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창비시선 237
김태정 지음 / 창비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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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밤 달은 없고
이름만 덩두렷한 망월에서
솟 솟쩍, 쓴 울음 삼키는 소리까지 적고 나니
당신께 보낼 것은 단지 슬픔밖에 없어
차라리 입을 다물고 맙니다

_ 내 손바닥 위의 숲 중 - P88

먼지바람 자욱한 비탈길을 내려오는데 문득 두려워졌다. 평지에 발을 딛는 순간 비탈 위의 기억들이 재가 되어버릴까봐. 때묻은 작업복과 해진 운동화, 문 닫힌 공장과 늦은 밤 미싱 소리, 낮은 골목길의 담배연기, 긴 축대끝의 달맞이꽃, 그의 눈빛만큼 고단했던 시절들이 먼지로 날아오를까봐.

_ 낯선 동행 중 - P93

보세요 당신
그 거친 손에서 달구어진 아이롱처럼
이밤사 순결하게 달아오른 별들을
따버린 실밥들이 하나 둘 쌓여갈 때마다
활발해지는 이 어둠의 풍화작용을
보세요, 땀방울 하나 헛되이 쓰지 않는 당신
누구의 땀과 폐활량으로 오늘밤
하늘의 사막에 별이 뜨는지

_ 해창물산 경자언니에게 중 - P97

또한 거부해다오 밥이여
못나고 순해진 느이들끼리 스크럼을 짜고
룸펜의 아가리를 거부하는 주먹밥의 몸짓으로
오늘은 시궁창에 버려진 쉰밥이 될지언정
오늘은 오늘만큼은

_ 거식증 중 - P101

그러나 만약 이쯤에서
적당히 물을 갈아주고 싶다면
고단한 지느러미의 노동 그만 쉬게 해주고 싶다면
너는 또 뭐라고 비웃을 거냐
타협과 갈등은 유리 한장 차이라고?
변절은 그렇듯이 손바닥 뒤집기라고?

_ 물 속의 비늘 중 - P103

숲이 숲을 불러
메아리가 메아리를 불러
굶주림이 굶주림을 불러

이 저녁 허기진 밥상 위에
따뜻한 고봉밥으로 숲을 이룬 산이여

_ 산 중 - P105

이것도 보릿고개 덕이라면 덕이겠다
궁핍이 나로 하여 글을 쓰게 하니
궁핍이 글로 하여 나를 살게 하니
가난은 어쩔 수 없는 나의 조력자인가

_ 궁핍이 나로 하여 중 - P111

배가 불러 텔레비전도 둥글게 보이는 아홉시에는
아직 잠들기 아까운 아홉시에는
심심한 시나 한편 써야겠다
실밥 따는 아줌마 혹은
꼬마 시다의 노동을 엿보는
언어의 프락치나 돼야겠다 배부른 아홉시에는

_ 배부른 아홉시에는 중 -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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