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시집은 대개 자신이 곧 죽게 된다는 암시로 가득하다는 식으로 회자된다. 죽음과 맞서 싸우던 시인이 병상에서 썼든 그렇지 않았든 간에, 마지막 시집은 병색이 완연하다. 그러나 그 병색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병색과는 다르다. 시인의 병색은 욕심 없음을 맑디맑게 드러낸다. 마지막 시집에서 시인들은 대부분 분투하지 않고 태연했다. 잘 알고 있었으나 잘 안다고 말하지 않았다. 보여주려 하지 않았고 입증하려 들지도 않았다. 영롱한 문장들이 쓰여 있었으나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음을 시도했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독자인 나에겐 그렇게 읽혔다. 이미 이승과 작별을 하고 떠난, 마지막 시집을 상재한 시인들만이 할 수 있는 시도일 수 있다. _ 막연함에 대하여 중 - P145
근근하게나마 그런 환희가 나를 반복적으로 찾아오지 않았다면, 나는 시를 쓰지 않는 사람이 되어갔을 것이다. 포기하는 마음이라고 적고 있지만, 표표해지는 마음이라고표현해야 더 정확하다. 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걸 확인하는 순간을 ‘포기‘라고 겸손하게 말하기에는 그 순간에 깃든 감정이 무엇과도 견줄 수 없을 정도로 담백하다. _ 아둥바둥의 다음 스탭 중 - P152
흙길위에는 각자의 운동화 자국이 나란히 찍혀 있을 것이고 곧지워질 것이다. 우리의 운동화가 진흙을 묻혀 오듯, 우리의 눈동자도 무언가 다른 것을 담아왔을 것이다. 긴 길을 달리는 동안에 우리는 메리 올리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목격한 것들이 메리 올리버에게는 매일매일의 평범한 하루였을 거라는 사실에 대해서, _ 소리하지 않는 바위 중 - P157
어금니를 바득바득 간다는 것이 어떻게 애정이 아니라고 몰아세울 수 있는지, 술자리에서의 그 사람이 틀렸다는 것을 금세 알게 되어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_ 어금니를 깨무는 일 중 - P168
시가 도대체 뭐였는지를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아는 모든 것에 대하여 씩씩하게 어깃장을 놓기위해 청춘을 바치다시피 시를 써왔지만, 나를 둘러싼 내 삶에 어떻게든 어깃장을 놓기 위해 배낭을 꾸려 여행을 다녔지만, 그 종착점 같은 외지에서 늘 생각을 했다. 시란 무엇인가. _ 어깃장의 시간들 중 - P178
인생을 만드는 것은 공식적 사건들 사이에 일어나는 예측 불가능한 일들이고, 인생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은 계산 불가능한 일들이다. _ 얻기 중 - P179
처음 코로나19가 우리에게 공포를 안겨주던 시작점을 생각해보면, 나는 잃은 것만큼 얻은 것이 많다. 시간을 얻고, 조금 더 나은 날씨들을 만끽하는 하루를 얻고, 내가 사는 동네의 모르던 장소들을 얻고, 그 장소에서 목격한, 아무것도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결코 아무것도 아닐 수는 없는 경이로움들을 얻었다. 경이를 발견할 줄 아는 겸손을 얻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건강도 얻었다. 몸이 있는 곳에 온전히 마음이 돌아와 도착할 때까지 걷고 달렸다. 몸이 있는 곳과 마음이 있는 곳이 순일한 일치를 얻는 순간에 대한 소소하디소소하지만 온전한 희열을 되찾게 되었다. _ 얻기 중 - P184
가장 활달하다면 활달한 세계가 지금으로써는 꿈속밖에 없다. 베개에 머리를 대고누울 때에 오늘은 무슨 꿈을 꿀까 기대한다. 겨우 그게 나를 가장 설레게 한다. _ 내일은 무얼 할까? 중 - P202
시끄러움과 심란함도 그리하여 누군가에게 종내는 위로가 된다. 우리는 평화롭기를 갈망하지만, 평화는 찰나처럼 우리에게 와서 우리를 잠시 안아주고 떠나버린다. 김종삼은 평화롭게」라는 시를통해서 평화가 유지되는 러닝타임 자체를 표현하려 한 것은 아닐까. 딱 그 정도의 시간. 그 시간만큼은 평화롭기. 하루에 한 번씩만이라도 평화롭기. _ 평화롭게 중 - P212
일기는 오직 쓴 사람만의 내밀한 세계이고, 편지는 발신자와 수신자 두 사람만의 내밀한 세계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으므로 그 편지들을 완독할 때까지 나는 누구에게도 이 이야기를 누설하지 않았다. 더 읽을 편지가 없을 때까지는 무사히 비밀을 지켰다. _ 편지 두 상자 중 - P217
어렸을 때의 편지속에서는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해달라는 당부였고, 최근의 편지 속에서는 엄마의 건강을 위해서 이런저런 것들을 꼭지키시라는 당부였다. 편지 더미 속에서 파악하자면, 나는엄마에게 평생 동안 당부만을 해온 사람이었다. 거의 모든것을 해주겠다고 간곡히 고백하던 아빠의 편지들과 구구절절 해달라는 이야기만 간곡히 적어 내려간 딸의 편지들. 엄마가 간직해온 두 개의 편지 모음 상자는 모두 나에게 되돌아왔다. 이번에는 내가 보낸 편지의 수신자가 내가 되어 편지들을 읽었다. _ 편지 두 상자 중 - P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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