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일 조선인 노동자들의 집단 거주지는 1934년에만 11개 소나 되었다. 고이시가와의 속칭 ‘태양이 없는 거리를 비롯하여도쿄 도살장 부근의 조선촌, 후카가와 유곽 근처에 있던 적심단 바라크 등으로, 당연히 비위생적이고 불결한 환경으로도 악명이 높았다.
_ 붉은 도코 중 - P243
송영의 이런 식의 계급주의적 국제주의는 1928년 2월에 있었던 코민테른의 결정, 즉 부르주아는 결코 진보적일 수 없기때문에 통일전선의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무산계급만으로 철저히 비합법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는 노선 전환에 선을 대고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전술은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무시한 관념성을 비판받게 되며, 또 장차 그가 일제 말 친일 협력으로 나아가게 될 때에도 시간을 거슬러 어떤 먼 단초인 양 의심을 받기도 한다. - P257
이상이 도쿄에서 묵었던 하숙의 주소는 간다구 진보쵸정 3정목 101-4 이시가와 방이었다. 구단 아래 꼬부라진 뒷골목 2층 골방, 이상은 거기서 각혈을 쏟아내면서도 쉬지 않고 글을 썼다. 「실화」는 물론 「종생기」, 「권태」, 「봉별기」가 다 그곳에서그의 죽음을 먹고 탄생했다. 한국 문학사의 슬픈 역사였다.
_ 참 치사스러운 도쿄 중 - P272
그게 바로 학살이었다. "일본인이 일본인이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할 수 없는 장에서, 일본인은 폭력을 행사했다. 왜냐하면 스스로가 일본인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단이 ‘일본인의 적‘으로 보이는 사람을 죽이는 일뿐이었기 때문이다.
_ 모멸의 시대 중 - P276
도쿄의 조선인은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는 가운데 그렇게 일제 강점기의 막바지 몇년을 더 버텼다. 그들 중 상당수가 장차 이른바 ‘재일‘ 즉 ‘자이니치‘의 주요 구성원이 될 터였다.
_ ‘재일’의 탄생 중 - P301
그러나 이제 그는 지난 시절의 그 모든 ‘이광수‘가 아니라 성을 새로 만들고 이름도 바꾸어 ‘가야마 미쓰로‘로서 처음 황도를 밟은 거였다. ‘나는 이제 오직 천황의 신민일진저, 내 자손도 대대손손 천황의 신민으로 살리라.‘
_ 도쿄의 절정 중 - P318
그는 『법화경』을 잘 읽었다. 읽지 않았다 하더라도 진작 알고있었다. 일체 분별을 다 내려놓는 날이 곧 깨닫는 날이라는 사실을. 그렇다. 일본도 없고 조선도 없다. 일본어면 어떻고 조선어면 어떤가. 이광수면 어떻고 가야마 미쓰면 어떤가. 이처럼 한 경지에 이른 이광수와 달리 조선의 많은 문학인들은 현실의 측면에서 ‘말‘을 두고 쟁투를 벌였다.
_ 도쿄의 황혼, 조선어와 일본어 중 - P33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