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

점례이야기



빈털터리 주제에

200% 특근도 까먹고

기름때 벗기고 거울 앞에서 광내고

휘파람 불며 나가보면

점례는 다방 한구석 외진 자리에서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뻗어오르는 초록빛 플라타너스

흔들리는 잎새들 위

푸지게 내리던 햇살.

점례를 만나면

지겨운 일감도 악살 떠는 관리자 놈도

행상 나가는 어머니 무거운 뒷모습도

알 수 없는 곳으로 날아가버렸다


휘파람 소리 찍찍 날리는 삼류 영화관

힘센 양키들 말 달리며 갈기는 총알에

인디언 평원 피로 물들고

부잣집 처녀 업고 검사가 된 촌놈

제 홀에미 무식하다 내모는

영화를 보며 박수치고 눈물 짜다

거리에 나서면 어느새 저녁

불켜진 공장 뒷담을 돌 때

힘센 양키가 되고 싶던 꿈도

흘러가는 공장 폐수 속에서 물거품이 되고

멋진 여주인공 생각에 수다 떨던 점례도

담 너머 웅웅 굴러가는 기계 소리에

울적해져 말이 없고

그렇구나.

우리는 총잽이도 돈 많은 검사 부인도 아니구나


"제일 소원인 것은

무시당하지 않고 사는 것인데

그럴려면 이빨 물고 세상일에 싸워야 하는데

.....약해빠져서 눈물만 많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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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시인의 10주기 추모모임이 있었다고 했다. 딱히 가슴에 새긴 이름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그의 시들을 꺼내야 겠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제 더는 누군가를 가슴에 새길 자리도 없다. 너무 많은 이름들이 쓰여있고 그들은 세상에서 지워졌다. 세상을 송두리째 빈약한 가슴에 새길수는 없는 노릇이니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더 새기려면 이미 새겨진 누군가를 지워내야 하는 옹색한 가슴팍을 한탄할밖에..

흥얼거리는 노랫말의 시작이 되었던 시.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이 노래를 들으면, 이 노래를 부르면 어느 쨍한 6월의 거리가 떠올려진다. 희뿌연 최루가스 속에 한쪽으로 기울어진 남학생과 그 학생을 끌어안은 다른 학생의 망연한 모습.

이한열이다.

노래로 먼저 닿은 시는 자꾸 곡조를 붙여 읽게 된다. 가락을 따라 읽게 된다. 느린 진양조가 어울린다.

어디선가 그의 시와 수필을 모아 선집으로 묶어낸다는 말을 들은것도 같다. 그것을 다시 읽을지는 모르겠다.


많은 시들 속에서 나는 이 촌스럽기 그지없는 시에 한동안 꽂혔다.

하필이면 점례. 하필이면 소원.

총잽이도 돈 많은 검사 부인도 아닌것은 서럽지 않다. 세상이 내 혈관에 주사기를 꽂을 때 눈 앞에 보여주는 비현실적 상황에 번번이 속곤 했다.

한 생을 살아가기 위해 기꺼이(?) 저당 잡혀야 할 것들이 많았다. 시간을, 돈을, 희망을, 생명을, 행복을, 자존을, 마침내 사람다움을..

빼앗겼지만 내가 모자라서라고 이해하게 되는 비현실. 현실을 위해 탈현실을 해야하는 우리는 현실적인가..


"제일 소원인 것은

무시당하지 않고 사는 것인데

그럴려면 이빨 물고 세상일에 싸워야 하는데

.....약해빠져서 눈물만 많고."


마지막 연을 읽으며 눈물 많은 자신을 확인한다.

어쩌면 이제 눈물만 남은건지도 모를일이다. ​ 


꾸역꾸역 박영근의 시들을 읽는다. 다만 눈물바람이 아니라 거기에서 자라나는 우렁우렁한 솔을 보고 싶어서 말이다.

기어이 잎을 내고 몸부림치며 휘청거리지만 가지를 뻗어내는 솔 한그루를 보고 싶어서 말이다.

아무도 무시 당하지 않는 세상, 키 작은 나무와 키 큰 나무가 어우러져 이루는 숲을 보고 싶어서 말이다.

시퍼렇게 그려지는 시들을 진양조로 읽는다. 점례의 소원을 담아 읽는다. 컴컴하고 쿰쿰한 냄새가 나는 다방 구석에 새초롬 앉아 있던 점례에게 푸진 햇살을 안기듯 읽는다.

청춘의 사랑조차 비루하게 만드는 현실의 보풀을 하나씩 떼어내며 읽는다.

점례야..점례야. 눈물 많은 점례야. 자꾸만 불러가며 읽는다.

살아서 사랑하자고..살아서 부대끼자고..살아서 시퍼렇게 웃어보자고 점례에게 거짓말 같은 약속을 하며 읽는다.


박영근은 없다. 점례는 아직도 거기 있는데..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샛바람에 떨지 마라..떨지 마라..

점례야 점례야 더는 울지 마라..무시 당하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네가 아니더냐. 우리가 아니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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