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유산
심윤경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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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히고 사라지는 것이 우주의 순리라고 하지만 이 건물의 운명에는 어딘가 유난한 데가 있었다. 돈의문도 바미안 석불도 흔적 없이 사라졌지만 벽수산장처럼 기억조차 절멸에 이르지는 않았다. 벽수산장의 잊혀짐에는 금기나 처벌에 가까운 어떤 기운이 있었다. 만일 그 저택이 사라지지 않고 지금까지 우리 곁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_ 작가의 말 중 - P278

적은 언제나 뻔뻔하다. 잘못을 뉘우치는 법은 결코 없다. 윤원섭처럼 뻔뻔한 적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득을 취한 것으로도 모자라 커다란 명예마저 챙기려 한다. 이익과 명예 둘 중 하나는 놓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적의 행태는 필연적으로 우리에게 적의를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적들은 마지막 시험과도 같이 유산을 남기고 떠난다. 적이 남긴 유산, 적산, 그것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적과 함께 말살해야 할 폐해인가, 남기고 지켜야 할 공동의 자산인가.

_ 작가의 말 중 - P278

이 소설에는 친일파와 왕가, 국제기구와 대저택 같은 거창한 것들이 등장하지만 진정한 주인공은 사람을 이리저리 떠밀어대는이념의 밀물과 썰물 속에서 정직과 존엄을 지키려 애썼던 평범한사람들이다. 저택의 존속과 소멸에 아무런 결정권을 가지지 못했던 해동이 애꿎게 그의 직장을 내놓은 것처럼 평범한 사람들은 역사의 제단에 목숨이나 밥벌이할 직장 같은 것들을 올렸는데, 그것은 실상 그들이 가진 전부였다. 노랫말처럼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역사에 파묻고 잊혀져간 수많은 그분들이야말로 진정한 우리 역사의 주인공들이며, 우리는 각자 그렇게 우주의 중심에 살고 있다.

_ 작가의 말 중 - P279

이 세상에는 사라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 ~~ 하지만 이 사람은 말투도 점잖고, 손글씨에격이 있어 보이지 않는가? 어법이 부정확한 부분도 있기는 하지만이만큼 영어를 구사하는 걸 보면 잘 배운 사람인 것 같아." - P16

저 사람은 어미의 뱃속에서 태어날 때부터 영감이 아니었을까 싶을 만큼 상노인이었다. 그런데 영감과 동갑이라는 원섭은 초라할망정 나이들어 보이지는 않았다. - P19

거의 평생에 걸쳐서 썩은 나무 위를 걸은 것 같은 모진 시간이 흐른 끝에, 해동은 마침내 원섭이 말한 비밀의 공간에 이르렀다.
저택의 동남편 지붕 모서리에 숨겨진 작은 다락방이었다. 남쪽으로 난 동그란 광창을 통해 왼쪽으로 비낀 한 줌 오후 햇살이 공간을 밝히고 있었다. - P48

윤원섭이 윤덕영 자작의 딸로 이곳에서 나고 자란 사연은 기이할지 몰라도, 그녀가 이 저택을 마음대로 둘러보고 추억을 되새길 이유나 권리는 전혀 없었다. 그것은 언커크의 공적인 활동과 아무 관계가 없었다. 애커넌 씨는 그런 부분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해동은 안타깝게도 일이 윤원섭이 애초에 기획했던그대로 돌아가고 있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애커넌 씨는충분히 주의하고 경계하겠다고 했지만 방금 목욕하고 찾아온 여인이 풍기는 훈김 앞에서 남자들이 그런 냉철함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그녀는, 이 저택의 비밀의 방을 선물받은 여인인것이다. - P52

이제 해동은 기차에 앉아서 아이들을 보는 쪽이 되었다. 눈 덮인 들판에서 빨갛게 불어터진 볼따귀의 아이들이 논둑길을 따라달리며 주먹을 올렸다. 아이들의 모욕적인 몸짓과 욕설 뒤에 숨어있는 동경과 부러움을 잘 알고 있었다. - P54

