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창비시선 237
김태정 지음 / 창비 / 200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여덟 남매를 낳으셨다는 할머니
애기집만큼 헐거워진 뒤란에서
태아처럼
바깥세상을 꿈꾸는 태아처럼 웅크려 앉아
시간도 마음도 놓아버리고 웅크려 앉아
차랍차랍 누렁이 밥 먹는 소릴 듣는

해남하고도 송지면 달마산 아래
늙고 헐거워져 편안한 윤씨댁 뒤란은
이 세상이 이 세상 같지 않고
오늘밤이 오늘밤 같지 않고

_ 달마의 뒤란 중 - P56

그때 우리 다만, 저수지 둑 위에 앉아 있었던가
달빛이 너와 나 사이
비밀경전처럼 내밀한 경계를 이루고
어둠을 완성하는 너의 침묵과
달빛을 갈망하는 나의 결핍 사이
깊이 감춰 텅 빈 것은 저수지만이 아니어서

_ 서정저수지 중 - P59

삶의 안간힘 끝에 문득 찾아오는
환하고 쓸쓸한 꽃바구니 같은

_ 동백꽃 피는 해우스 중 - P61

삼십칠년이란 세월을 내 이름 속에서 헤매듯 봄산에서 한때, 길을 잃은 적이 있었습니다 길을 찾아헤매는 내 발자국이 길 위에 길을 보태었다는 걸, 산을 내려온 뒤에야 알았습니다

_ 봄산 중 - P69

세상은 다시 달빛 속에 고요로워 한시절
동백나무 그늘 속에 깃들고 싶었습니다
영영 나가지 말았으면 싶었습니다

_ 동백나무 그늘에 숨어 중 - P71

길들여지지 않은 새들이
빗속으로 날개를 들이민다
한기 속에 들어서야
비로소 온기를 얻는 깃털
저들을 날게 하는 건
날개의 힘만이 아니라는 듯

_ 내유리 길목 중 - P72

열차에 발을 올려놓으며
잊지 않았다는 듯 뒤돌아보는 - P73

네 뼈로 내 뼈를 세우리
네 살로 내 살을 보태리
네 몸을 이루는 바다로
삶의 부력(力)을 완성하리
은빛 비늘의 눈부심으로
무디어진 내 눈물을 벼리리
어느날 문득 육지를 보아버린
네 그리움으로
메마른 서정을 적시리

_ 멸치 중 - P76

상처를 헤집듯
배추를 뒤집으며
나는 그 날 것의 자존심을
한입 베물어본다

_ 배추 절이기 중 - P79

청매화차라니
달콤하고 은은한 향기의 청매화차라니
삶이 초봄의 몸살 같은 마흔은
향기를 피워올리는 꽃잎의
쓰디쓴 맛을 사랑할 나이

_ 향기를 피워올리는 꽃은 쓰다 중 - P81

원효봉은 멀어서 더욱 가고 싶은 곳
저 먼발치에 도달하기 위한 산행은
차라리 멀리 우회해야 하는 것
삶에 이르기 위해 삶은
이토록 한시절을 돌아가야 하는 것

_ 에움길 중 - P8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