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지쳤고 쉽게 엉망이 되었다. 그래도 내가 지키고 싶었던 것들을 열렬히 지키고 싶어 했다. 균형을 찾기 위해 자주 어금니를 깨물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시간은 이를 악물고 가장 열심히 산 시간이라는 것을 여기 모인 글들을 쓰는 동안 알게 되었다. _ 책머리에 - P5
엄마에 대해서 이제 나는 거짓말처럼 아무 생각이 없다.가끔 그립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엄마의 무엇을 그리워하는 것인지 자문하면, 그 무엇인가는 텅 비어 있는 느낌이다. 이유가 텅 빈 그리움에 대해서 나는 잘 알고 있다. 그저 그리움일 뿐이다. _ 엄마를 끝낸 엄마 중 - P20
나는 아픈 사람을 아픈 사람으로 대하지 않았다. 무능했지만 무해했던 아빠와 자주 비교했다. 같은 무능이었어도 엄마의 무능은 유해했다고 확신했다. _ 엄마를 끝낸 엄마 중 - P23
엄마가 입을 크게 벌리고 내가 만든 음식들을 드시는것을 보면서 나는 부지불식간에 딸을 대하는 듯한 말투를 사용하고 있었다. 너무 많이 늙어버린 엄마와 함께 늙어가고 있는 큰딸은 서로를 너무 가엾게만 여겼지만, 내가 만든 음식을 엄마가 먹던, 그렇게 관계가 뒤바뀌는 시간이 우리에게 왔던 것이 새삼스러워서 나는 입을 채 다물지 못한 채로 엄마를 바라보았다. _ 입이 있다는 것 중 - P32
함께 걷던 사람에게 꼭 한 번은 듣게 되는 말이다. 나는하염없이 걷는 것을 좋아하고, 하염없이 걷다 보면 걷는다는 것도 잊게 되는 것을 좋아하고, 걷는 걸 잊었으니 쉬고싶다는 마음도 잊게 되는 무아지경의 걷기를 좋아한다. 아무리 걸어도 피로를 모르지만 피로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알아차릴 줄을 모를 뿐. 함께 걷던 사람이 반 발짝 뒤에서내 옷소매를 끌어당기며 쉬자고 말할 때에야 나는 피로감을 잊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다. 마침 쉴 만한 바위나 벤치같은 것을 발견하고 다가가서 앉는다. 걸어서 그곳에 가기 중 - P45
처음 가본 골목의 계단참에 앉아 친구와 이야기를 나눈날 밤, 나는 옆 침대에서 죽은 사람처럼 잠든 친구의 등 돌린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중에 꼭 시로 써보리라 생각하며 메모를 했다. _ 걸어서 그곳에 가기 중 - P49
나는 언젠가부터 조금 다른 나의 의견과 일상과 나만의 발견은 그런 공간에 전시하지 않게 되었다. 모두들, 조금 다른 각자의 의견은 어딘가에 꽁꽁 숨겨두고 있을 것 같다. 모든 것을 알리는 듯하지만, 그만큼 각자의 비밀은 비대해지고 있는 것은 아닐지. 나도 비밀로 하고 싶은 것이 점점 많아져간다. 새로 알게 된 아름다운 장소. 나만의 비밀 장소가 되기를 바라며 발설하지 않는다. 그곳이 유명해지지 않기를, 그래서 변하지 않기를 바란다. 유명해진다고 해서 모두 쉬이 변해버리는 것은 아니지만, 자연스러운 그대로의 장소는 유독 쉬이 변해버리고 만다. _ 조금 다르기 중 - P53
장소라는 말과 공간이라는 말은 엄연히 구별된다. 장소는 시간이 부여해준 가치와 역사가 부여해준 이야기를 함께 담은, 고유한 이름이 있는 공간이다. 그 공간을 영위하는 한 개인의 양태들이 냄새처럼 고스란히 밴 곳이기도 하다. 장소는 유일하고 공간은 보편이다. 장소는 변화를 겪고 공간은 그대로다. 장소는 파괴되지 않지만 공간은 파괴될 수 있다. 지붕이 무너지고 벽이 허물어져도 그곳에 깃든 이야기마저 소멸시키지는 못한다는 점에서, 장소는 언제까지나 건재할 수 있다. 전쟁이 일어나고 한 도시가 파괴되어도, 재개발이 진행되어 한 지역이 송두리째 변해가도, 공간의 이미지만이 달라질 뿐 장소는 이야기를 꼭 붙들고 영원히 생명을 이어갈 수 있다. _ 장소애 중 - P61
