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이라는 허구를 통해 인간은 미래로 뻗어 있는 긴 시간을 견디는 존재가 될 수 있고, 신용이라는 허구를 통해 당장 돈이 없는 사람도 미래의 자산을 끌어다 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정체성과 신용을 가진 나는 빈털터리가 아니라, 미래에 이자까지 쳐서 빚을 갚을 자산가다.
_ 정체성은 시간을 견디기 위한 ‘허구‘다 중 - P110
이러한 산인이라는 말에 좀 더 심오한 의미를 부여한사람이 바로 송나라 문인 소식이다. 소식의 세계에 이르면, 산인은 거의 자유인이라고 부를 만한 높은 경지의 인물이 된다. 소식이 생각하는 산인은 세속의 명예 따위는 잡을 수 없는 바람이나 그림자 같은 걸로 치부한다. 그러나 현실에 완벽한 자유인이 어디 있으랴. 소식은 손님의 입을 빌려 자문한다. 나는 자유로운 사람인가, 아니면 절도 있는 사람인가?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뭔가못 미치고, 절도 있는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여전히 욕망이 깊지 않은가.
_ 자유인과 호구 사이에서 중 - P134
현대판 신선을 찾아 점집에 가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꿈꿀 권리가 있듯이, 오늘날에도 신선을 상상하고, 그 상상 속에서 자기 삶을 풍요롭게 할 권리가 있다. 다만 문제는 그것에 과학의 지위를 부여할 때 생긴다. 일본의 극작가 데라야마 슈지는 「미신을 믿을 권리」라는 글에서, 꿈에서 이웃집 부인의 엉덩이를 만졌다고다음 날 아침 이웃집에 찾아가 사과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 바 있다.
_ 신설을 보았는가 중 - P142
그러나 일이 없어진 인간에게는 권태가 엄습하기 마련.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이제 시시포스는 자기가 알아서 바위를 산 아래로 굴리기 시작한다. 권태를 견디기 위해서 다시 일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_ 시시포스 신화는 계속된다 중 - P153
노동을 없애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노동의 질을 바꾸는 것이 구원이다. 일로부터 벗어나야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일을 즐길 수 있어야 구원이 있다. 공부하는 삶이 괴로운가? 공부를 안 하는 게 구원이 아니라, 재미있는 공부를 하는 게 구원이다. 사람을 만나야 하는 게 괴로운가? 사람을 안 만나는 게 구원이 아니라, 재미있는 사람을 만나는 게 구원이다.
_ 삶의 쳇바퀴를 사랑하기 위하여 중 - P157
구원은 비천하고 무의미한 노동을 즐길 만한 노동으로 만드는 데서 올 것이다.
_ 삶의 쳇바퀴를 사랑하기 위하여 중 - P160
정말 얽매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존재는구름 같은 사물이 아니라, 마음을 갈고 닦을 수 있는 인간이다. 마음을 잘 비워낼 수만 있다면, "만물과 서로를 잊을 뿐만 아니라 천지와 서로를 잊고, 천지를 서로 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나를 잊을 것이다. 구름은 있었다 없었다를 반복하며 산정에 얽매일지 몰라도, 사람의 마음만큼은 노력 여하에 따라 훨훨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_ 구름을 본다는 것은 중 - P169
미국의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는 "말을 한다는 것은 구체적인 말을 하는 것이다. 구체적인 말을 하지 않고 그냥 말을 하려는 시도는 답이 없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구체적인 인물과 상황을 경유하지 않고 메마르고 일반적인 정치비평을 반복해대는 것 역시 그만큼 답이 없다.
_ 느린 것이 삶의 레시피다 중 - P174
계곡과 산마루를 지나 마침내 산정에 다다르면, 시집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에 실린 ‘시인의 말‘을 떠올릴 계획이다. 시인 안희연은 다음과 같이 썼다. "많은 말들이 떠올랐다 가라앉는동안 세상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것 같고 억겁의 시간이흐른 것도 같다. 울지 않았는데도 언덕을 내려왔을 땐 충분히 운 것 같은 느낌도 들고. 이 시집이 당신에게도 그러한 언덕이 되어주기를. 나는 평생 이런 노래밖에는 부르지 못할 것이고, 이제 나는 그것이 조금도 슬프지 않다."
_ 슬픔으로부터 벗어나는 법 중 - P186
"그러므로 세상에서 도를 논하는 사람들은 각자가 본 것에 기초해서 이름 짓고, 보지 못한 바에 대하여 억측한다. 그것은 모두 도를 잘못 파악한 것이다."
