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치아의 종소리 스가 아쓰코 에세이
스가 아쓰코 지음, 송태욱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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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에 ‘dangling in the air‘ 라는 표현이 있다. 보통 어중간하게 매달린‘ 정도로 번역하겠지만 그보다 무책임하고 버림받았다는 어감이 더 강하고, 홀로 우주에 남겨져 바람에 흔들리는 듯한 쓸쓸함이 느껴진다. 종착역 벤치에 앉아 있는 몇 시간 동안, 첫번째 기숙사와 다음 기숙사 사이의 골짜기에 낀 꼴이 돼버린나는 다름아닌 ‘dangling in the air‘ 상태로 끝없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_ 칼라가 핀 정원 중 - P102

바로 앞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지척에서 노트르담대성당이 하얗게 빛나며, 한낮의 푸른빛이 남은 밤하늘을 배경으로 흘러넘치는 조명을 받고 두둥실 떠 있었다. 센 강가의 화려한 남쪽 면을 아낌없이 보여주면서. 트랜셉트 돌출부 한가운데 위치한 등근 장미창 안쪽에는 섬세한 흰색 석재 틀을 두른 기하학적 무늬의 꽃잎이 얼어붙은 불꽃처럼 시커먼 유리 부분을 감싸안고 조용히 반짝였다. 우주를 향해 활짝 핀 신비한 흰 장미. 트랜셉트와 네이브의 지붕 능선이 십자로 교차하는 지점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솟은 가늘고 날카로운 첨탑. 정신의균형과 도시적인 세련미가 극에 달한 파리의 대성당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_ 대성당까지 중 - P145

"스스로 대성당을 짓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완성된 대성당에서 편하게 자신의 자리를 얻으려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샤르트르 대성당으로 가는 길에서 나는 내 안의 대성당을 떠올리며, 도쿄의 두 친구는 지금쯤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생각했다.
_ 대성당까지 - P155

이틀이나 걸어놓고 정작 대성당에 들어가지 못한 친구들과 함께 역으로 향하는 어두운 언덕길을 내려가면서, 나는 평생 기다리기만 한 성자의 삶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_ 대성당까지 중 - P164

공상과 거짓말, 허구가 박쥐처럼 날개를 달고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뒤섞인 끝에, 다케노 부인은 신문을 통해 내 남편이 죽었음을 알고 곧바로 애도의 전화를 걸기로 했다. 물론 나는 밀라노에 있으니 우리 가족 누군가에게 애도의 뜻을 전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수화기 너머에서 본인이라는 사람이 불쑥 튀어나온 것이다. 가볍게 흘러가던 다케노 부인의 게임에서 죽음이란 너무나무거운 현실이었다. 그때까지 순조롭게 부풀어오르던 상상의 풍선이, 내 진짜 목소리를 듣는 순간 팡, 작은 소리를 내며 터져버렸다. _ 하얀 방장 중 - P211

엷은 어둠이 깔린 인적 드문 길을 걷다보니 공기가 벚꽃색으로 물들고, 소리 없는 음악 속을 더듬거리며 헤매는 기분이었다. 바닥에 흩어진 꽃잎이 주위를 아련하게 비추었다.
"이제 갈 시간인 것 같네요." _ 카티아가 걷던 기ㄹ 중 - P234

그러면서도 ‘농담을 아는 사람‘과 ‘농담 하나 할 줄 모르는 사람‘을엄밀하게 구별하며 농담을 모르는 인종을 은근히 경멸했다. 그리고 그 재미없는 종족의 대표가 바로 시댁 사람들이었다.
_ 여행의 저편 중 - P243

여름이 끝나가는 파에스툼 유적의 들판에 나는 홀로 서 있었다. 도착해 차에서 내리자 다들 제각각 흩어져버린 것이다. 천천히 기울기 시작한 해가 갑자기 속도를 더해 숲 건너편 바다로 잠겨가는 시간이었다. 오렌지를 짠 듯한 빛이 두 개의 신전 중 다른 하나를 압도하며 한층 높아 보이는 포세이돈 신전을 감쌌고,
말을 잃고 서 있는 나 역시 감귤 같은 색으로 물들었다. 그리스신전은 처음 보았다. 완전한 것이 늘 그렇듯, 위대한 조화가 자아내는 평온함으로 인해 거의 인간의 손을 거치지 않고 존재한다고 느낄 만큼 교묘한 착각의 그물이 한동안 나를 고스란히 감쌌다. _ 아스포델 들판을 지나 중 - P273

휑뎅그렁한 무젤로 거리의 집에서 아침에 눈을 뜨고 온통 흰빛으로 가득한 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해가 진 파에스툼의 들판에서 어딘가로 사라져버린 페피노를 돌부리에 걸려가며찾아다니는 내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아스포델이 꽃 이름인지, 그저 망각을 의미하는 보통명사인지는 아직 확실히 모른다. _ 아스포델 들판을 지나 중 - P278

런던을 떠날 때는 화창하던 하늘이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잿빛으로 변하는 광경을 보며, 내 감각으로는 도쿄에서 오사카 거리쯤으로 느껴지는 에든버러 역에 도착한 것은 늦은 오후였다. _ 오리엔트 특급열차 중 - P285

죽음을 앞두고도 아버지는 여전히 젊은 날의 여행을 생각하고있다. 파리에서 심플론 고개를 넘어 밀라노, 베네치아, 트리에스테까지, 분주한 시간 속을 달려 도시의 소란에서 소란으로 젊은 그를 데려다준 푸른 열차를 잊을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비행기 안에서 내내 움켜쥐고 있던 와곤릿 사의 파란색 침대차 모형과 흰색 커피잔을, 병자가 놀라지 않도록 살며시 침대 옆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곁눈으로 그것을 보던 아버지의 의식이 점점 희미해져갔다. _ 오리엔트 특급열차 중 - P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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