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점령국 사람들이 들고일어나고, 현지의 엘리트들을 뇌물로 포섭하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해지고, 배후에서의 협박이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면, 점령국의 정부로서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하나는 1857년영국이 인도에서 그랬고 1956년 소련이 헝가리에서 그랬듯이 시위대를무력으로 진압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1949년 영국이 인도에서 그랬고1989년 소련이 폴란드와 동독에서 그랬듯이, 피점령국에서 증오의 통치를 계속하는 것에 대한 도덕적·군사적 비용을 더 이상 감당할 의사가없음을 인정하고, 새로운 현실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것이다. - P511
아이패드와 구글의 시대인 지금은 1980년대에 종종 드러나던 미국 사회와 비즈니스에 대한 경멸도 더 이상 찾아볼 수없다. 한편 관료와 자민당과 기성 재계를 중심으로 한 엘리트층의 상당수는, 주권의 핵심 부분을 미국에 맡기는 것이 자신들이 국내 상황을지속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치러야만 하는 타당한 대가라고 줄곧 자기합리화를 해왔다.
_ 일본과 세계 중 - P520
유대인, 쿠바계 미국인, 아일랜드계 미국인 유권자들의 반발을 살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이스라엘, 쿠바, 북아일랜드에 관련된 정책을 도입하는 경우 눈에 띄게 망설이는 모습을 보여왔다. 일본계 미국인 유권자들의존재는 미국이 대일 정책을 결정하는 데 이런 식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일본은 오로지 스스로의 능력만으로 미국을 어르고 달래며 때로 진정시켜야 하는 것이다.
_ 일본과 세계 중 - P521
일본에서는 이 문제가 더 심각했던 것이, 미국이나 프랑스와 같은 나라에서처럼 선출된 세력의 권력 행사를 합법화하는 민주 정치의 기능이 온전하게 작동된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일본 관료 조직의 고위 정책 담당자들은 자신들의 역할을 여전히 전쟁 전 관료들과 같은 시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당시에는 ‘천황의 신하였고, 요즘에는 ‘일본‘의신하이지, 스스로를 유권자들의 공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유권자들이 선거로 뽑은 더럽고 욕심 많은 정치인들은 더더욱 그들이 섬길 대상이 아니다.
_ 일본과 세계 중 - P528
마쓰시타 정경숙과 그 졸업생들은 2008년 금융 위기 이전에 세계적으로 유행하던 트렌드의 일본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에는 정치와 정부 운영을 둘러싼 고질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일류 기업을 경영할만한 사람들에게 나라의 경영을 맡겨야 한다는 생각이 각국에 퍼져나가고 있었다. 효율성과 테크놀로지, 우선순위, 핵심 역량, 윈윈 시나리오와 같은 단어들을 즐겨 사용하고, 파워포인트와 데이터 분석에도 능하면서, 명확하고 군더더기 없는 리더십을 발휘하는 사람들 말이다.
_ 일본과 세계 중 - P533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치적인 이유다. 중국이 최근 들어 갑자기 영유권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곳은 센카쿠 한 군데가 아니다. 중국은 남중국해의 광활한 해역을 놓고 과거로부터의 영유권을 새로이 주장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베트남과마찰을 빚고 있다. 인도와의 국경 분쟁 지역에 군대를 급히 투입하기도했다. 중국 인민해방군과 정부 지도층 내부의 강경파가 이제 과거의 묵은 빚을 청산하기로 결심한 것이 아니냐는 관측도 그럴듯하게 들린다.
_ 일본과 세계 중 - P547
일본의 언론은 공정하고도 절제된 보도가 아니라 특정 정치인의 결점을 대서특필해서 이슈화하는 행위를 통해 권력을 감시한다.
_ 일본과 세계 중 - P554
엔저는 높은 수익성을 누리던 일본 기업 대부분에 악영향을 미쳤다. 가격 경쟁력을 갖고 후방 산업에서 부품과 소재를 공급해 독점적 시장점유율을누리던 기업들에게는 원재료를 수입하는 비용이 오르게 된 것이다. 또한 임금은 오르지 않았는데 물가가 오르자 가계도 꼼짝없이 타격을 입었다.
_ 일본과 세계 중 - P561
언론에 대한 통제를 넘어 일상의 구석구석까지 협박과 자기검열의 칼을 들이대는 체제하에서 산다는 것의 의미를 경험적으로 알지 못했던 것이다. 새로운 법안에 반대 시위를 벌이는 사람 대다수는 사상경찰, 좌익 세력 동조자의 집단 검거, 군국주의의 광기, 사회주의와 기독교를 부인하는 사상 전향 같은 일을 직접 겪었거나, 그런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는 가정환경에서 자란 기성세대였다. 하지만 젊은 세대는 경제가 드디어 회복되는 듯한 분위기를 반겼고 중국에 대한 두려움도 갖고 있었다. 이들에게는 아베가 자신의 정치적 자산을 경제 개혁이 아니라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일에 사용함으로 인해 닥칠 일들에 대한 위 세대지식인과 언론인들의 경고를 무시해버리는 경향이 있었다.
