은 한 권의 책으로 명절 연휴를 준비한다.

어머님께 들려드릴 새 단어들을 발견하면 좋겠다. 새 이야기들이 있으면 더 좋겠구..

잠시나마 책 조차도 덮고 퍼질러 잘 수 있으면 더 더 좋겠다.

 

다음 추석은 제대로 지낼 수 있을까? 이렇게 또 넘어가고 싶지 않은데...5일간의 휴일과 다섯 권의 책으로 명절을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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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2-06 15: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설 연휴 즐겁게 보내세요. ^^

나타샤 2016-02-06 16:40   좋아요 0 | URL
평안하시길 ~~^^

나타샤 2016-02-06 16:42   좋아요 0 | URL
죄송해요..닉을 착각해서..이제 꼬옥~기억할께요^^
 

 

<기록되지 않은 노동>을 읽다가...

'이 책은여성노동자글쓰기모임에서 처음 내는 책이다'라고 적혀있다.
일하는 여성들이 겪는 부조리와 억압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것이 다만 여성이기때문이라기보다는 구조의 문제임을 보게한다. 여성이어서 차별적으로 소외되는 부분은 있으나, 문제는 사람에 대한 존중인것이다. 정당한 노동과 노동에 대한 댓가, 소모되고 대체되어질 준비가 된 불안한 노동이 아니라 건강한 노동이 제공되고 순환될 구조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여러 일터에서 드러나는 문제점들, 그 문제점들 앞에 내몰린 사람들.다양한 이야기가 거기 있다.


학원강사들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읽는다. 소위 '먹물들의 막장'이라 불린다는 학원과 학원강사들.
막장에서 먹고사니즘을 해결하는 사람이다보니 어쩔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특수노동자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강사들은 일단 프리랜서다. 개인사업자라는 말이다. 분명 고용노동을 하고 있지만 지위는 개인사업자라는거..이거만큼 웃기는 것도 없다.

아이들이 인지하는 강사. 학부모들의 시야에 잡히는 강사. 고용주에게 비추어지는 강사. 그럴싸한 외피에 갇힌 빈곤하고 비루한 존재일 뿐이다.
스타강사라든가 적잖은 연봉을 받고 계약한 이들과 비교할 바는 아니다. 손으로 꼽을만큼의 성공한(?) 이들과 그들의 몇십곱절로 바닥에 깔려 일회용 소모품으로 사용되어지고 마는 이들. 배운 도둑질이다보니 결국 이리저리 밀려다니던 이들은 또 학원을 하고..
다행히 나는 학원을 할 계획도 없고 학원을 할 능력도 없다. 


새내기냐 경력이냐의 차이. 얼마나 떠돌았는지에 대한 평가, 과목의 경중. 다양한 선긋기가 거기 있다. 중요한건..이들은 동료의식이라는 것이 거의 없다.
얼마전부터 종합학원들은 문을 닫거나 단과학원으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사실, 단과가 원장들에게 돈은 된다.
처음..사회 강사를 전임이 아닌 시간제로 바꿨다.
그러다 시험때만 임시직으로 썼다. 그러다가..사회과목이 폐지되었다.
국어강사의 수가 줄었다. 영어강사도 한명 줄었다. 수업시수도 줄지 않고 (오히려 늘고..그런다고 수당이 높아지진 않지만) 강사 수도 줄지 않은 수학.
살아남은 강사들은 능력때문이라기보다 시류때문이었다. 과목이 폐지되고 같이 일하던 강사들이 떠나가도 이의제기를 하는 이들은 없거나 거의 없다. 이 바닥이 원래 그렇다고..다른데 알아보겠거니..그냥 그렇게 보낸다.

 

학부모들과의 상담은 참 피곤한 일이다. 대다수의 부모들은 아이를 과신하거나 과대평가하거나 아예 모르거나 관심이 없다. 보고싶은대로 믿고 싶은대로 아이를 규정하고 그것에 맞도록 만들어내라고 다그친다.
정말 많이 하는 말을 들자면..
-우리애는 머리는 좋은데 노력을 안해서 그래요. 
(머리가 좋은 아이라면, 자신의 처지에서 무엇을 해야할지를 알거다. 공부를 하든, 재능을 개발하든 뭐든 노력을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머리가 나쁜거다)
-우리애가 친구를 좋아해요. 나쁜친구들이랑 어울려서 좀 망가졌어요.
(어떤 부모도 자신의 아이가 그 나쁜친구일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릴 땐 잘했어요. 정신만 차리면 기본이 있으니까 금방 따라잡을거예요.
(기대와 현실은 엄연히 다를 수 밖에 없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금방이라는 말은 무력해진다.)
-누나(혹은 형이나 언니,오빠)는 잘했는데 얘는 왜이런지 모르겠어요.
(얘가 누나나, 형이나, 언니나 오빠가 아니라서 그런거다. )
-성적이 안나와서 학원을 옮기려구요.
(그러시던가.)

