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수동에서 사람들은 서로 갈등하고, 배우자 몰래 바람을 피우며, 병에 걸린다. 법을 슬쩍, 혹은 대담하게 어기는 사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수동은 풍경이 아름답고, 선량하고 양식 있는 사람들이 사는, 사랑스러운 동네다. 그런 동네의 골목과 거리는 어떤 풍경일까. 그곳 사람들은 어디로 출근하고 생활용품을 어떻게 살까. 어떤 길에서 개를 산책시키고, 저녁을 먹고 나면 어디에 갈까. 주말에는 뭘 할까. 아이들은 어디에서 놀까. 일하고 쇼핑하고 식사하고 수다를 떨 때 현수동 주민들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런 궁리를 하다 보면 상상 속의 동네를 현실에서 만들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게되고, 이념과 논리에 골몰한 동안에는 놓치기 쉬운 유용한 통찰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_ 블라디마르 일리치 레닌은 어떤 동네에 살고 싶었던 걸까 중 - P16
가로막는 게 있으면 밀고 깎아서 평탄하게 만들거나 터널을 뚫거나 다리를 놓는 요즘과 달리, 오래된 길들은 그렇게 산, 강, 언덕, 고개의 영향을 받아 생겼다. 그래서 반듯하지 않다. 오래된 동네의 길은 구불구불하고, 구힉은 직사직형이 아니다. 경사 지대가 있고 미로 같은 골목이 있다. 광흥창역 일대도 그렇다.
_ 고향이 없는 사람이 쓴 현수동의 역사 중 - P27
현수동은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삶을 기리는 동네다. 갑남을녀가 웃었던 현장을 소중히 여긴다. 그들이 눈물 흘렸던 현장을 기억한다. 마을기록활동가들이 모임을 만들고 구술사를 채집해서 작은 정기간행물을 낸다. 수원 화성 주민들이 만드는 골목잡지 「사이다』 같은.
_ 권력이 없는 사람이 쓴 현수동의 인물 중 - P48
그런 전승들을 둘러싸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사항들은 이렇다.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 대부분은 지배계층이 아니라 지배를 받는 계층이었다는 사실. 그들이 지배계층을 원망하고 두려워했다는 사실. 하지만 새로운 세상이라는 전망을 감당할 정도로 담대하지는 못해서, 비극적인 꿈으로 타협했다는 사실.
_ 무속을 질색하는 사람이 쓴 현수동의 전설 중 - P60
나는 무속이라면 질색하는 사람이다. 모든 종류의 미신을 적으로 삼고 있다. 각종 음모론과 괴담 같은 현대의 미신까지 포함해서. 하지만 공민왕사당이나 밤섬부군당을 없애야 한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런 장소와 풍습이 있어서 현수동이 더 풍요로워진다고 느낀다. 여기에 해결 불가능한 모순이 있다. 사실과 논리를 무엇보다 존중하고, 인간 사회가 이성에 의해 움직여야 한다고 굳게 믿으면서도, 세계와 삶에 이성으로 풀지 못하는 수수께끼가 있기를 바란다. 초자연적인 현상에 매료되면서도, 그 현상을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_ 무속을 질색하는 사람이 쓴 현수동의 전설 중 - P71
지녀야 한다. 현수동 주민들은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방식으로 그곳에 들어가 예식을 치르고 공간을 가꾸며, 대신 그 장소는 공동체가 추구하는 가치의 상징이자 구심력이 된다. 현대사회가 지금 함부로 대하지 않는 대상, 중심에 둔 가치는 아마 인권일 것이다. 물론 그것은 더없이 소중하고 고귀한 가치다. 하지만 인간의 권리외에도 우리가 공경하고 두려워해야 할 것들이 많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너무 많이 잃어버렸다.
_ 밤섬에 가본 적 없는 사람이 쓴 현수동의 밤섬 중 - P87
일과 삶의 공간이 멀어지고, 각각의 공간이 규정한 목적에 맞춰 행동하는 동안 일과 삶의 의미는 양쪽 모두 협소해진다. 자신이 사는동네를 자세히 알아야 할 필요가 없으며, 이웃은 층간소음이나 일으키지 않으면 다행인 존재로 전락한다. 시속 80킬로미터로 달리면 한 시간 안에 갈 수있는 지역이 이론적으로는 2만여 제곱킬로미터에 이른다. 서울시 면적의 33배가 넘는다. 우리는 그 안에서 제일 멋진 식당에 가서 사람을 만나고 음식을 먹고 사진을 찍고 돌아오면서 ‘집을 떠나 근사하게 시간하게 보냈다‘고 생각한다. 그런 기동성과 지역공동체는 양립할 수 없다.