_ 일본과 세계 중 - P572
미국은 물론 예전부터 이미, 오자와가 원했듯 일본이 중국과 독자적인 친선관계를 만들도록 허용하지 않겠다는 점은 분명히 해오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은 일본이 중국과 정면 대치의 갈등 상황으로 치닫는 시기와 조건 또한 일본의 뜻대로 선택하도록 놔두지 않으려 했다.
_ 일본과 세계 중 - P574
전투에서의 전술적 우위와 전쟁에서의 최종 목표를 혼동하는 자들이 범하는 실수란 늘 그런 것이다. 1939년 일본군은 충칭에 끊임없는 무차별 테러 폭격을 가했다. 무수한 건물이 파괴되고 수천 명이 죽었다. 하지만 그 폭격은 중국인이 일본인을 증오하게 만들었고 오늘날까지도 일본의 정책 담당자들을 곤란하게 하는 긴 세월의 악몽을 만들어냈을 뿐, 일본이 이를 통해 전략적으로 이룬 것은 하나도 없었다.
_ 일본과 세계 중 - P577
일본에게는 현실적으로 오로지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하나는 중국과 어떤 식으로든 합의를 이루어 공존의 미래를 만드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미국의 품 안으로 더욱 파고드는 것이다. 일본이 왜 후자를 더 선호하는지 수긍이 가기는 한다. 하지만 길게 내다보면 그것이 더 위험한 선택일 수도 있다.
_ 일본과 세계 중 - P578
지도자와 관리자들의 명백한 무능에도 미 제국이 휘청대면서 여전히 유지되는 이유는 상당 부분 전 세계에서 달러 중심의 통화 및 경제 질서를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_ 일본과 세계 중 - P581
일본의 원죄는 스스로를 아시아에서 분리시키려고 했다는 데 있다. 시대 상황을 고려하면 이해할 수 있는 죄이지만 그 여파는 끔찍했다. 일본이 스스로 택했던 쇄국에서 19세기 중반에 깨어났을 때 세계는 완전히 거꾸로 뒤집혀 있었다. 일본인들의 세계관에서 언제나 힘과 문화와 기술의 종주국으로 자리 잡고 있던 중국이 머나먼 땅에서 온 야만인들에게 도살장의 돼지처럼 꼼짝없이 당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 야만인들은 알고 보니 근대성을 대표하는 화신이었다. 그리고 일본은 그때까지 속해 있던 문화적 민족적 그룹에서 벗어나 소위 ‘선진국 클럽 사이에서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미친 듯이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그 나라들로부터 탄생한 가장 유해한 이데올로기의 일부를 수입했다. 핏줄과 영토에서 문화와 민족과 정체성의 뿌리를 찾으려던 이데올로기였다.
_ 일본과 세계 중 - P584
하지만 미국의 안전보장체제는 엄마가 아니다. 미국은 모성애건 무엇이 되었건 일본에 대한 어떤 종류의 애정도 갖고있지 않다. 일본을 단순히 군사적 속국으로 여겨서 미국이 시키는 대로잘 하고 말썽을 부리지 않기를 기대할 뿐이다.
_ 일본과 세계 중 - P590
달리 말하자면, 핵심적인 문제는 일본이 계속해서 과거를 청산하는데 실패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신화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거짓 신화가 계속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동중국해와 동해 너머로부터 일본을향해 날아오는 위협과 비난이,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지 모를 막연한 증오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다른 무엇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아베와 극우세력이 전후 체제에 그토록 효과적인 공격을 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제국의 망상에 사로잡힌 미국이 때로는 무심결에 이들을 도와주고 때로는 방조했다.
_ 일본과 세계 중 - P598
하뉴의 이야기와 그의 태도는 엄연히 21세기 일본의 이야기가 될 수있다. 그 이야기는 과거의 굴레를 벗어버리고 비극을 승리로 변화시키는 이야기다. 과거를 왜곡하려는 사람이 위협과 조소를 통해 이루는 승리가 아니라, 열심히 노력하고, 포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는 사람의 겸손한 승리다. 이 나라에 대해 가장 감탄을 자아내는 특질인 선량하고, 예의 바르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승리다. 이런 승리는 예전에도있었다. 하뉴 유즈루와 그의 친구들과 그의 고향에 있는 후원자들과 같은 개인에게도 있었고, 일본이라는 나라 전체에도 있었다. 이번에도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일본의 미래가 아베가 불러낸 우울하고 피해자 의식에 사로잡힌 국수주의가 아닌, 하뉴 유즈루 이야기의 궤적을 따라 결정되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_ 일본과 세계 중 - P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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