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직후 청년들 사이에 일어난 축구 열풍도 반일 정서와 무관치않았다. 평안남도 안주군 농업학교 학생 명재천(17)의 일상은 해방과함께 큰 변화를 맞았다. 그는 하루도 거르지 않던 철봉을 그만두고갑자기 축구에 빠져 지내기 시작했다. 사실 일제 당국은 조선 청년들에게 기계체조를 강권하며, 장차 전쟁에 동원될 그들의 체력 향상을피해왔다. 철봉에 재능이 있었던 명재천도 그 영향을 받아 기계체조 꾀해왔다. - P112
자연발생적 대중조직 건설 운동의 참여자들은 모두가 새 국가 건설의 주인공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에 이어 조직 건설 운동을 주도한 공산당은 대중을 동원의 대상으로 바라보았다. - P136
해방과 함께 그동안 억눌려온 조선인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분노의 표적은 일본인들과 친일파였다. 그러나 조선인들을 억압하며 일제에 협력한 이들을 모두 처벌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조선인들 가운데 일제시기 공직을 독점했던 그들 대다수가 새 국가 건설에 필요한 식자층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친일 혐의가 경미한 생계형 부역자들은 면죄부를 받을 수 있었다. 북한은 현실 여건을 고려해 일제시기 인적 잔재를 청산한 반면, 물질적·문화적 잔재의 청산에 대해서는 결코 타협의 여지를 보이지 않았다. - P163
북한의 과거 청산 대상은 친일파와 일제에 협력한 공직자층에 국한되지 않았다. 인적 잔재뿐만 아니라 물질적·문화적 잔재들도 모조리 척결 대상에 포함되었다. 이를테면 일본 서적·복식과 함께 일본식용어 · 노래 등이 그 구체적 예에 속했다. 교육분야는 일제 잔재가 깊이 뿌리박혀 있었던 부문들 가운데 하나였다. 어린 시절 일제의 교육을 받았던 함경북도 경성인민학교 교사 유창훈(19)은 "일제 잔재에 물든 자신이 부지불식간에 어린이들을 잘못 인도하는 죄악을 저지르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어린 학생들에게도 주의를 환기시킬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그는 급훈을 "일제 잔재 숙청"으로 정했다. -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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