붙잡아 앉히는 인력이 매우 약했던 땅, 떠나기 위해 시작한 곳,
그래도 고향은 고향이었다. - P55

해동이란 그가 보지못할 해방된 세상을 자식들은 누리기를 기원한 간절한 이름이었다. - P59

아버지가 했던 독립운동의 실체가 무엇인지 그는 분명히 알지 못했는데, 먹고살기 바빠서 자세히 알아보지 못한 탓도 있지만 캐보나마나 하찮고 별것 아닐 것이 분명하다고 지레 넘겨짚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고모에게 캐물어 비로소 듣게 된 아버지의 행적도 짐작대로 별것 아니었다. - P60

"괜찮다. 귀신은 없는 거야. 제사야 사람 먹자고 하는 일이지." - P61

"살면서 고생이야 누가 편하겠느냐. 살면 살아지는 거지. 보는처자가 없거든 연락을 해보아라. 안골의 영수 할머니라고 하면 그쪽에서도 아는 것이 있을 것이다." - P64

해방 직후 미군정은 일본인들이 남겨두고 간 동산과 부동산이모두 국가에 귀속된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민간인끼리의 거래를불허하고 미군정에서 관리한다는 방침만 정해놓고 정작 관리는허술하여 일이 더디고 깔끔치 않았다. 전쟁이 지나간 후 주택 부족이 심각해지자 그때까지도 소유 관계가 정리되지 않은 적산가옥을 차지하기 위해 다시 한번 아귀다툼이 벌어졌다. 공식적인 명칭은 귀속재산이었지만 사람들에겐 적산이라는 말이 익숙했다. - P66

적산 적이 남겨두고 간 자산이라는 표현에는 불을 지르고 싶은 적의와 한입에 삼키고 싶은 상반된 욕망이 뒤섞여 듣기만 해도 잠잠하던 피마저 들끓게 했다. - P67

클라크 선교사와 그의 가족은 전도와선교 외에 지역사회의 다양한 일들에 항상 열성적으로 참여하였으되 그가 스스로 말하듯 한국 사람들을 섬기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적은 없었다. 그들은 한국의 시골 사람들을 섬기기엔 너무나 귀족적인 기품을 두르고 있었다. 그들이 아무리 먼지투성이가 되어늙고 지쳐 보이는 순간에도 그들의 고귀한 신분은 그들을 떠나지않았다. - P71

그 방문에서 만났던 늙은 고모 같은 사람들, 잊힘과 존재함의 경계에 수십 년간 그대로 머문 기억들, 쇠락하였으나 오래된 소명을 떠올리게 하는 선교사집 같은 사물들이 붕괴 위기에 처한 그의 세계를 어떻게 구원하였는지 명확하게 알 수는 없었다. 어쨌거나 고향에서 돌아올 때 그는조금 더 침착해져 있었다. - P74

윤씨 자손들은 돈을 벌 줄은 모르고 흥청망청 써댈 줄만 알았다. 윤덕영이가 누구도 그 실제 규모를 알수 없을 만큼 큰돈을 한없이 길어 나를 때에나 가능한 생활이었다고, 팔묵 영감은 윤원섭이 없는 데서는 제법 호기롭게 윤덕영의 맨이름을 입에 올렸다. - P79

한양 아방궁의 막내딸 원섭이 무슨 이문을 노리고 사기를 쳐먹으려다가 옥살이를 치르고 나온 사건이야말로 윤씨 일가의 초라한 몰락을 한눈에 요약해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 P80

한국이라는 낯선 나라에 파견되어 체류하는 언커크의 외국인들은 윤덕영이 악명 높은 친일파였다는 것을 알게 되더라도 별다른의의를 두지 않았고, 저택 그 자체에 더 관심과 친밀감을 보였다. - P83

권력자 앞에서만 평소에 없던 공손하고 우아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태고부터 이어진 얄팍한 술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통하는 것을 보면 인류는 문명이 아무리 발달해도 그리 많은 것을 배우는 것 같지 않았다. -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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