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금니를 무는 버릇이 있군요

의사가 숨은 버릇 하나를 찾아냈을 때

입을 다문 건

부끄러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헐어가는 입으로 물고 있는 것들,

옛 애인의 소문이나

책 속의 쓰레기 같은 정신이나

매운 사탕과자나

썩고 있는 우울,

나의 만찬들을 씻어내기 싫어서였다

버릇을 고치지 않으면 금이 가겠는데요

의사가 자꾸 버릇이라고 말할 때

손으로 입을 막아 버린 건

어금니가 부서지도록 깨물어야 안심이 되는 것,

그것이 나라고 말할 수 없어서였다

위험한 버릇이라지만

내게 정말 위험한 건

꽃이름 따위를 말하느라 입을 벌리는 순간

삶의 허공을 깨무는 일이다

오늘도 노련하게 어금니에 힘을 준다.


----------------------------------------

조금은 생소한 이름이지만 어찌어찌하다 이 시집을 손에 넣은 건 '버릇'때문이다.

책을 꾸역꾸역 사서 쟁여놓는 버릇.

타로카드를 뒤집어 내 운명을 점쳐보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그깟 종이 카드 하나를 뒤집는 것 만큼의 의미 밖에 없는 운명, 혹은 삶이라면 얼마나 가벼운가.

묵직한 삶을 꿈꾸고 '이만하면 잘 살았어'라고 회고하고 싶다는 소망을 품고 말이다. 결국 꿈인 것이며 실체가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주제에 종이 카드 하나 뒤집는 것에 운명을 맡기지 않겠다고 쉰소리를 하는건 '버릇'이다.

아마 '타로카드를 뒤집는 밤'이었다면 눈길도 안주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타로카드를 그리는 밤'이라지 않는가.

축적된 통계와 수치를 근거로 내어놓는 거기서 거기인 점괘가 아니라


신의 유머 같은 내 운명의 타로 카드에

나는 슬픔을 섞지 않은 빛깔로 몇 번이고 덧칠을 했다

(타로카드를 그리는 밤. 중에서)


라고 고백하는 영민함에 나도 모르게 '그렇지!'라며 웃었다.


아침,

잠에서 깨어나 물을 마실 때 나는 밤새 악물려있던 어금니를 감각한다.

도대체 꿈 속에서 무슨일이 벌어졌던건지 기억도 없는데 나는 언제나 이를 악물고 잠을 깬다.

그렇게 어금니는 균열이 생겼고 하나 둘 장렬히 전사하기 시작했다.

처음 어금니가 부서졌을 때 치과를 찾았다. 의사는 '이를 악무는 버릇이 있군요'라고 했다.

'위험한 어금니들도 있네요. 미리 치료해 둬야겠어요'라고 덧붙였다. 의사의 말을 들으며 나는 부서져버려 빈 공간이 된 어금니를 혀로 만져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귀가 딱 맞는 치아들 사이에 생긴 공간. 어쩌면 숨구멍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살겠다고 씹어대던 노동의 강도가 허물어 놓은 것일지도 모르고, 견뎌야 할 일상들이 허물어 놓은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낮 동안엔 헐겁게 맞물려 있던 이들이 잠이 들면 결사항전의 자세로 앙다물려 있는데는 이유가 있겠구나 싶었다

의사는 부서진 어금니를 치료하자고 했지만 싱긋이 웃으며 '다음에요.'라고 했다.

그 후 치과를 찾지 않았다.

그래서? 부서진 어금니 옆의 이가 이중의 노동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씹는 방향을 바꿨다. 오래지 않아 어금니가 시큰거리기 시작했다.

이운진의 소박한 시어들이 엮어내는 시들 속에서 유난히 눈에 띤 이 시는 어떤 데자뷰같은 것이었다.

나도 그랬었지. 나도 그렇지.

아직도 이를 악무는 버릇이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여전히 아침이면 뻐근해지는 턱관절은 딱히 이유가 궁금하지도 않은 눈치다.

도사견처럼 꿈의 귀퉁이를 물고 늘어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도저히 실현 될 가능성이 없는 것을 꿈 꾼 댓가일게다. 책 속에서 얻는 싸구려 감상과 치졸한 위로와 과대포장되는 유희에 놀아난 댓가이거나 차마 동의하지 못할 말들을 뱉어낸 것에 대한 어금니의 자책일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위험한 버릇이다.

모든 어금니들이 부서져버리고 온전히 씹어 삼키지 못한다면 육체는 비루해지고 정신은 피폐해질거다.

그렇게 삶에서 멀어지며 도태되며 퇴화되어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사인이 불분명한 미라가 되어질 지도 모른다.


조근조근하게 제 삶에 덧칠을 해 내는 이운진을 주목한다. 쓸데없는 버릇이 데리고 온 위안인 셈이다.


위험한 버릇이라지만

내게 정말 위험한 건

꽃이름 따위를 말하느라 입을 벌리는 순간

삶의 허공을 깨무는 일이다


꿈의 귀퉁이를 물고 늘어지는게 폐허가 되어버린 삶의 허공을 깨무는 것보다는 낫다는 돌팔이 의사같은 진단을 내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입을 다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