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금니 깨물기 - 사랑을 온전히 보게 하는 방식
김소연 지음 / 마음산책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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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지쳤고 쉽게 엉망이 되었다. 그래도 내가 지키고 싶었던 것들을 열렬히 지키고 싶어 했다. 균형을 찾기 위해 자주 어금니를 깨물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시간은 이를 악물고 가장 열심히 산 시간이라는 것을 여기 모인 글들을 쓰는 동안 알게 되었다. _ 책머리에 - P5

엄마에 대해서 이제 나는 거짓말처럼 아무 생각이 없다.
가끔 그립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엄마의 무엇을 그리워하는 것인지 자문하면, 그 무엇인가는 텅 비어 있는 느낌이다. 이유가 텅 빈 그리움에 대해서 나는 잘 알고 있다. 그저 그리움일 뿐이다. _ 엄마를 끝낸 엄마 중 - P20

나는 아픈 사람을 아픈 사람으로 대하지 않았다. 무능했지만 무해했던 아빠와 자주 비교했다. 같은 무능이었어도 엄마의 무능은 유해했다고 확신했다. _ 엄마를 끝낸 엄마 중 - P23

엄마가 입을 크게 벌리고 내가 만든 음식들을 드시는것을 보면서 나는 부지불식간에 딸을 대하는 듯한 말투를 사용하고 있었다. 너무 많이 늙어버린 엄마와 함께 늙어가고 있는 큰딸은 서로를 너무 가엾게만 여겼지만, 내가 만든 음식을 엄마가 먹던, 그렇게 관계가 뒤바뀌는 시간이 우리에게 왔던 것이 새삼스러워서 나는 입을 채 다물지 못한 채로 엄마를 바라보았다. _ 입이 있다는 것 중 - P32

함께 걷던 사람에게 꼭 한 번은 듣게 되는 말이다. 나는하염없이 걷는 것을 좋아하고, 하염없이 걷다 보면 걷는다는 것도 잊게 되는 것을 좋아하고, 걷는 걸 잊었으니 쉬고싶다는 마음도 잊게 되는 무아지경의 걷기를 좋아한다. 아무리 걸어도 피로를 모르지만 피로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알아차릴 줄을 모를 뿐. 함께 걷던 사람이 반 발짝 뒤에서내 옷소매를 끌어당기며 쉬자고 말할 때에야 나는 피로감을 잊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다. 마침 쉴 만한 바위나 벤치같은 것을 발견하고 다가가서 앉는다. 걸어서 그곳에 가기 중 - P45

처음 가본 골목의 계단참에 앉아 친구와 이야기를 나눈날 밤, 나는 옆 침대에서 죽은 사람처럼 잠든 친구의 등 돌린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중에 꼭 시로 써보리라 생각하며 메모를 했다. _ 걸어서 그곳에 가기 중 - P49

나는 언젠가부터 조금 다른 나의 의견과 일상과 나만의 발견은 그런 공간에 전시하지 않게 되었다. 모두들, 조금 다른 각자의 의견은 어딘가에 꽁꽁 숨겨두고 있을 것 같다. 모든 것을 알리는 듯하지만, 그만큼 각자의 비밀은 비대해지고 있는 것은 아닐지. 나도 비밀로 하고 싶은 것이 점점 많아져간다. 새로 알게 된 아름다운 장소. 나만의 비밀 장소가 되기를 바라며 발설하지 않는다. 그곳이 유명해지지 않기를, 그래서 변하지 않기를 바란다. 유명해진다고 해서 모두 쉬이 변해버리는 것은 아니지만, 자연스러운 그대로의 장소는 유독 쉬이 변해버리고 만다. _ 조금 다르기 중 - P53

장소라는 말과 공간이라는 말은 엄연히 구별된다. 장소는 시간이 부여해준 가치와 역사가 부여해준 이야기를 함께 담은, 고유한 이름이 있는 공간이다. 그 공간을 영위하는 한 개인의 양태들이 냄새처럼 고스란히 밴 곳이기도 하다. 장소는 유일하고 공간은 보편이다. 장소는 변화를 겪고 공간은 그대로다. 장소는 파괴되지 않지만 공간은 파괴될 수 있다. 지붕이 무너지고 벽이 허물어져도 그곳에 깃든 이야기마저 소멸시키지는 못한다는 점에서, 장소는 언제까지나 건재할 수 있다. 전쟁이 일어나고 한 도시가 파괴되어도, 재개발이 진행되어 한 지역이 송두리째 변해가도, 공간의 이미지만이 달라질 뿐 장소는 이야기를 꼭 붙들고 영원히 생명을 이어갈 수 있다. _ 장소애 중 - P61

장소에 대한 뒤늦은 나의 애착은 좋은 장소를 갈망하고그곳에 나를 두기를 욕망하는 것과 반대방향에 있다. 좋은장소가 아니라 문제적 장소, 헐벗은 장소, 사람들의 세간살림이 뻔히 다 들여다보이고 식구들의 양말과 티셔츠를 쪼르륵 내다 넌 빨래가 깃발처럼 펄럭이는 장소에 나의 애착이 가닿는다. 그곳에서라면 시간을 이야기라고 받아들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 자리를 나는 시의 장소라고 믿고 싶고 그곳에 거주하고 싶다. _ 장소애 중 -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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