장소에 대한 뒤늦은 나의 애착은 좋은 장소를 갈망하고그곳에 나를 두기를 욕망하는 것과 반대방향에 있다. 좋은장소가 아니라 문제적 장소, 헐벗은 장소, 사람들의 세간살림이 뻔히 다 들여다보이고 식구들의 양말과 티셔츠를 쪼르륵 내다 넌 빨래가 깃발처럼 펄럭이는 장소에 나의 애착이 가닿는다. 그곳에서라면 시간을 이야기라고 받아들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 자리를 나는 시의 장소라고 믿고 싶고 그곳에 거주하고 싶다. _ 장소애 중 - P72
그렇게 여러 가지 꽃나무가 있는 줄은몰랐다. 향기 짙은 흰 라일락을 비롯해서 보랏빛 아이리스, 불꽃 같은 영산홍, 간드러지게 요염한 유도화, 홍등가의 등불 같은 석류꽃, 숨가쁜 치자꽃, 그런 것들이 불온한 열정화기처럼 걷잡을 수 없이 분출했다. 이사하고 나서 조성한 정원이어서 그 남자도 이렇게 꽃이 잘 핀 건 처음 본다고 했다. 그런 꽃들을 분출시킨 참을 수 없는 힘은 남아돌아 주춧돌과 문짝까지 흔들어대는 듯 오래된 조선 기와집이 표류하는 배처럼 출렁였다. 우리는 서로 부둥켜안고 싶을 만큼 아슬아슬한 위기 의식을느꼈다. 돈 안 드는 사치는 이렇게 위험했다. _ 그 남자네 집 중 - P74
많은 사람들이 이른바 ‘주입식 교육‘을 비판하며 창의적인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아직 뇌가 굳어버리기전이라 외우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할 때 암기로 지식을 주입하는 일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대체 무엇을 토양 삼아 창의성이라는 꽃이 자라날 수 있을까? ‘창의적‘이라는 것은여러 연구 끝에 합의된 기본적인 지식을 소화해 바닥을 잘다진 다음 단계에서의 도약을 뜻하는 것이지, 허공으로 무작정 날아오르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런 ‘창의성‘은 영화 속에나 있다. _ 지식의 터를 잡는 시간들 중 - P131
내가 비록 그들의 고(高雅)한 기준에는 못 미치는 인간일지라도, 곁에 그런 이들이있다는 것만으로 자극이 되었고 눈이 트였다. 대학이라는 공간뿐 아니라 친구들 하나하나가 새롭고 귀한 세계였다. _ 또 다른 세계를 열어주는 문 중 - P144
뇌도 근육이라 잠들어 있던 부분을 인식하고 단련하면 힘이 생기기도 하는 것이다. _ 뇌도 근육처럼 간련하자 중 - P210
20여 년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아직도 조이스가어떤 메시지를 던지고자 했는지는 명확히 모르겠다. 그 모호함, 해답 없음, 그래서 계속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 『더블린 사람들』과 그 수업이 내게 준 가장 값진 가르침인 것 같기도 하다. 남에게 기대지 않고 혼자 거듭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나름의 답을 찾아가는 훈련을 하게 되었으니까. 명료한 답이 나오지 않아도 좋다. 이 지(知)의 여정은 나스스로 만족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_ 계속 생각하게 만드는 힘 중 - P163
꽃은 나에게 반응react 이 아니라 응답response 을 기다린다. - P14
또한 기억이나 회상에서 감정이 시작된다. 기억이나 회상이 과거의 것이라는 인지는 잘못되었다. 기억은 ‘이전의 인상이나 경험을 의식 속에 간직하거나 도로 생각해냄‘이고 회상은‘지난 일을 돌이켜 생각함‘이다. 그 시점은 언제나 바로 지금이다. 기억이나 회상은 지난 일에 대한 현재의 감정이다. - P16
