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8월 14일 고 김학순(1924~1997) 할머니가 기자회견을 통해 세상에 최초로 알리기 전까지 일본군 ‘위안부’피해자 문제는 오랫동안 숨겨져 있었다. 김학순 할머니의공개 증언은 다른 피해자들에게도 큰 용기를 주어 국내외에 이 문제에 대한 증언이 잇따르는 계기가 되었으며, 1992년 1월 8일 일본의 미야자와 기이치 총리의 방한을 계기로 시작된 ‘수요집회‘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_ 수요집회 중 - P35
멕시코로 이주한 멘추는 과테말라의 잔혹한 현실을 세계에 널리 알리기 시작했다. 1983년 멘추가 구술한 『내 이름은 리고베르타 멘추, 내 의식은 이렇게 탄생했다』가 출판되었다. 이 책은 과테말라 원주민 여성이 직접 증언한 수 세기의 억압과 배제의 역사, 당시 과테말라의 참혹한 현실에 대한 최초의 보고서다. 목숨을 건 멘추의 발언에 세계는 더 이상 과테말라의 참혹한 현실을 외면할 수 없게 되었고, 1984년 ‘난민에 대한 카르타헤나 선언‘이 발표되었다. 1992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리고베르타 멘추는 1959년 1월 9일에 태어났다.
_ 내 이름은 리코베르타 멘추 중 - P37
1945년 패망할 무렵 일본에는 약 210만 명의 재일 조선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1946년 3월까지 대략 140만 명이 귀환했지만, 해방 직후의 혼란과 생활난 등의 이유로 일본으로 되돌아간 이들도 많았다. 1952년 주권을 회복한 일본은 외국인등록법을 시행해 재일동포의 지문날인을 강제하는 한편, 지문날인을 거부할 경우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만엔 이하의 벌금에 처했다. 1980년대 재일동포 한종석 씨가 지문날인을 거부하면서 지문날인 거부 운동이 전개되었고, 마침내 1991년 1월 10일 재일동포의 인권을 침해해 온 지문날인 제도가 철폐되었다.
_ 지문 중 - P40
해방 후 호남선 열차는 근대 산업화 시대, 가난을 모면하려고 무작정 상경하는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이별열차였다. 목포행 완행열차(비둘기호)는 1998년 12월 1일 노선이폐지될 때까지 서민들의 애환과 수많은 사연을 담아 달렸고, 호남선 복선화 사업은 호남선이 개통된 지 90년, 복선화공사가 시작된 지 36년 만인 2004년에야 완성되었다.
_ 대전발 0시50분 중 - P42
선언 이후 그의 발표와 달리 애초에 이 방위선 안에 포함되지 않았던 인도차이나 지역에 대한 미국의 개입은 오히려 증대되었고, 오랫동안 미뤄 왔던 ‘한미상호방위원조협정‘(1950년 1월 26일)을 체결했다는 점 등을 볼 때 애치슨의 당시 연설은 아시아에 대한 경시와 무지의 반증이었다고 추측하게 된다.
_ 애치슨라인 중 - P45
고향 양산 대석리로 돌아간 권순도는 그곳에 집을 짓고 면암 최익현 선생 추모 사업을 하며 여생을 보내다가 1931년 1월 13일 세상을 떠났다. 그가 고향 마을에 세운 비석에는 "세계인 환영 권순도"라고 쓰여 있는데, 우연히 마을 곁을 지나가는 외국인이있으면 집으로 모셔다가 숙식을 제공하며 영어로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_ 세계인 환영 권순도 중 - P48
이 화장지 쪽지가 우여곡절 끝에 정의구현사제단의 손에 들어갔다. 불의한 권력을 넘어뜨린 ‘결정적인 한 방‘이었다.
_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중 - P51
세상은 ‘마르크스 이래 최고의 두뇌’로 불렸던 혁명가를 잃었고, 이후 독일은 2차 세계대전의 불구덩이 속으로 서서히 빨려 들어갔다.
_ 호자 룩셈부르크 중 - P53
[ 오늘날 오픈소스 웹 기반 온라인 백과사전의 대명사인 ‘위키백과사전‘은 2001년 1월 16일 지미 웨일스와 래리 생어에 의해 처음 시작되었다. 위키백과사전은 전문가만 편집할수 있었던 이전의 백과사전과 달리 위키라는 개념과 기술을 사용해 전 세계에서 3100만 명 이상의 참여자와 익명의 다수가 참여하는 백과사전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종이로 된 훌륭한 사전의 제작은 질 높은 검색을 위한 변함없는 필수조건이다.
_ 백과사전 중 -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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