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레나에게는 그 구심점이 화장실수납장이었다. 로게르는 그걸 이해했다. 내력벽처럼 움직이지 않는 것의 소중함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런 물건은 나에게 맞출수 없고 내가 거기에 맞추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로게르는 항상 이사할 때마다 제일 마지막으로 화장실 수납장을 분해하고새 집에 가서 제일 먼저 설치했다. 그런 방식으로 그녀를 사랑했다. - P222
우리보다 잘났다고 생각하는 인간들, 대출 신청을 거부하는 은행원, 수면제만 있으면 되는데 자꾸 뭘 묻는 심리 상담사, 개조해서 살지 못하게 아파트를 훔쳐 가는 노인, 아내를 훔쳐 가는 토끼. 우리를 보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며 우리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모든 사람, 누구나 살다보면 스톡홀름 출신을 만나고 심지어 스톡홀름 출신에게도 그들 나름의 스톡홀름 출신이 있다. 그들에게는 ‘뉴욕에 사는 사람들’이거나 ‘브뤼셀의 정치인‘ 이거나 스톡홀름 출신들보다 더 심하게 제 잘난 맛에 사는 인간들이 있을 뿐이다. - P229
"용서해주세요." 은행 강도가 그들 위로 내려앉은 정적을 불쑥 깨고 말했다. 처음에는 아무도 못 들은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모두 들었다. 얇은 벽과 그 빌어먹을 오픈 플랜식 배치 덕분에 그가 한 말이 벽장 안, 현관홀, 화장실 문 너머에까지 들렸다. 그들은 공통점이 많지 않았지만 실수를 저지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모두 알았다. - P230
"죄송합니다." 은행 강도가 아까보다 더 가녀린 목소리로 말했고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시작됐다. 은행 강도가 아파트에서 탈출하게 된 사연이. 은행 강도는 그 말을 할 필요가 있었고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누군가를 용서해도 좋다는허락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두말하면 잔소리지만 ‘스톡홀름‘은 증후군이 될 수도 있다. - P231
아파트를 장만하는 것, 거기서 문제가 하나라도 발견되면 자기 잘못이라고 시인해야 하는 것. 요즘 들어서 로게르는 이걸 시인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다만 미치도록 화가 나서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을 뿐이다. 나이를 먹으면서, 가령 세상에 기여하는 능력이나 어떤 일을 할 수 있다고 사랑하는 사람을 속이는 능력같은 것을 잃어버리면 그렇게 되어버릴 수 있다. 그는 이제 안 나레나에게 간파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P244
남에게 종교는 주입할 수 있을지 몰라도 믿음은 가르칠 수 없기 때문이다. - P291
그들도 당연히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안다. 누군들 모를까. 중독자들이 약물에 중독됐다면 그들의 가족은 희망에 중독됐다. 희망을 붙잡고 매달린다. 그녀의 아버지는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오면 항상 그녀이길 바라지만, 그녀의 남동생은 항상 이번에야말로 누나의 부고를 알리는 전화일 거라고 확신하기 때문에 겁에 질린다. 자기 딸과 누나조차 건사하지 못하다. 니 무슨 경찰이 그럴까? 자기 피붙이도 건사하지 못하다니 무슨가족이 그럴까? 목사를 병에 걸리게 하다니 무슨 하느님이 그럴까? 장례식에 불참하다니 무슨 딸이 그럴까? - P292
다들 자신과 전혀다른 사람이 아니라 거의 다를 게 없는 사람과 가장 치열하게 싸우기 때문이다. - P300
진실은 무엇일까? 진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복잡한 경우가 거의 없다. 우리가 진실이 복잡하길 바라는 이유는 먼저 간파했을 때 남들보다 똑똑한 사람이 된 기분을 만끽할 수 있기때문이다. - P309
"아니에요. 그리고 예전에는 대출이라고 하면 갚아야 하는 거였잖아요. 하지만 요즘 중산층은 평생 모아도 감당하지 못할 액수를 대출받고 있고, 은행에서는 이제 돈을 빌려준다고 하지 않아요. 자금을 지원한다고 하지. 그리고 집은 이제 집이 아니에요. 투자 수단이지." - P317