_ 차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쓴 현수동의 교통 중 - P98
문제는 저속이 아니라 감속이다. 현대문명의 콘셉트가 가속이기에, 많은 현대인에게 생활방식을 저속으로 바꾸자는 제안은 낭만적인 헛소리로 들린다. 지금 우리에게 가속은 부, 경쟁, 성공과 동의어다. 더 빨리 달리는 자, 더 빨리 목적지에 이르는 사람이 남들보다 더 많이 가진다. 우리는 그런 세계관에 푹 젖어 있고, 실제로 세계 주요 도시에서 사람들이 걷는속도가 점점 더 빨라지고 있다.
_ 차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쓴 현수동의 교통 중 - P103
어떤 이들은 재생과 부활을 말하기도 한다. 도시재생이라는 단어는 듣기에는 그럴싸한데 실체는 애매해서, 담론은 무성하지만 합의는 별로 없다. 경리단길처럼 성공 사례로 꼽혔던 곳이 순식간에 몰락하기도 한다. 사람들이 모여서 만드는 복잡한 네트워크에 대한 우리의 삶이 중세시대 의학 수준이 아닐까싶기도 하다. 도시계획가들은 중세시대 의사들처럼 대상을 터무니없이 모르면서 자신만만하게 외과수술에 나서는 것 아닐까.
_ 맛을 모르는 사람이 쓴 현수동의 상권 중 - P113
즉 현수동 식당과 술집, 상점들은 주로 현수동 주민들을 상대로 장사를 한다. 현수동 상인들은 그런 영업으로도 충분히 이윤을 거둔다. 그래서 그들은 절박한 표정이나 비굴한 미소를 짓지 않아도 된다. 글쎄, 특색 있는 동네 축제가 있어서 그런 때 잠시 거리가 왁자지껄해지고 외부인들이 와서 돈을 쓰고 갈 수는 있겠다. 그러니 현수동에서는 마음에 쏙 드는 바가 없다면 참아야 한다. 그리고 그곳 생활물가 또한그렇게 낮지 않을 것이다.
_ 맛을 모르는 사람이 쓴 현수동의 상권 중 - P115
소매상점은 지역 사람들이 만나는 공간이며, 지역 상권은 지역공동체의 중요한 기둥이 될 수 있다고.
_ 맛을 모르는 사람이 쓴 현수동의 상권 중 - P120
현수동에, 그리고 모든 동네에 있어야 한다고 내가 강하게 믿는 문화시설은 공공도서관이다. 지역공동체의 중심이 되고 마을에 개성을 부여하는 ‘로컬크리에이터‘ 역할도 식당이나 술집이나 편집숍이 아니라 도서관이 맡아야 한다. 내가 작가다 보니까 도서관을 편애하는 걸까? 내가 혹시 게임 애호가였다면 PC방들이 로컬 커뮤니티의 허브가 될 수 있다는 의견을 냈을까? 하지만 PC방은 공간 구조가 사람들이 얼굴을 마주보고 대화하기에 적합하지 않고, 시간당 이용요금을 받는 민간영업장이며, 중년층과 노년층에게 친숙하지 않다. 지붕이 있고, 찾아가기 쉽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든 이에게 열려 있으며, 권위적이지 않은 상주직원이 있고, 단골 방문자가 있고, 크고 작은 다양한 커뮤니티의 물리적 중심이 될 수 있고, 여러 사람을수용할 수 있는 장소가 공공도서관 말고 달리 또 있을까? 초등학교? 행정복지센터? 지구대? 대형마트? 교회? 부군당?
_ 게임에 서툰 사람이 쓴 현수동의 도서관 중 - P134
전망이 좋고, 아름다운 자연이 근처에 있고, 산책로가 있고, 자전거를 타기 좋고, 개들과 개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고, 도서관이 있는 마을. 현수동이 아니더라도 현수동을 닮은, 거기에 역사와 설화까지 있으면 금상첨화인, 그런 동네에서 살고 싶다. 그런 동네의 일부가 되고 싶다.
_ 삶을 사랑한다는 것, 사랑하는 동네가 있다는 것 중 -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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