 

학원강사들의 노동조합이야기가 나왔다.
어쩌면, 강사들조차 스스로를 노동자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이 고달픈 소비재로서의 삶을 만들어내는데 공범이 된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별 생각없이 강사질(?)을 하고 있었고 하고 있다. 공강시간에 책을 읽거나, 쉬는시간에 아이들과 왁자하게 떠들고, 오래 근무했다는 핑계로 원장의 지시를 눙치고 적당히 타협하는 여우가 되었지만 퇴근할 때마다 몸도 마음도 빈털터리가 되곤한다. 하루를 소비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 공백이 너무 커서..시간이 지날수록 더 커지고 흉해져서 자꾸만 책을 읽어 채우려 하는지도 모르겠다.

-어머~! 수학쌤이세요? 대단하시네..
어디선가 나를 소개할 때마다 따라붙은 저 환호따위..바뀌는 눈빛따위..개나줘버릴 일이다.

괜히 학원강사이야기부터 읽었다. 생각이 길어지고 많아져서 진도가 안나간다.
여성이여서 더 안보였을 수 있고, 더 작은 목소리거나 더 희미하게 비춰진 모순이겠지만..이것은,,엄밀하게 노동하는 인간에 관한 기록일 것이다.
일상의 언어로 쓰여진 책..썩 괜찮다.

일단 밥이나 먹자. 점심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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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댈 언덕이 필요한 시간을 사는 탓일까..유난히 떠나는 소식에 예민해진다.

예술가로부터 범부를 포함해 지식의 선생님까지..따지고 보면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고 매체를 통해 간접적으로 느끼고 알고 깨달은 것이 전부인데도 애통함은 너무나 현실적이다.

습관처럼 검색을 하다..짧게 작성된 신영복선생의 부음기사를 본다. 그의 이력도 없는 간단하게 쓰여진 "....사망하였다"로 마무리되는 기사.

나는..링크를 공유하며 "숲으로 가신겁니까."라는 짧은 이야기를 덧붙였다.

그 흔한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라든가..그의 책을 끼고 지새운 격동의 밤따위를 상기할 여유도 없었다. 너무 아파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통증같은 것.


SNS에 밤새 언급되는 신영복선생의 부음이 못마땅했다. 그의 살아온 삶과 그의 힘과 그의 역할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건지 되짚어 가며 그의 떠남을 추모하는게 당연하겠지만 말이다.

이는 어쩌면 보내고 싶지 안은 아집같은 것이었으며 믿지 않겠다는 고집인지도 모를일이었다.

대부분은 그와의 짦은 찰나의 인연을 언급했고, 그의 책이 자신의 삶에 어떻게 작용했으며, 그와의 작업은 얼마나 훌륭했는지를 덧붙였다.

질투였을까.

단 한 번도 그를 마주해본 적 없이 신뢰와 흠모만을 품었던 사람으로서 그의 온기를, 그의 체취를 알지 못한다는 아쉬움같은 것이 작동했을까?


수없이 많은 부음들과 떠남을 마주하며 한동안 애통해하다 곧 잊곤 했다. 기억하겠노라..영원한 뮤즈였노라..내 삶의 일부분을 만들어낸 주인이라..칭송해마지않던 이들조차 늘상 기억하고 붙들고 있진 못했다. 살아간다는 건 그럴만큼의 여유도 허락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리움은 시간이 지날수록 짙어지는 법이라며 자위하지만 말 그대로 자위일뿐이다.

SNS를 닫고 들여다보지 않기로 했다. 적어도 오늘은..그의 부음이 넘쳐나고 있으며 더 넘쳐날 것이다.


그와 나를 잇는 단 하나의 줄은 그의 책이다.

