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혼비 작가의 신비감이 벗겨진 글들이다. 만나서 술한진 하면서 이런저런 유쾌한 일들을 하고픈 마음이 글속에 그대로 전달되고 있다. ‘다정’이 어떻게 다감으로 만들어지는지 각각의 에세이에서 만나면 좋겠다. 특히, 승무원 경험 이야기는 혼자 히히 웃었음을 고백한다.
나에게 술이 삶을 장식해주는 형용사라면 커피는삶을 움직여주는 동사다. 원두를 갈면 하루가 시작되고페달을 밟으면 어디로든 갈 수 있고 디카페인커피를 마시면 하루가 끝난다. 형용사는 소중하지만, 동사는 필요하다. _ 커피와 술, 코로나 시대의 운동 중 - P196
결코 내 것일 수 없다고 여겼던, 내가 소중하다는 감각과 나를 다시 이어준 한 끼의 식사. 어떤 음식은 기도다. 누군가를 위한. 간절한. _ 한 시절을 건너게 해준 중 - P211
‘다정다감‘을 장난스레 비튼 느낌도 좋았지만, 결국 모든 글이 다정에 대한 소감이자, 다정에 대한 작은 감상이자, 다정들에서 얻은 작고 소중한 감정의 총합인 것 같아서. 내 인생에 나타나준 다정패턴 디자이너들에게 무한한 감사와 사랑을 보낸다. 디자인에 워낙 재주가 없는 나에게 다정한 부분이 있다면그건 다 그들의 다정을 되새기고 흉내 내며 얼기설기 패턴을 만들어간 덕분일 것이다. _ 에필로그 중 - P220
일단 오늘도 쓴다. 잘 보이지 않고 잊히기 쉬운 작고 희미한 것들을 통에 담는 마음으로. _ 마트에서 비로소 중 - P20
타인이 더 나은 경험을 해보길 진심으로 바라서 하는 조언과, 무작정 던져놓는 냉소나 멸시는 분명 다르다. ‘세상의 빛을 보자‘는 게 ‘관광(觀光)‘이라면, 경험에 위계를 세워 서로를 압박하기보다는, 서로가 지닌 나와 다른 빛에도 눈을 떠보면 좋지 않을까. _ 여행에 정답이 있나요 중 - P30
그렇다. 여성들도 소리 지르고 때리고 맞는 훈련을해야 한다. 미지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 ‘원초적 싸움의세계‘를 경험을 통해 현실의 영역으로 끌어내려야 한다. _ 축구와 집주인 중 - P50
그러니까 가식의 영역 안에서, 비록 속내를 허심탄회하게 나누고 속속들이 모든 걸 말하지는 않았지만, 서로에게 끝까지 좋은 사람이고자 하는 노력과 노력이 만나 빚어내는 존중과 다정이 존재했다. 나중에는 가식이 섞여들었다고 한들 B가 무려 3년 가까이 저런 태도를 꾸준히 유지하는 걸 보면 이제는 가식이 아니라 그냥 성품이라고 봐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가식과 진실의 경계도 흐릿해졌다. 나 역시 어느 순간부터 그를 믿고 좋아했고 따랐다. 더는 연기할 필요없이. _ 가식에 관하여 중 - P60
남에게 충고를 안 함으로써 자신이 꼰대가 아니라고 믿지만, 남의 충고를 듣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꼰대가 되어가는 걸 모르고 사는 것. 나는 이게 반복해서 말해도 부족할 만큼 두렵다. 내가 보고 싶은 것, 듣고 싶은것, 입맛에 맞는 것들로만 만들어낸, 투명해서 갇힌 줄도 모르는 유리 상자 안에 갇혀 있을 때, 누군가 이제 거기서 잠깐 나와 보라고, 여기가 바로 출구라고 문을 두드려 주길 바란다. 때로는 거센 두드림이 유리 벽에 균열을 내길 바란다. 내가 무조건적인 지지와 격려와 위로로 만들어진 평온하고 따듯한 방 안에서 지나치게 오래쉬고 있을 때, 누군가 ‘환기 타임!‘을 외치며 창문을 열고 매섭고 차가운 바깥 공기를 흘려 보내주기를 바란다. _ 나만을 믿을 수가 없어서 중 - P75