다는 얘기도 하고 싶었다. 우리가 그 시스템을 너무 강력하게 만들었다고, 우리가 얼마나 욕심이 많은 존재인지 잊어버렸지만그보다도 우리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도 잊어버렸다고. 그것이 지금 우리를 박살 내고 있다고. - P344
사라에게 가장 짜증 나는 부분이그거였다. 남자들이 생각해낼 줄 아는 질문은 딱 두 개뿐이었다. "어떤 일을 하세요?" 아니면 "결혼하셨어요?" - P345
야크: 결국에는 이해가 안 되는 사람과 결혼하게 된다고, 그래놓고 평생 이해하려고 애를 쓰게 된다고 하셨거든요. - P356
에스텔은 보일락 말락 하게 미소를 지었다. 10대와 살아본 사람이라면 그들은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며, 그들의 부모는 일상의 여러 끔찍한 사태를 처리하고 아이들과 자신의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정신없다는 것을 안다. 그곳에 에스텔의 자리는 없었으니 그녀는 대개 성가신 존재였고, 그들은 그녀의 생일에 연락해 그녀가 전화를 받으면 기뻐했지만 나머지 기간에는그녀의 시간이 멈춰 있는 것처럼 여겼다. 그녀는 크리스마스와 한여름에만 꺼내는 보기 좋은 장식이었다. - P360
"어머니 말씀이 맞아요. 자기를 웃게 만드는 사람은 평생을 가죠." 에스텔은 거듭 강조하고, 세상에서 폭소와 유쾌한 분위기만큼 불가항력으로 전염성이 강한 것은 없다고 했던 영국 작가를 떠올렸다. 외로움은 굶주림과 같아서 뭘 먹기 시작한 다음에라야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 알 수 있다고 했던 미국 작가도 떠올렸다. - P371
하지만 현대사회와 인터넷이 우리에게 가르쳐준것이 하나 있다면 옳다고 해서 논쟁에서 이길 거라 기대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 P385
"안나레나한테 뭘 증명하려고 할 필요 없어요. 누구에게도 뭐든 증명하려고 할 필요 없어요. 당신은 그러지 않아도 충분히 훌륭해요." - P402
"맞아요, 바로 그거예요! 젊은 친구들에게는 모든 것이 처음사랑에 빠진 그 순간처럼 짜릿해야 하고, 그 어떤 것도 재미가없으면 안 되고, 집중력이 유지되는 시간이 반짝이 고무공을 가지고 노는 새끼 고양이 수준이죠." - P424
"우리 엄마는 늘 변명할 필요 없다고 했어요. 뭔가를 잘하는 것에 대해 미안해하지 말라고요." - P431
흔히 인간의 성격은 경험의 총합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게 전적으로 맞는 말은 아니다. 과거가 모든 것을 규정한다면 우리는 자기 자신을 절대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어제 저지른 실수들이 우리의 전부는 아니라고 자신할 수 있어야 한다. 앞으로의 선택, 다가올 미래도 우리의 전부라고 말이다. - P462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 한다. 밤을 새우고 다음 날에도 종일달린다. 그녀의 집 문을 두드린다. 그녀는 그들과 함께 집으로돌아갈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녀는 고향에서 더 좋은 해결책을 찾을 준비가 되어 있을 수도 있고, 이제는 날아오르는 느낌과 떨어지는 느낌 사이의 차이를 파악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런 건 사랑처럼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부분이다. 아이가 특정 나이까지 부모를 무조건적으로 걷잡을 수 없이 사랑하는 이유는 단 하나, 부모가 자기 것이기 때문이라는 말은 어쩌면 맞는 말일지 모른다. 부모와 형제자매가 당신을 평생 사랑할 수 있는 것도 똑같은 이유에서다.
진실, 세상에 진실은 없다. 우리가 우주의 경계에 대해 어찌어찌 알아낸 게 있다면 우주에는 경계가 없다는 것뿐이고, 신에 대해 아는 게 있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뿐이다. 따라서 목사였던 어머니가 가족들에게 요구한 것은 간단했다. 최선을 다하라는 것.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으라는 것. - P473
어쩌면 우리는 오늘 인파 속에서 허둥지둥 엇갈려 지나갔지만 서로 알아차리지 못했고, 당신이 입은 외투의 실오라기가 내가 입은 외투의 실오라기를 스친 순간 서로 멀어졌을지 모른다. 나는 당신이 누군지 모른다. 하지만 오늘 저녁에 집으로 돌아가거든, 오늘 하루가 끝나고 밤이 우리를 찾아오거든 심호흡을 한 번 하기 바란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보냈지 않은가. - P47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