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하루치의 낙담
박선영 지음 / 반비 / 202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항상 도피하는 사람은 도피를 꿈꾸지 않는다. 그냥 도피한다. 도망치고 싶지만 울면서 맞서는 사람들이 늘 도피를 열망한다. 그렇게 도망치고 싶었으면서도 나는 차마 그것을 결행하지 못했다. 머물기의 괴로움. 이것이 내 삶의 핵심 주제였다.

_ 프롤로그 중 - P7

유리병에 커다란 돌멩이를 집어넣는다. 하나 더 넣는다. 또 하나 넣는다. 하지만 병을 가득 채우지는 못한다. 틈새의 빈 공간들은 오로지 작은 모래들로만 채울 수 있다. 내 인생엔 그 모래들이 없었다. 커다란 돌멩이들만이 덜그덕거리고 있었다. 물론 모래만으로는 그 병을 다 채우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돌멩이만으로도 병은 채워지지 않는다.

_ 프롤로그 중 - P12

열정적 사익추구자에 대한 본능적 거부감. 내 협애한 마음의 장벽. 물론 돈 좋다. 엄청 좋다. 그렇지만 가장 좋지는 않다. 돈이 가장 좋은 사람은 나랑 안 된다. 돈은 아무리 좋아봐야 두 번째로 좋아야 하는 것이다. 당장 생존을 도모할 방도가없을 때가 아니고서야 돈이 가장 좋을 수는 없다.

_ 우리가 우직했던 순간들 중 - P38

미학의 정점에는 윤리가 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윤리적이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게까지 윤리적이지 못한 존재들이 그래도 윤리적이고자 온 힘을 쥐어짤 때, 부끄럽기 싫어서, 차마 부끄러울 수 없어서, 눈질끈 감고 옳은 일에 자신을 내던지는 어떤 숭고의 순간들을 나는 사랑한다. 누가 보든 말든(봐주면 더 보람차겠지만) 내게 이익이 되든 손해가 되든(이익이 되면 더 좋겠지만) 해야 할 일을 우직하게 하는 사람들, 하기로 약속한 일은 어쨌든 끝내 해내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이렇다 할 보상도 없다. 그 일을 우직하게 계속하고 있을 유인이 언제나 부족하다. 그렇지만 그들은 태생이 우직하므로 그렇게 우직하게 일생을 산다. 그들은 승리하지 못한다. 보상도 없이, 보람도 없이, 패배감 속에서, 그렇지만 그렇게 생겨 먹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들은 그렇게 산다. 나는 우직하고 싶지만 마냥 우직하기엔 약아 빠진 인간이라서, 언젠가는 흉내 내는 이짓마저도 때려치울 것 같아 불안한 마음이라서, 이런 사람들을 목격하게 될 때면 울면서 달려가 부둥켜안고만 싶다. 당신들에게 상을 주고 싶은데 내가 가진 것이 없네요.

_ 우리가 우직했던 순간들 중 - P52

하지 않은 일들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거기엔 보상이 없다. 고독한 길이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주목이라는 재화를 놓고 경쟁하는 시장이어서, 해선 안 될 일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얻는 게 없다. 누가 더 주목받는가의 경쟁에서 무서운 속도로 도태될 뿐이다.
한자리 차지하는 것이 중요하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만이 장땡이다. 어떻게 했는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길고 화려한 이력서가 없다면 너는 루저다. 세상은 당신이 하지 않은일 따위에는 아무 관심도 없답니다. 억울하면 출세하세요!

_ 하지 않은 일들, 하지 않은 말들 중 - P5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