_ 산속에서는 삼의 참모습을 볼 수 없다 중 - P201
순수한 현실이라고 가장하면서 사람들에게 해내는가스라이팅, 그것이 바로 이데올로기다. 물리적 폭력이 통제되고 있는 정치 세계에서 만인의 만인에 대한 가스라이팅이 진행 중이다.
_ 정신승리란 무엇인가 중 - P209
공정에도 심오한 철학과 정교한 기술이필요하다. 출발선이 다른 사람들, 성장 배경이 다른 사람들, 조력자의 규모가 다른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에서 공정은 어떻게 실현되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답할 의지와 능력이 없을 때, 기대는 것이 획일적인 시험이다. 학부모는 자원을 자식 교육에 집중하고, 용케 시험에 합격한 자식은 ‘공정하게‘ 경쟁자를 제거한 승리자로 탈바꿈한다.
_ 경쟁할 것인가, 말 것인가 중 - P217
희망, 자신감, 정의 등 제로섬적 경쟁이 작동하지 않는 영역에 눈을 돌릴 수 있으려면, 세상에는 다원적 가치가 존재한다는 것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 다양한 가치들에 자유자재로 눈을 돌리고 다양한 영역을 가로지를 수 있는 마음의 탄력이 필요하다. 경쟁, 아니 경쟁의 ‘지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파이의 확대나 욕망의 제거나 공정한 시험 못지않게 경직되지 않은 마음의 탄력이 중요하다.
_ 경쟁할 것인가, 말 것인가 중 - P220
그러면 누가 미숙한 정치인인가? 선한 의도를 과신한 나머지 근거 없는 자신감이 충만한 정치인이 아닐까. 그런 사람이 큰 권력을 손에 쥐게 되면, 그 권력을 멍청하지만 과감하게 행사할 것이다. 막스 베버는 정치 현실의 아이러니를 인식하지 못하고 선한 의도에만 집착하는 정치인을 일러 ‘정치적 유아‘라고 부른 적이 있다.
_ 좋은 의도의 정치 중 - P228
비판이 없으면 긴장도 없고, 긴장이 없으면 퇴화는 불가피하다. 관건은 그러한 비판을 제도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듣기 싫겠지, 정말 쓴소리는.
_ 정치도 연애처럼 중 - P239
눈을 뜨면 삶의 수단이 보일지 몰라도 삶의 목적은 보이지 않는다. 삶의 목적을 보기 위해서는 묵상해야 하고, 묵상할 때는 눈을 감는다.
_ 대성당을 가슴에 품다 중 - P249
『할머니의 팡도르』는 살아 있는 동안 인간은 삶에서달콤함을 누릴 자격이 있다는 것, 그 달콤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 그 죽음에도 불구하고 다음 세대에게 달콤함의 레시피를 남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쩌면 이 세 가지가 사람이 사람에게 건넬 수 있는 위안의 거의 전부다.
_ 달콤함의 레시피 중 - P266
인생을 즐기고 싶은가. 그렇다면 좋아하는 대상을 피하지 말아야 한다. 환멸을 피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좋아하는 대상에 파묻히지 말아야 한다. 대상을 좋아하되 파묻히지 않으려면, 마음의 중심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마음의 중심은 경직되어서는 안 된다. 경직되지 않아야 기꺼이 좋아하는 대상을 받아들이고, 또 그 대상에게 집착하지 않을 수 있다.
_ 인생의 디저트를 즐기는 법 중 - P272
나는 오랫동안 목적 없는 삶을 원해왔다. 왜냐하면 나는 목적보다는 삶을 원하므로, 목적을 위해삶을 희생하기 싫으므로. 목적은 결국 삶을 배신하기 마련이므로, 목적이 달성되었다고 해보자. 대개 기대만큼 기쁘지 않다. 허무가 엄습한다. 목적을 달성했으니 이제 뭐 하지? 목적 달성에 실패했다고 해보자. 허무가 엄습한다. 그것 봐, 해내지 못했잖아. 넌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았지?
_ 에필로그 중 - P288
사람마다 다양한 재능이 있다. 혹자는 살아남는 데일가견이 있고, 혹자는 사는 척하는 데 일가견이 있고, 혹자는 사는 데 일가견이 있다. 잘 사는 사람은 허무를 다스리며 산책하는 사람이 아닐까. 그런 삶을 원한다. 산책보다 더 나은 게 있는 삶은 사양하겠다. 산책은 다름 아닌 존재의 휴가이니까.
_ 에필로그 중 - P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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