종이로 제작된 텍스트뭉치가 아닌 그의 삶을 관통하는 삶의 자세와 신념. 따라배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우쳐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될것을 당부한 그의 글들이다.

아직은 그의 떠남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안믿어지니까..언제고 그자리에 서서 깊은 시선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내어놓으며 '괜찮아. 사는건 그 속에서 치열하게 몸부림치는거야.'라고 위로하며 독려할 것 같아서 말이다.

그를 보내고 나면 더 시끄러울 것 같다.

그의 글씨, 그의 글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고, 안타까운 마음들은 그것에 끌려다닐 것이다.

마지막 그의 정갈한 삶을 장사치들에게 내어주어야 한다면 단호히 거부할 것이다.


큰 선생이 떠나셨다. 숲으로 가신겁니까? 또 다시 묻고 싶어진다. 어쩌면 그의 삶은 감옥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그렇게 편지를 썼고, 우리는 그에게 거친 답장도 내어주지 못했다.

잘 가신거라고 말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수고하셨다고..험한 수형생활을 멋지게 마치셨다고 건방진 한 마디를 건낼 수 있으면 좋겠다.

어쩌면 아버지처럼 그를 의지했을 많은 사람들의 망부가가 당분간 계속될것이고..

나는 단지 눈물이 나기를 기다릴게다.

아직은..그 어떤 추모도 할 수 없을만큼 혼란스럽다.

아슬하게 지탱하고 있던 기둥이 사라진, 그래서 제 척추를 곧게 세우고 바르게 설 준비가 되지 못한 탓이다.


님은 떠났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라는 싯귀 하나가 자꾸만 맴돈다.

책을 찾기로 한다. 그가 미처 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그의 글들 속에, 어느 행간에 숨겨져 있을것만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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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서 2016-01-16 10: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타샤 님의 말씀에 공감합니다.
나와 일면식도 없고 매체에 영향력으로 알게 되는 사람들이 많지요. 그들과 이어지는 하나의 연결고리라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더군요. 그 매개체가 책이면 북플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넘쳐날 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신영복 교수님의 서거 소식에 저도 안타까움을 느끼고 나름대로 이겨내고 있습니다만, 슬픔을 그 이상의 무엇으로 승화시켜보려는 나타샤 님의 자세가 저한테 본보기가 되는군요.

나타샤 2016-01-16 10:38   좋아요 2 | URL
책을 읽는다는 건..어쩌면 작가와 독자의 암호교환같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습관때문일지도 몰라요. 머리가 굵어지던 시간에 아버지처럼 내어주신 글들이 큰 힘이 되었다는 걸 고백하는 것이기도 하고요. 미처 읽어내지 못한 것이 있을까..마음이 바빠지는건 그때문일지도..

해피북 2016-01-17 09: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처음에 올라온 기사를 믿지않았어요. 너무 간단하게 알리는 비보를 보며 이렇게 간단히 쓰일만한 분이 아닌데 아닐꺼다 했는데 연이어 나오는 기사를 보고 망연자실해지더군요. 나타샤님 말씀처럼 책이라는 매체로 만났을뿐인데 심적으로 의지했던분이 훌쩍 떠나버리신거마냥 인생 참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쯤 정말 지금은 서오릉 숲길에 올라 청구회의 추억을 되새기고 계실런지요...
 

한동안 시집을 끼고 살았다. 어떤 시들은 싱거웠고, 어떤 시들은 거짓말쟁이였으며 어떤 시들은 꿈만 꾸었다.

읽는 것이 심드렁해질 때 보통 시를 끼고 지내곤 한다. 이건 흡사 메뉴판에 끝없이 늘어서 있는 메뉴 중 고를게 없거나 입맛을 당기게 하는 것이 없을 때, 그냥 길가에 서서 계란빵으로 허기를 때우는 것과 비슷하기도 하다.

책을 사들이고 읽고, 때론 쌓아두고 멍~하게 응시하고..적잖은 시간이 지나고 시가 시들해지고 있다.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산문들이 나름 재미지다.

 

 

 

 

 

 

 

 

 

 

 

 

 

 

 

 

호흡이 길어져서라기 보다..누군가 길게 이야기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인지도 모른다.

푹 물러진 시레기처럼 그런 말들이 고팠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우물거리며 후룩 거리며 읽고 나면..비평집도 칼럼집도 또 맛나게 집어들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미 읽어치웠던(?) 김현선생의 책도 다시 집어들어 신나게 읽겠지..