중요한 것은 ‘나의‘이다. 나의 꽃, 나의 감정, 나의 느낌, 나의 기억…………. 그것들이 ‘나‘라는, 세상에 하나뿐인 개별성과 주체성, 고유성을 만든다. 이에 따른 논리로 만약 ‘나의‘ 기억, ‘나의‘ 감정, ‘나의‘ 느낌이 없다면 나의 사고, 나의 선택, 나의 판단, 나의 결정이 없고, 이에 따라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누구인지 알지도, 자신의 삶을 살지도 못 한다. 그래도 살기는 사는데 그 삶은 마치…….… ‘오리지널Original‘이 아니라 ‘보증 받은 복제품 Certified Copy‘이랄까. - P17
사람에게는 저마다 특히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것이 있는데 인지하든 못 하든 약점이거나 상처일것이다. 과하게 지신감 넘치거나 공격적인 것조차 아무렇지 않은 척의 과장이다. - P19
자신의 감정을 나에게만큼은 드러내자. 아닌 척하고, 그런 척하고, 그러고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기를 내려놓고 솔직해지자.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 P22
옹이가 내 삶의 무늬가 될 수 있을까?될 수 있다. 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그 옹이야말로 나의 삶을 세상에 유일한 작품으로 만들 수있다. - P25
감각기관은 눈, 귀, 코, 혀, 살갗 등을 가리키고 다른 말로다섯 가지 감각, ‘오관‘이라 한다. 오관을 통해 어떤 자극을알아차리는 것을 ‘감각‘이라고 하고 각각 시각(보기), 청각(듣기), 후각(냄새), 미각(맛), 촉각(접촉)이라 칭한다. 이 다섯 가지감각을 통틀어 ‘오감‘이라고 한다. - P29
다른 사람이 어떻게 느끼는지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느끼는지 오롯이 자기 내부의 감각에 집중해보자. 처음에는 어색하고 서투를 수 있으나 습관화하면 나를 내 삶의 중심에 세울 수있다. 하늘과 땅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 심지어 나와 나 사이를 유령처럼 떠도는 모호한 느낌이 차차 걷히고 감정과 느낌, 기억이 선명해질 것이다. 세상에 하나뿐인 나의 개별성과 주체성, 고유성을 갖추어가는 과정이다. - P32
심장이 뜨겁거나 따뜻하거나 차가워지고는 한다.이때의 느낌은 무슨 감정일까,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마음의 온도를 좌우하는 요소들로 안전과 사랑, 존중, 자아실현, 존재감, 재미, 멋 등이 있으며 충족되는 정도에 따라 기쁨, 평안, 재미, 후련함, 사랑 등을 반대로 수치감, 수심, 지루함, 압박감, 경멸 등을 느낀다. - P38
헤세를 사랑하게 되었다. 아니 존경하게 되었다. <정원일의 즐거움>이후에 오래간만에 만났던 헤세...올해 계속 그리고 틈나는대로 헤세를 만날 예정이다. 이 책을 읽으면 출생지(칼프)와 노년(몬타뇰라)에 있었던 헤세의 생활과 태도를 읽을 수 있다. 제 2부는 대표작(수레바퀴 밑에서,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데미안, 싯다르타)에서 무엇을 읽어야 하는지 고민을 던지고 해설을 하고 있다. 정여율 작가 <나를 돌보지 않는 나에게>이후 이 책을 만났다. 그 다음 책은 무엇으로 할지 설레고 있다. 나름 코드가 맞는 작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