우리 눈에 ‘기본‘ 너머의 세계가 보이지 않는다고 세상에 없는 것은 아닌데, 맞춤법 하나로 무시받아서는 안 되는 삶들이 도처에존재한다. 당신 곁에도 나의 곁에도. _ 그의 SNS를 보았다 중 - P108
관심이란 달짝지근한 음료수 같아서 한 모금 마시면 없던 갈증도 생긴다는 것을, 함께 마실 충분한 물이 없다면 건네지도 마시지도않는 편이 좋을 수 있다는 것을 항상 기억한다. 순간의기분으로 문 너머 외로운 누군가에게 다가가려다가도, 가장 따뜻한 방식으로 결국에는 가장 차가웠던 그때의내가 떠올라 발을 멈춘다. 끝까지 내밀 손이 아닐 것 같으면 이내 거둔다. 항상성이 없는 섣부른 호의가 만들어내는 깨지기 쉬운 것들이 두렵다. 그래서 늘 머뭇댄다. ‘그럼에도 발을 디뎌야 할 때’와 ‘역시‘ 디디지 말아야 할때 사이에서. 이 사이 어딘가에서 잘못 디딘 발자국들사이에서. _ 문 앞에서 이제는 중 - P136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어쩌면 이런 것들이 흔히말하는 ‘연대‘의 감각 아닐까. 망했다는 생각에 손마저얼어붙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순간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나는 손들 같은 것. 그 손들이 누군가를 필요한형태로 만들어가는 과정 같은 것. 등 뒤로 따뜻한 눈빛들을 가득 품고 살짝 펴보는 어깨 같은 것. 누군가 박살날까 봐 걱정될 때 가만있지 못하는 것. _ 비행기는 괜찮았어 중 - P152
녹우당에서의 낙향 후 2년이 조금 지나 윤두서는 세상을 뜬다. 그의 시 <전가서사>에서처럼 현실이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에게는 그것을 뒤집을 만한 결정적인 힘이 없었다. 그는양반 출신이었으며, 남인이라는 굴레조차 그에게는 버리기 힘든 기득권이었을 것이다. 변혁의 필요성은 인정하되, 변혁 운동의 주체가될 수 없는 선비 지식인 집단의 한가운데 윤두서 또한 서 있었으리라. 물론 고통의 질과 양에서 충분히 남다를 수 있다는 진단은 언제든지 가능하다. _ 변혁기 지식인의 두 초상 중 - P116
백련사의 동백꽃들이 우리를 마중했다. 따뜻한 바람 속에 이따금떨어지는 붉은 꽃잎들이 감미로웠다. 존경하는 스승을 위해 계율을팽개치는 물고기를 잡은 옛 스님의 자취는 이제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그 스님 또한 패러다임의 변경을 꾀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요사채 한쪽 귀에 매화가 꽃등을 켜고 있었다. 아득한 그 향기가 홀연 정신을 앗아갔다. 취하면 안 돼. 두꺼비나 지렁이가 되어서는 안 돼. 동백숲 속에서 으스스 바람이 일어섰다. _ 변혁기 지식인의 두 초상 중 - P124
새벽이 오고 있다. 가식과 위선으로 가득 찬 스스로의 내면들을정비하지 않고서는 만날 수 없는 빛살. 조급해질 때마다 난 비센테알레익산드레를 읽는다. 앞으로도 몇 번을 더 읽게 될 것이다. 날이완전히 새기 전에 바다에 나가리라. 이 새벽, 먼 바다로 나가는 배가있다면 주저하지 않고 그 배에 오르리라. _ 미조 포구에서의 딻은 하룻밤의 기록 중 - P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