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만치 혼자서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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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서 시간은 구획되지 않았고, 북서에서 남동으로 풍향이 바뀌어도 바람은 늘 물위를 달려가서, 물은 제자리에서 출렁거렸다. 더위와 추위는 사람의 것이었고 계절은 더위나 추위와 상관없이 한데 붙어서 흘러갔다. _ 명태와 고래 중 - P25

달이 밝은 밤에는 빈 것이 가득차 있었고 안개가 낀 날에는 가득찬 것이 비어 있었다. 안개 낀 날, 해안의 봉우리와 포구들이 보이지 않아서 배는 방향이 없이 출렁거렸고 달이 밝은 밤에 포구들은 혼곤했다. _ 명태와 고래 중 - P30

파도에 부딪힐 때마다 배는 뒤로 밀렸다. 달빛은 바람에 쓸려가지 않았다. 빛에는바람의 자취가 남지 않아서, 물이 바람에 흔들려도 빛은 그 자리에 있었다. _ 명태와 고래 중 - P31

이춘개가 죽은 해 겨울에 명태가 많이 잡혔다. 명태는 물결처럼 밀려내려왔다. 먼바다에서 고래들이 솟구치며 연안으로 다가왔다. _ 명태와 고래 중 - P46

오년 전에 이혼한 전처를 부른다면 어이없어하면서도 응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말을 꺼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아무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데, 아무도 없다는 것이 본래 그러한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았다. _ 대장 내시경 검사 중 - P124

전처와 살 때는 사소한 일로 자주 다투었다. 삼십 년이 넘는 세월의 다툼을 다 말할 수는 없지만 사소한 것이 사소하지 않았고, 무의미한 것들이 쌓여서 무의미하지 않았다. 화해하려는 노력이 더 큰 싸움을 일으켰다. 그 여자의 결론은 ‘지겹다‘는 것이었고, 나는 나의 지겨움으로 그 여자의 지겨움을 이해할 수 있었다. _ 대장 내시경 검사 중 - P125

사랑이라는 말은 이제 낯설고 거북해서 발음이 되어지지 않는다. 감정은 세월의 풍화를 견디지 못하고 세월은 다시 세월을 풍화시켜간다. _ 대장 내시경 검사 중 - P129

아마 이런 말들을 주고받았던 것 같다. 나와 나은희는 헤어짐을 받아들이고 있었고 사랑의 힘으로 거기에 저항해서 돌이켜 놓을 수 없다는 것,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지 않아도 서로 알고 있었고 뒷날을 기약하지도 않았다. _ 대경내시경 검사 중 - P131

나와 나은희는 작별에 관해서 말하지 않았고, 나은희가 미국에 간 뒤에도 연락을 이어갈 것인지에 관해서도 말하지 않았는데, 말을 피해갈수록 말은 더 공허하고 쓸쓸했다. 아마 나은희도 그 쓸쓸함을 느끼고 있었다. _ 대장 내시경 검사 중 - P132

-결혼은 물적 토대 위에서 가능하다. 신랑 신부가 안정된 수입의 바탕을 확보하는 일에 힘쓰기를 바란다. 사랑이 아니라, 연민의 힘으로 살아야 오래 살 수 있다.
라고 말했다. 하객들 중 나이 먹은 사람들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월롱동은 ‘물적 토대‘는 먹고살 만큼은 이루었으나, 날마다 몸과 마음을 부딪치며 살아야 하는 일을 지속시킬 만한 ‘연민의 힘‘을 길러내지는 못했다. ‘연민의 힘‘으로 살아야 오래 살 수 있다던 교수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이 일은 더이상 말하지 않는다. _ 대장 내시경 검사 중 - P141

후회 라기보다는 돌이켜지지 않는 것이 결국은 무너지듯이 영자와 헤어질 날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날이 언제인지는 알 수없지만 그다지 멀지는 않아 보였다. _ 영자 중 - P153

경쟁률은 경쟁의 틀에 갇혀 있는 자들을 모두 똑같이 만들면서 차별하는 것인데, 이걸 거꾸로 말해도 말이 된다. 노량진에서는 그렇다. _ 영자 중 - P159

저녁 여섯시 무렵에 노량진에서는 각자, 저마다, 혼자서 시장했는데 다들 너나없이 골고루 시장했다. 시장기는 개별적이면서 전체적이었고, 보편적이면서 고립무원이었다. 거리 전체가 시장했지만 수많은 시장기들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도 없었다.
저녁 여섯시 무렵에 시장한 구준생 백여 명이 컵밥 노점 앞에 줄을 선다고 할 때 그중 1.3 명 정도가 9급 시험에 합격했다. 경쟁률로 따지면 그렇다. 다들 시장하다고 해서 경쟁률이 바뀌지는 않는다. _ 영자 중 - P162

보름사리에는 바다의 모든 물고기와 조개들이 냄새를 뿜어내서 갯내음이 더 진해진다고 내 옆자리의 노인이 말했다. _ 영자 중 - P183

이춘갑의 시야는 자신의 생명이 아버지의 정충이었던 시절까지 거꾸로 더듬어갔으나 아무것도 걸리는 것은 없었다. ‘아버님‘이라니..… _ 저녁 대기 장기 중 - P92

오개남 역시 식당이나 동사무소에서 젊은 직원들에게 ‘아버님‘이라는 난데없는 호칭으로 불리는 사람일 터인데, ‘아버님‘이라는 말은 아무런 경로심을 포함하지 않는, 무인칭의 늙은이를 부르는 호칭이라는 것을 오개남을 보면 알 수 있었다. _ 저녁 내기 장기 중 - P96

