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유산
심윤경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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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 가난, 어딜 가나 지겹도록 가난한 나라였다. 돈으로도 가난하고 마음도 가난했다. 클라크 선교사는 아이들에게 초콜릿을 구걸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아이들에게 초콜릿은 중요했으므로 해동은 선교사가 하는 말은 귓등으로 넘기고 미군이 보이기만 하면 달려들어 손을 내밀었다. 어른이 되어 애커넌 씨를 따라다니면서, 손을 내미는 아이들을 보면 제 어린 모습이 보여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 P94

방금 들은 애커넌 씨의 대답은 해동이 국제사회에 대해 마음속에 간직했던 어떤 신뢰를 결정적으로 꺾었다.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의 형편은 그때의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하네." 그 말은 곧 한국의 비참했던 일제강점기 삼십육 년 동안 나라와 민족이 아닌 일본과 개인적 치부를 위해 진력했던 사람들에게 비난하거나 책임을 물을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었다. - P97

사실 해동이 한일 수교에 반대할 때조차도 그 문제는해동의 감정과 머릿속에서만 불편하게 떠돌았을 뿐 겉으로는 활동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아무도 그에게 의견을 묻지 않았고 그의 생각이 생활에 불편이나 갈등을 일으키는 일은 없었다. - P102

나라 전체가 잘사는 것이 더 큰 이익인가, 원섭과 같은 죄지은 자들이 죗값을 치르고 어려운 시절 묵묵히 고난을 감수했던 올바른 사람들이 떳떳하게 사는 것이 더 큰 이익인가? 이 부분에서 생각은 플리머스 자동차의 바퀴가 진흙 구렁에 빠져 헛도는 것처럼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헛되이 맴돌았다. - P103

" ~~ 중략 ~~그가 아름다운 정신과 가치를 대변하기만 한다면 그에게 언제까지라도 무한한 존경심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거든. 그게 바로 인간의어리석고 신비로운 점이라네. 우리는 현실적으로 아무 쓸모 없는것들에 언제나 매혹되네." - P106

진형은 뾰족한 탑의 꼭대기, 검고 단정한 기와지붕, 끝을 동그랗게 오므려 우아하게 모양을 낸 저택의 창틀, 톱니바퀴처럼 하얗게 마무리한 벽의 테두리 들을 손가락질했다. - P163

해동은 한국의 옛 양반들 사이에서 서로를 부르는 격식 있는 호칭이었던 호와 아호에 대해, 벽수라는 이름의 한자 뜻풀이에 대해, 저택이 서 있는 아름다운 산자락과 푸른 소나무 계곡에 대해, 이 마을에 부는 시의 바람을 한량없이 사랑했던 옛 시인 묵객들과 예술가들에 대해 윤원섭을 대신해 설명했다. - P179

"당신 말대로, 그 시절에 나라를 위해서 피치 못하게 친일도 하고 돈도 긁었다고 치자고. 동의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어서 그랬다고. 그런데 마지못해 하는 일이라면 적당히 흉내만 내지, 남들을모두 제치고 일등을 하지는 않잖아? 어떻게 윤덕영처럼, 아무도 생각해내지 못한 온갖 못된 수를 다 써서, 그 시대에 있었던 모든 감투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차지할 수 있는 거지? 원치도 않는데 하는 수 없이 그랬다면?" - P187

해동이 가진 것은 온통 미미한 것들뿐이었다. 아버지가 돼지막에 숨겼던 인쇄기, 생전에 고모가 쌓은 덕과 인정, 애커넌 씨와 개인간 고용으로 만들어진 언커크의 일자리. 그런 미미한 것들은 길가의 거미줄처럼 금세 더럽혀지고 아무 발길에나 찢어지고 제일먼저 흔적 없이 사라졌다. 그런 것이 존재했다고 증언해줄 사람들도 뿔뿔이 흩어져 그것이 실제 있었다고 말할 근거조차 희박해지는 것들뿐이었다. 그에 비하면 윤덕영은, 벽수산장은 언커크는 얼마나 확실하고 단단하고 부인할 수 없이 존재하는가. - P248

생각만 내달리고 방법에 무관심하며 과정은 채근하고 결과를 비난하는 상사로 모시기에 최악의 유형이었다. - P250

저택은 아름다웠다. 그것을 소리내어 말하기가 그렇게 고통스러웠다. 스스로 벼락이라도 때려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말하고보니 아무것도 아니었다. 윤덕영의 썩은 정신과 나라를 팔아먹은자금으로 만들었는데도, 저택은 아름다웠다. 아름다움의 힘이 있었으므로 두 번의 전쟁과 저택을 차지했던 모든 세력의 몰락조차 이겨냈다. 조선이라는 초라한 나라에 대저택을 세운 중년의 건축가가 두들겨맞은 멍자국을 애써 감추던 십대 소녀에게 건네준 열쇠 또한 아름다웠다. 아무도 모르는 다락방에 숨어서 난폭한 형제들의 손찌검과 몰락해가는 일가의 앞날을 두려워하던 소녀의 눈물도 아름다웠을 것이다. 그 소녀는 추해져 더이상 아름답지 않았다. 하지만 저택은 변함없이 아름다웠다. - P252

인간은 추하지만 물건은 아름다운 것이 어디 이 저택만의 일이었겠는가. 그런 것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깨닫고 나니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 해동은 깨달음으로 새로운 눈을 얻은 것처럼 저택의 모든 것을 하나하나 보았다.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 P253

이상한 말이지만, 고모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와 비슷했다.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은 알았지만 노인들이 세상을 등지려면 세 번은 쓰러진다는 말을 믿었다. 단숨에 그렇게 떠날 줄 몰랐다. 어제까지 대단하던 저택이 오늘 잿더미가 될 줄도 몰랐다. 그런 것은 상상을 벗어난 일이었다. 연기가 걷힐 때마다 한 번, 또 한번, 지붕이 사라지고 움푹 비어버린 허공이 드러날 때마다 그는 그자리에 주저앉을 것 같은 아득함을 느꼈다. - P268

저택은 다시 복구될까? 아니면 이대로 무너져 기억 속으로 사라질까? 해동은 어느 쪽을 바라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저택은 나라의 것 같기도, 유엔의 것 같기도, 윤원섭의 것 같기도 했다. 친일파의 자손이 빌붙은 썩어빠진 집이기도 했고 세상에 다시 없이 아름다운 것이기도 했다. 적산, 그것은 그렇게 사람을 혼동되게했다. 썩어문드러져 짜내야 할 고름인지, 다시 얻지 못할 귀중한 자산인지 알 수 없었다. - P274

하지만 지금은 그의 인생에 다시없이 빛나는 무대였던 이곳을 축복도 저주도 남기지 않고, 떠나야 할 때였다.
해동은 언커크 언덕을 내려왔다. - P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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