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사지들을 두루 방문하고 나서 내게 남은 잔상은 오로지 이끼였다. 햇빛이 비스듬한 시각, 곁에 있는 사람의 옆얼굴에서나 보이던 솜털 같은 이끼. 길에 카펫처럼 깔린 이끼, 바위를 망토처럼 덮고 있는 이끼, 불상에 표정처럼 끼인 이끼. 팔다리나 머리가 잘린 채로 훼손된 석상도 아름답게 감싸며 세월의 깊이를 풍겨오던 이끼. _ 이끼 순례 중 - P158
모두가 찾아와 사진에 담게 되는 나무라서 좋다. 누가 사진에 담아도 멋질 수밖에 없는 멋지게 생긴 나무라서 더 좋다. 무엇보다 이나무를 맨 처음 만났던 그 거실을 떠올릴 수 있어서 좋다. _ 누구나의 나무 중 - P182
복잡한 네트워크 안에서 맺어진,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관계 맺기가 아니라 그냥 지나칠 사람에게서 그냥 지나칠 정도의 따뜻함을 살포시 얹어보는 수수한 마주침. 통성명 없이도, 전화번호를 교환하지 않은 채로도, 누군가와 마주하는 일. 목소리는 조금 퉁명스러워도 표정에는 구수함이 묻어 있다거나, 이마에 흐른 땀을 옷소매로 훔쳐내면서 인심을 쓰며 씨익 웃는다거나, 그렇게 실재하는 사람을 마주치는 일. 돌아서는 뒷모습에다 대고 기약 없이 또 보자고 괜히 한마디를 얹어보는 일. 나와 유관할 리 없는 이에게서 얻는 수수하고 별것 없는 다정함. 내가 요즘 가장 간절하게 되찾고 싶은 감각이다. _ 수수한 마주침 중 - P243
결속력 없이도 행할 수 있는 다정한 관계, 목적 없이도 걸음을 옮기는 산책, 무용한 줄 알지만 즐기게 되는 취미생활, 이름도 알지 못하는 미물들에게 잠깐의 시선을 주는 일,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은 채로 멍하니 앉아 있는 시간, 싱거운 대화, 미지근한 안부 식물처럼 햇볕을 쬐고 바람을 쐬는 일. 인연이 희박한 사람, 무관한 사람, 친교에의 암묵적 약속 없는 사람과 나누는 유대감. 이 수수한 마주침을 누리는 시간이 나는 회복이라고 생각한다. 그 시간에 사람은 목소리와 표정과 손길로 실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_ 수수한 마주침 중 - P245
좋은 시간을 보낼 때에 휴대폰을 꺼내지 않는다. 그러는 게좋은 시간에 대한 나의 예의라고 여긴다. 그럴 때는 당연히 카메라도 꺼내지 않는다. 꺼낼 생각을 하질 못한다. 주로 좋은 순간들을 잘 겪고 난 이후에나 사진을 찍는다. 잔향처럼 좋은 공기가 나를 둘러싸고 있을 때에 그 좋음이 내 눈망울에 담겨있을 때에, 내가 찍은 사진을 나는 마음에 들어 한다. 아주 드물게, 그런 식으로 평생 간직할 한두 장의 사진이 생긴다. _ 공기 중 - P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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