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남매를 낳으셨다는 할머니 애기집만큼 헐거워진 뒤란에서 태아처럼 바깥세상을 꿈꾸는 태아처럼 웅크려 앉아 시간도 마음도 놓아버리고 웅크려 앉아 차랍차랍 누렁이 밥 먹는 소릴 듣는
해남하고도 송지면 달마산 아래 늙고 헐거워져 편안한 윤씨댁 뒤란은 이 세상이 이 세상 같지 않고 오늘밤이 오늘밤 같지 않고
_ 달마의 뒤란 중 - P56
그때 우리 다만, 저수지 둑 위에 앉아 있었던가 달빛이 너와 나 사이 비밀경전처럼 내밀한 경계를 이루고 어둠을 완성하는 너의 침묵과 달빛을 갈망하는 나의 결핍 사이 깊이 감춰 텅 빈 것은 저수지만이 아니어서
_ 서정저수지 중 - P59
삶의 안간힘 끝에 문득 찾아오는 환하고 쓸쓸한 꽃바구니 같은
_ 동백꽃 피는 해우스 중 - P61
삼십칠년이란 세월을 내 이름 속에서 헤매듯 봄산에서 한때, 길을 잃은 적이 있었습니다 길을 찾아헤매는 내 발자국이 길 위에 길을 보태었다는 걸, 산을 내려온 뒤에야 알았습니다
_ 봄산 중 - P69
세상은 다시 달빛 속에 고요로워 한시절 동백나무 그늘 속에 깃들고 싶었습니다 영영 나가지 말았으면 싶었습니다
_ 동백나무 그늘에 숨어 중 - P71
길들여지지 않은 새들이 빗속으로 날개를 들이민다 한기 속에 들어서야 비로소 온기를 얻는 깃털 저들을 날게 하는 건 날개의 힘만이 아니라는 듯
_ 내유리 길목 중 - P72
열차에 발을 올려놓으며 잊지 않았다는 듯 뒤돌아보는 - P73
네 뼈로 내 뼈를 세우리 네 살로 내 살을 보태리 네 몸을 이루는 바다로 삶의 부력(力)을 완성하리 은빛 비늘의 눈부심으로 무디어진 내 눈물을 벼리리 어느날 문득 육지를 보아버린 네 그리움으로 메마른 서정을 적시리
_ 멸치 중 - P76
상처를 헤집듯 배추를 뒤집으며 나는 그 날 것의 자존심을 한입 베물어본다
_ 배추 절이기 중 - P79
청매화차라니 달콤하고 은은한 향기의 청매화차라니 삶이 초봄의 몸살 같은 마흔은 향기를 피워올리는 꽃잎의 쓰디쓴 맛을 사랑할 나이
_ 향기를 피워올리는 꽃은 쓰다 중 - P81
원효봉은 멀어서 더욱 가고 싶은 곳 저 먼발치에 도달하기 위한 산행은 차라리 멀리 우회해야 하는 것 삶에 이르기 위해 삶은 이토록 한시절을 돌아가야 하는 것
_ 에움길 중 -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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