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과 타자기 - 한글 기계화의 기술, 미학, 역사
김태호 지음 / 역사비평사 / 202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타자기는 기술사에서 여러 차례 다루어진 주제 중 하나다. 서구의 언어생활을 크게 바꾸어놓았을 뿐 아니라 그 설계와 생산측면에서 미국식 기계공업의 전범을 보여주었다는 점, 또 사회적으로는 20세기 초 여성의 사회 진출의 실마리를 마련했다는 점 등에서 타자기는 매우 흥미로운 주제였다. 또한 타자기는 대량생산, 표준(화), 그리고 기술의 잠금(lock-in) 효과 등 기술사를 관통하는 주제들과도 연결되어 있었으므로, 많은 이들이 여러 각도에서 타자와 타자기의 역사를 연구해왔다. - P13

앞서 언급했듯이, 타자기의 대량생산은 미국 기계공업의 발전, 그중에서도호환식 부품의 보급 덕을 보았다. 예컨대 레밍턴 사는 타자기 생산에 손을 대기 전에 이미 총기와 재봉틀 등을 생산하며 자리를 잡은 제조업체였다. 이들제품을 양산하며 쌓인 경험은 타자기 생산에 곧바로 적용되었고, 거기에 여러업체의 경쟁이 더해지면서 타자기는 더 값싸게 더 많은 사용자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 P35

타자기의 시대는 저물었지만, 타자기의 유산은 여러 곳에 남아 있다. 특히키보드라는 입력장치는 타자기 이외에도 텔레타이프, 라이노타이프, 컴퓨터, 심지어 스마트폰까지, 문자를 입력하는 거의 모든 장치에 활용되었다. 컴퓨터 키보드에 남아 있는 ‘시프트‘, ‘리턴‘, ‘탭‘ 같은 이름들도 기계식 타자기 시대의유산이며, 전자메일에서 참조 수신자를 지정할 때 쓰는 ‘라는 표현도 먹지로복제한 사본(carbon copy)을 보내던 타자기 문화의 흔적이다. - P36

그런데 한자 없이 가나 또는 한글로만 글을 쓰면, 같은 일본어 또는 한국어문장이라도 의미 파악이 어려워진다. 한자에서 시선을 잠시 멈추며 의미를 파악하는 식으로 눈이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나 또는 한글로만 글을 쓸 때는 로마자와 마찬가지로 띄어 쓰는 편이 의미를 파악하기가 편하다. 실제로 현대 한국에서 띄어쓰기가 정착된 뒤에야 한글 전용(用)이 가능해졌다는 사실은 이를 잘 보여준다. - P42

그럼에도 불구하고 밍콰이 타자기의 도전은 부분적으로나마 이후 한자기계화에 유산으로 남았다. 앞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오늘날 대다수의 사용자들은 컴퓨터나 스마트폰 등에 중국어(한자)를 입력할 때 한어병음기호로 발음을 입력한다. 그리고 다음 단계로, 기계가 보여주는 발음이 같은 글자나 단어가운데 내가 원하는 것을 골라 입력을 마친다. 이렇게 목록을 좁혀 나가 원하는 글자를 찾아 입력하는 것을 중국어로는 ‘수입(入슈루)‘이라고 하는데, 린위탕의 밍콰이 타자기는 기계식 메커니즘으로 한자를 ‘수입‘하려 했던 시도라는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 - P58

첫째로 한국은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한자와 결별하고 한글로만 쓰는 타자기를 만들었으며, 둘째로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로마자 타자기와 같은 구조의 타자기를 만들었다. 결과론이지만, 일본과 중국이로마자 타자기와 다른 타자기를 만들어 한자를 안고 가는 데 성공했다면, 한국은 반대로 ‘로마자 타자기와 같은 형태의 타자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목표에 매진하여 결국 성공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 P60

아예 로마자처럼 가로로 쓰고 가로로 읽는 타자기를 만든다면 이런 문제는 간단히 해결될 터였다. 하지만 가로쓰기 타자기가 성공하려면 가로로 쓴문서를 기꺼이 읽을 독자가 있어야 했다. 글을 세로로 쓰고 읽는 것은 한국의 독자들에게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세로로 쓰는 한문의 전통을 따라 한글도 세로로 쓰도록 발전해왔고, 일제강점기에도 세로로 쓴 일문이 공식적으로 통용되었다. 따라서 가로쓰기는 단순한 개인의 취향이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글에 대한 관념과 인식의 틀을 바꾸는 혁명적 변화였다. - P70

또한 앞서 언급했듯이 한글 타자기를 만들기 위해 해결해야 하는 과제는기술적인 것만이 아니었다. 모아쓰기, 가로쓰기, 한글 전용 가운데 기술자나 발명가의 힘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모아쓰기 메커니즘을 고안하는 것 정도다. 가로쓰기나 한글 전용은 한글을 어떻게 쓸 것이냐는 사회적·문화적 합의에 따라 결정되는 문제이므로 기술자나 발명가 개인의 역량만으로는 해결할수 없었다. 로마자 타자기는 로마자 사용자들이 글을 쓰던 방식을 그대로 기계에 옮겨 만들었다. 따라서 로마자의 기계화가 로마자로 글을 쓰는 방식을 바꾸도록 강요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로마자 타자기를 개조하여 만든 한글 타자기는 한글사용자들이 글을 쓰던 종래의 방식과 잘 맞지 않았다. 이미 존재하는글쓰기의 형태를 기계에 옮긴 영문 타자기와 달리, 한글 타자기를 도입하기 위해서는 글쓰기의 양상 자체가 바뀌어야 했던 것이다. - P9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