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들의 시간 창비시선 494
김해자 지음 / 창비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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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복(喪服)

묵은눈이 밤새 마술처럼 사라진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어제오늘 내린 눈도 아니고 도둑눈 가랑눈 떡눈 진눈
눈이란 눈들이 한자리 차지하고 쇠눈 숫눈 생눈 사태눈
겨우내 쌓이고 얼어 돌탑이 된 얼음덩이가
한순간에 녹아버린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두부 속으로 들어간 혀처럼 눈 속으로 슬며시 잠입한
뜨거운 입김들의 깊숙한 혁명을
아이스크림 한 입 베어 먹고 언제 그랬냐는 듯
시치미 떼고 언덕배기로 냅다 달리는
눈물투성이 밀사들,
꽝꽝 얼어붙은 눈은 속에서부터 스러진다
층층이 쌓여온 눈은 밑에서부터 삭아내린다
어느 날 갑자기 폭삭 주저앉는다 그제야
여기저기서 상복 벗어 던지는 소리
들판이 새파랗게 술렁인다
봄이 일어선다 - P112

볼링공 굴리듯 흩어진 짱돌 살살 굴려주던 퇴근길 넥타이들처럼, 또다른 눈물들이 받쳐주고 올라서며 저물녘 책들이시를 쓰는데, 부서진 미래, 이봐 내 나라를 돌려줘!, 끝없이열리는 문들, 지옥에 이르지 않기 위하여,

태풍보다 먼저 올라온 비에 매화나무는 젖는데, 지하도는 물에 잠기는데, 집이 떠내려가는데, 구명조끼도 없는들이 울부짖으며,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 디디의 우산, 아부알리 죽지 마, 인간의 시간,

책 한권 없는 일곱살 아이가 언니 오빠 미술책 읽듯 어머니 학교, 아배 생각, 씨앗 하나가 오이가 되기까지 나는 여기가 좋다, 마을이 세계를 구한다, 오래된 미래......

_ 또다른 눈물 중 -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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