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사필귀정의 방식으로 돌아간다면, 그는 죽을 때까지 나와 행복하게 살아야 옳았다. 그러나 일은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는 아무 잘못 없이 나를 잃었다. 나는 성민이 가고 난 뒤에도 혼자 한참 더 울었다. - P147
삶에는 ‘사랑한다‘와 ‘사랑하지 않는다‘ 사이에 아무런 경계가 없어지는 그런 지점이 있었다. 그에게 그곳이 나무가 쓰러진 고속도로였다면, 나에게는 산꼭대기에 붉은빛이 번져가는 이 산성이었다. 그날그가 전혜원에게 죽도록 사랑한다고 말했어도 인생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게 흘러갔을 것이다. 내가 오늘 성민에게 죽도록 사랑한다고 말했어도, 인생은 또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흘러갔을 것이다. 시간과 방향의 감각이 없어지는 그런 공간에서는, 인간이 무엇에 부딪쳐 어디로 가든 아무 차이가 없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고속도로를, 또산성을 지나쳤다. 한번 지나치고 나면, 또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살게된다. - P153
해사한 웃음, 수줍은 얼굴, 부드러운 말투, 상대방의 말에 크게 고개를 끄덕이는 몸짓은 그의 본성의 아주 작은 일부분에 불과했던 것을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그에게는 세상에 꼼꼼하게 숨겨왔던 아주 커다란 다른 부분들이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 말 하지 않는 정욱연은, 침묵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을 만큼 차갑고 지독했다. - P163
그때 나는 이미 예감했던 것 같았다. 그가 가면을 벗는 순간, 그 앞에 내가 있을 것 같다고. - P165
내가 겪은 일쯤은 오이를 무치다가 양념 묻은 손으로 눈을 비벼서 눈물이 난 정도의 하찮은 일에 불과하다는 식이었다. - P182
사랑이라는 엄청난 바위가 미친 듯이 내달리고 난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달 표면 같은 폐허에 나 혼자 서 있었다. 아무도 행복한 사람이 없었다. - P183
하지만 아는 것과 느끼는 것은 다른 것이었다. - P210
그러지 못한다. 어린 시절 가족에게 받은 상처가 많았던 아빠같은 사람에게 기러기 가족이란 악몽의 재연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그걸이해하지 못하는 엄마와 현서가 희서의 눈에는 아둔하고 이기적으로 보였다. 희서는 현서에게 이제 그만 나가라고 말하고 싶었다. - P219
나름대로 좋은 점이 없지 않은 작은오빠의 인생이 저토록 꼬인 것의 출발점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것이 성적이라고 생각했다. 작은오빠는 성적이 너무 좋았다. 성적이 좋으면 많은 것이 용서되는 한국에서, 작은오빠는 지나치게 좋은 성적을 받는 바람에 인생을 망쳤다. 성적이 좋은 사람은 의대, 법대, 경영대 안에서 행복을 찾아야만 했기때문이다. - P240
"그게 진정한 자식 노릇 아니야? 자식이 부모 말 듣는 거 봤어?" - P252
다행히 헤나는 내 의견을 무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내 계획 따위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제멋대로 내달렸다. 그녀가 우연의 영결식장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달려가는 걸 알았지만, 나는 그녀를 불러세울 수도 없었다. 그녀는 내 목소리보다 빨리달렸으니까. 혜나가 욱연을 사랑하는 방식, 그것이 바로 『사랑이 채우다』이다. 슬픔과 이별로 가득한 인생이라도 살아야 한다고, 내가 당신곁에 머물겠다고 혜나는 욱연에게 속삭인다. 혜나가 욱연을 위해 춤추고 노래하면서 이 긴 이야기는 끝이 난다.
_ 작가의 말 중 - P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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