대개의 소읍들이 반농반어이며 비산비야였다. 생성쓰레기가 썩는 비린내와 디젤 어선의 매연과 폐유 냄새, 과수원과 논밭의 농약 냄새, 항공방제한 산맥에서 흘러내리는 개울물의 소독약 냄새, 술 취한 군인과 민간인들이 골목에 싸지른 오줌의 지린내가 지층과 세월 속에 절여져서 냄새는 장마에도 씻겨내리지 않았다. 이춘갑의 기억 속에서 지나간 일상의 풍경은 몸속 깊이 스민 그 먼 냄새로 남아 있었다. _ 저녁 내기 장기 중 - P103

이춘갑은 문상을 가야 할 것인지 잠시 망설였다. 아내가 죽었다면 문상은 성립될 수 없었다. 전 아내는 남이므로 문상은 더욱 성립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죽은 자는 위로받지 못할 것이므로, 문상이 망자가 아니라 망자의 가족을 위로하는 행위라면 김영자의 새 남편을 위로할 수도 없었고, 아들을 위로할 수도 없었다. 그런 망설임의 결론이 아니라 멀리서 조여오는 졸의 공세에무너지듯이 그렇게 문상을 가는 것이겠거니 하고 이춘갑은 생각했다. _ 저녁 내기 장기 중 - P119

이혼한 남편은 전남편이지만 교도소에 간아들은 전 아들이 아니었다. 아들이 전 아들이 아니므로 이혼한 남편도 전남편이 아닐 것이었다. 칼로 치듯이 잘라낼 수 있는 과거는 없다. 지워지지가 않고 아니라고 우겨지지가 않는다._ 손 중 - P55

싱크대 배수관이 막혔거나 에어컨, 냉장고가 고장나서 수리공을 부를 때, 새로 산 세탁기를 배달시킬 때, 나는 여자 혼자사는 집안으로 낯선 남자를 들이기가 무서워서 철호의 구두를 꺼내 현관에 놓고 집에 남자가 있는 것처럼 위장했다. _ 손 중 - P58

자궁벽을 긁어서 지워버린 아이의 생명이 바늘 끝같이 작은 날벌레로 환생해서 내 방 장롱 밑에 서식하고 있는 환영이 떠올랐다. _ 손 중 - P61

그 성장과 결혼의 유형은 내 여고 동창생들의 생애와 다르지 않았다. 다들 그렇게 자라고 결혼해서 고향에 주저앉아 삼십 평쯤 되는 아파트를 장만하고 선후배와 친목회나 학부모의 인연으로 얽혀서 중년을 넘기고 있었다. _ 손 중 - P64

전남편이 재혼한 여자는 내 고등학교 삼 년 선배였다. 학교다닐 때 나와는 안면이 없었다. 결혼 전에 전남편과 어울려 다녔던 여자라는 것은 결혼 후에 알았다. 그 작은 도시에서는 애정이고 치정이고 불륜이고 간에 들통나지 않는 관계는 없었다. 그러나 전남편이 결혼 후에도 그 여자를 만나고 있었다는 걸 나는 알지 못했다. 아마 남들은 다 알았을 것이다. 나는 그 남녀관계에 개입하거나 간여하고 싶지는 않았다. 애정이 식은 증거라고 해도 할말은 없었다. 그 작은 도시에서 치정이 생활로 자리잡는 경우는 흔했다. 가르치던 여고생과 결혼해서 사는 남자 교사들도 있었다. _ 손 중 - P65

이혼에 이르기까지의 사유를 이루 다 말할 수 없고, 말하여질 수 없는 부분이 더 많을 테지만, 그날 저녁 수월천의 얼음에 실려 떠내려가는 개를 바라보면서 나는 전남편과 전 시어머니, 그리고 고향에 얽힌 사람들이 그렇게 비명을 지르며 멀어져가는 환영을 느꼈다. 이혼율이 해마다 늘어난다는 통계 숫자를 신문에서 읽으면서 나는 나의 생애가 숫자 속에 매몰되기를 바랐다. _ 손 중 - P69

우리는 침묵 속에서 알고 있었다. 나는 아이가 겪어낸 긴 여정보다도 아이의 침묵이 더 견딜 수 없었다. _ 손 중 - P73

약속과 맹세로 맺어진 인연이나 정액과 난자가 엉겨서 빚어지는 인연보다도 사진이 더 무서웠다. 주말에는 흐리고 서늘한 방에 누워서 그것들과 헤어질 수 있을 것인지를 생각했다. _ 손 중 - P76

마가레트는 죽어가는 자들에게 살아 있는 동안의 삶의 궤적을 묻지 않았다. 마가레트는 죽어가는 자들을 한 사람씩 개별적으로 씻겨서, 구원이나 인도가 아니라 동행의 방식으로 임종까지 함께 가서 망자들을 배웅했다. 망자들이 숨을 거두고 나면 마가레트는 늘 기도했다.
- 주여, 저를 이 사람보다 나중에 거두어들이시니 제가 이 사람을 배웅합니다. 주여, 이 영혼을 받아주소서.

_ 저만치 혼자서 중 - P217

봄부터 초겨울까지, 수녀원 마당에서 장미는 피고 지기를 잇대었고, 지면서 더욱 피었다. 꽃 한 송이는 죽음의 반대쪽에서 피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꽃이 지는 것이 죽음은 아니었다. _ 저만치 혼자서 중 - P229

김요한 주교는 장례미사 때 강론에서 말했다. 삶은 죽음을 배제할 수 없지만, 죽음은 치유 불가능한 몸의 유한성을 극복하는 구원의 문이다. 그러므로 부활한 예수의 빈 무덤에서 그리스도와 사도는 만나는 것이다. 라고. _ 저만치 혼자서 중 - P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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