 

 

 

 

 

 

 

 

 

 

 

 

 

 

그리고..요즘 부쩍 관심을 두게 되는 매력적인 '브라질'

 

  브라질 사람들에 이어 브라질총서로 묶이는 "미래의 나라, 브라질"도 기다리게 된다.

  긴 글을 읽고 싶어진다. 이제 조금 긴 호흡으로 읽어도 좋을 때다.

 

 

  산문부터 시작하자. 겨울이 짧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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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가 승리하는 것이 아니다. 불의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승리하는 것이다>

사필귀정이라고 했다. 권선징악이라고 했다. 하지만 선은 정의는 모두의 것이 아니었다. 어떤 이들의 정의, 어떤 이들의 선만이 힘을 갖았고 대다수의 정의와 선은 짓밟히곤 했다. 역사는 그런 사람들의 저항흔(痕)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그리 오래 지나지 않은 시간 전에 우리는 힘 없는 국가의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수탈을 당했다. 모든 것을 빼앗기고도 저항할 수 없었다. 눈에 보이는 물적 조건들 뿐만아니라 신념과 인간성까지 말살당했다.

저항은 끝없이 이어졌지만 불가항력이었다. 불가항력..이만큼 무기력한 이유가 또 있을까..

가장 약한 사람들이 먼저 죽어갔다. 정신이 마음이 육체가..

치유되지 않은 트라우마는 오랜 시간이 지나 방어기제가 되었고 저보다 약한 이들을 밟음으로 자신의 입지를 보장받는 영악함을 키워냈다. 그렇게 사분오열이 되어지는 사람들...급기야 피해자들에게 조롱과 악담을 정의라는 이름으로 대의라는 이름으로 쏟아붓고 있다.

 

얼마 전 한일협약이 이루어졌다.

위안부문제를 해결한 대통령이라고 자화자찬이 이어졌고 정작 피해 할머니들은 소외된 저들의 정의와 선을 구현해낸다.

조악한 근거들을 들어 최선이라고 했다. 팔 수 있는 건 전부 팔아먹고 야반도주를 꿈꾸는 간교한 여편네처럼 환하게 웃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 더불어 그들의 편에 서서 이제 그만 용서하라고 외치는 사람들에게 화가 나고 또 한편 가엾다.

대승적이라는 말은 약자의 희생을 강요하는 의미로 바뀌고 있다. 과연 그런가.

 

오랜 저항의 시간을 기억해야한다.

우리 나라 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이어진 불의에 저항했던 기록들, 그들의 저항흔을 더듬어 볼 필요가 있다.

 

 

 

 

 

 

 

 

 

 

 

 

 

 

 

 

 

 

 

 

 

 

 

 

 

 

 

 저항은 송곳처럼 어디서든 뚫고 나온다.

 

 

 

 

 

 

 

 

 

 

 

 

 

 

제국의 위안부..이것이 법정싸움으로 비화된 것에는 우려를 한다. 하지만 그 내용에서 비판받아 마땅하다. 지배와 피지배, 그 사이에서 동격의 사람들에 의해 체결된 정당한 계약도 뭣도 아니었으며 이것이 개인적 차원의 결정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자발적 종군 위안부도 개중 있었을 수 있다. 포주가 있었을테고, 한국인 모집책들이 있었을게다. 그것이 그들의 선택이었다고 하기엔 상상조차 불가능한 폭력적인 시간이 전제되어 있었다. 일부의 그럴싸한 상황들이 있었다고 해도 그것이 전체의 모순을 뒤엎을 일반화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양국의 화합을 바라는 마음에서 서술했다는 책은 너무나 폭력적이다. 문제제기와 새로운 시각의 제시를 넘어 피해자들에게 사죄도 없이 용서와 화합을 바라는..그러지 못하는 것을 졸렬함으로 몰아세우고 있다. 다 읽진 않았다. 읽다 던져버렸다. 그 책을 더 구체적으로 읽지 않은 것에 대해 후회는 없다.

 

불가역적 협의란 없다.

불가역적일 수 있는 건..위안부 할머니들의 시간과 고통. 그것이다.

 

정의가 승리하는 것이 아니다. 저항하는 사람들이 승리하는 것이고 저항의 흔적이 역사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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