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는 공짜라고 덜컥 받지 않으리라. 이것이 모두나를 망가뜨리는 욕심이다. 하지만 그건 또 얼마나 얕은 결심인지. 누가 공짜로 뭘 준다고 하면 굳게 다진 마음보다 입이 먼저 사고를 친다. "좋지요!"
_ 버리지 못하는 마음 중 - P35
도둑맞은 물건보다 도둑맞은 친절이 더 억울하다던 그녀가 아들에게 배운 영어 욕을 제대로 써봤는지는 모르겠다.
_ 미안하다고 말하지 마 중 - P45
삼십 년은 긴 세월이었다. 그동안 나를 매료하던 장점은 나에게 고난을 주는 단점이 되었고, 이젠 그 단점이 다시 연민이 되고 있다. 가끔은 연민이 사랑보다 더 힘이 세다는 말을 하면서 그렇게 함께 세월을 지나간다.
_ 결혼기념일 중 - P51
하지만 복국의 핵심은 생선 살이 아니라 국물에 있다. 콩나물과 미나리 몇 가닥이 전부인 맑은 국물에 식초를 몇 방울 떨어뜨리면 그 청량하고도 깊은 맛이 순식간에 몸의 말단까지 번진다. 곧이어 국물에 닿은 모든 곳이 맑아지는 기분이 든다.
_ 서호시장 중 - P62
고향이 낯설어지는 것은 오랫동안 바라던 바였지만, 실제로 그런 날이 오자 어찌된 일인지 나는 거절당한 사람처럼 당황하고 있었다.
서호시장 중 - P63
"아버지도 없는 게!" "술집 딸인 주제에!" "우리 엄마가 너랑 놀지 말라고 했어!" 과부가 하는 선술집의 딸은 제일 천한 계급이었지만 부모님이 길거리 리어카에서 튀김과 오뎅을 파는 친구에게는 어떤 우월감을 느꼈다. 그 친구와 싸우다가 "집도 가난한 게!"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_ 서호시장 중 - P68
"불쌍타" 엄마는 겨우 그 말을 내뱉었다. 두려운 존재를 불쌍하게 여기는 것이 가능할까. 어린 내게도 그건 배치될 수 없는 두 개의 사건처럼 의문이었다.
_ 유년의 색 중 - P73
나도 아버지처럼 붕어빵에 하얀 설탕을 뿌려볼까 망설인다. 식어 눅눅해진 붕어빵을 달콤하게 바꾼 아버지의 하얀 설탕이사실은 내 평생 써도 써도 남을 유산이라도 된 듯 많은 날에달콤한 위로가 되었다는 것을 아버지는 알까. 아버지의 붕어빵은 내 삶의 단계마다 또다른 은유와 상징으로 나와 함께 자랐다. 이제 나는 오래 떠올리던 아이의 마음 대신 아버지의 마음을 더 자주 상상하는 어른이 되었다.
_ 아버지와 붕어빵 중 - P82
나는 도시의 대학으로 진학하며 탈출에 성공했다. 남에게 인정받지 못하면 조바심을 냈고, 이유 없이 불안에 시달렸으며, 타인의 호의를 믿지 못하는 어른이 되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고향의 기억은 질겼고 질긴 채로 뒤틀렸다. 나는 고향의 기억에포획되지 않을 더 먼 곳으로 도망가고 싶었다. 매일 밤, 인과도서사도 없는 곳에서 완벽한 익명으로 살아가는 달콤한 상상을했다. 그런 곳에 닿을 수만 있다면 생은 저절로 리셋이 될 것같았다. 내 운명조차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곳이 필요했다. 밴쿠버로 떠났다.
_ 고메생약주 중 - P86
형제들은 제 자식과 손주가 생기자 조금씩 멀어졌다. 어쩌지 못하는 섭리였다. 사는 형편이 달랐고, 생을 추구하는 방식도 달랐다. 사랑도 달랐고 상처도 달랐다. 엄마는 형제들을 묶어놓는 유일한 공감대였다. 엄마가 없는 하늘 아래서우리는 또 한 뼘쯤 멀어질 것이고 어쩌면 이런 시간이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몰랐다.
_ 여성의 엄마 중 - P98
나는 왜 그랬을까. 남편은 왜 그랬을까. 우리는 왜 거대한 불행 앞에서 사소한 것에 연연했을까. 남편은 어쩌자고 잃어버린 손가락보다 잃어버린 반지에 더 신경을 썼던 걸까. 이제야 나는 생각해본다. 어쩌면 불가항력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뭐라도 우리 힘으로 해볼 수 있는 것을 찾은 것이 아닐까.
_소소하지만 다정한 중 - P117
산다는 것은 폭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리는 빗속에서도 춤추는 일이다.
_ 소소하지만 다정한 중 - P117
할머니의 이야기는 가지에 가지를 쳤다. 부모님의 부모님과 자식들의 자식들까지. 그 순간만은 늙고 병든 할머니의 현실은 거기에 없었다. 늙고 병든 할머니라고불쌍하게만 생각했던 나는 오만했다. 누군가를 불쌍하게 생각하고 동정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안일한 이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는 당신의 생을 연결 짓는 단단한 고리 속에서 누군가의 어머니로, 딸로, 아내로 당당했던 시절을 때론 기쁨에 차서, 때론 쓸쓸함으로 회고했다. 그것은 저절로 떠오르는 기억이라기보다는 애써 지켜온 자존심같이 견고한 면이 있었다.
_ 당신의 강화반닫이 중 - P123
어쩌면 돌아가지 않아도 되니 마음껏 그리워하는지도 모르겠다.
_ 나의 두번째 고등학교 중 - P133
여자의 뒤를 따라 걸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나는 여자를 미워하는 일을 포기하고 말았다. 어쩜 나쁜 세상이 아니라슬픈 세상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조금 울고 싶어졌다. 지옥에서는 누군가를 구할 여유가 없을 테니까. 그날 그녀는 지옥을 겪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니까. 나는 어느새 그녀의 하루가 무사하기를 기도하는 마음이 되었다.
_ 나쁜 세상이 아니라 슬픈 세상 중 -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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