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뽕‘을 기대했는데 난데없이 ‘학뽕‘이 등장해 당황했지만 ‘공부 열심히 해서 훌륭한 사람 돼라.‘ 라는 메시지가 ‘공부=성적’의 K식 교육관과 만나 빚어내는 향기에서 씁쓸그윽하게 ‘K’를 느꼈다. 그래도 그 사이에서 빛난 주최 측의 조심성과 균형감각, 어딜 가든 우리를 굽어봐 주던 월출산, 신나게 축제를 즐기는 영암인들의 모습과 고장에 대한 자부심, 미처 다 먹고오지 못한 맛난 남도 음식들, 그리고 비………. 이 축제에는 그런 것들이 가득 있어 부렀다. _ 영암왕인문화축제 중 - P50
지방 소도시의 침체야 하루 이틀 일이 아니지만 한때의 풍요를 누린 후 사람들이 빠져나간 탓에 유독 그림자가 크게 느껴지는 곳들이 있다. 처음 와 본 영산포가 그랬다. 일제가 수운을 이용한 곡물 수탈을 위해 일찌감치 등대를 설치할 만큼 번성했던 이곳은 옆 동네인 나주와 합쳐지며 그 하위 행정구역이 되었다. 그러니까 영산포는 ‘지방의 도심’도 아닌 ‘지방의 부도심‘, 이촌향도의 직격탄도 더 빨리 더 세게 맞을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1년에 한 번 열리는 축제 날인데도 동네에서 활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고, 범상치 않은 오라를 뿜는 홍엇집들이 늘어선 ‘600년 전통 홍어의 거리‘에도 오가는 발걸음이 없었다.(모두가 축제장에 몰려가서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_ 나주 영산포홍어축제 중 - P67
따지고 보면 이 축제 자체가 이러한 영산포를 어떻게든 살리고 저떻게든 알리기 위한 발버둥인 셈이다. 전국적 인지도를 갖춘 유일한 특산물인 홍어를 두고 허송세월할 수도 없잖은가. 이런 걸 해 봤자 지역 재생에 극적인 변화가 있을 리없다는 걸 알지만 이조차 하지 않을 수는 없는 축제. 얼마나 요식이든 어쩔 수 없이, 하지만 그럴싸하게 만들어 내야만 할 축제, 영산포에서 유독 진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다른 지방자치단체들도 비슷한 딜레마를 갖고 있을 것이다. _ 나주 영산포홍어축제 중 - P68
한데 이 의령의 먹거리들이 꽤나 흥미로웠다. 대표 음식인 망개떡은 망개나무 잎에 싸서 찐 떡으로, 여러 유래 중 임진왜란 때 의병들의 식량이었다는 설이 가장 유명하다. 잎으로 싸매 흙이나 벌레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데다가 잎에 천연방부제 역할을 하는 성분까지 있어 오랜 기간 산에서 지내며 싸워야 했던 의병들에게 유용했다고. 의령 출신 독립운동가 안희재 선생이 독립군 식량으로 활용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300여 년의 세월을 건너 임란 의병의 손에서 독립군의 손으로 건네진 떡이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찡했다. _ 의령 의병제전 중 - P75
애국은 적어도 우리와 우리 주변 사람들에게는 ‘구린‘ 것이었다. 나라가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강요해 온 대부분의 것들이 구렸고, 나라가 애국이라는 이름을 들먹이는 경우 대부분 뒤가 구렸다. 그랬기에 축제에 오기 전 김혼비는 마뜩잖았고 박태하는 다소 심술궂었다. 미안했다. 의병 개개인의 삶의결을 추상적 가치로서의 ‘애국‘으로 뭉뚱그려 버리는 게 K-민족주의라면 그에 대한 반발심으로 그 어떤 진심들마저 ‘구림‘으로 뭉뚱그려 버린 게 우리가 한 일이었다. 애국이니 민족주의니 하는 것도 어디 따로 뚝 떨어져 존재하는 가치가 아니라 결국 우리와 비슷한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주변의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 나선 싸움과 마음의 합이라는 걸 느낄 때 평소 ‘쿨함’으로 덮어 둔 마음 한 쪽이 열려 버린다. 이 분분하고 분연한 마음들을 어떻게 쿨하게만 넘길 수 있을까. _ 의령 의병제전 중 - P80
축제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만날 K는 애국심이나 민족주의 같은 것들일 줄만 알았다. 하지만 실제로 만난의병제전은 오히려 어떤 면에서 K를 넘어서는, 구시대적으로보일 수도 있지만 쉽게 포기하지 않는 어떤 ‘디그니티‘를 품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의외의 곳에서 결국 K를 만난다. 재벌들의 생가를 돌면서 부자들의 기를 받는 투어라니. K-자본주의와 K-샤머니즘의 이 단단한 결합. 이걸 이길 K를 우리가 다른 축제에서 찾을 수 있을까? 인구 3만 명이 안 되는 작은 도시 의령이 찾은 진짜 살길은 의병이 아닌 재벌이었다. 자본은악, 의(義)는 선, 이런 말을 하려는 건 아니다. _ 의령 의병제전 중 - P88
그런 점에서 애초에 ‘아리랑이란 무엇인가.’ ‘왜 밀양 아리랑인가.’ 같은 질문을 놓지 못한 우리가 고지식하고 순진했다. 축제란, 아니 K-쇼란 본디 그런 본질적인 질문 대신 우리가 왜 짱인가‘를 증명하기 위해 ‘관련’될 수 있는 모든 것을(관련 없을 것 같으면 ‘관련’의 의미를 무한 확장해서라도) 때려 넣어보여 주면 되는 것이었다. 부재한 철학은 중구난방 콘텐츠로, 중구난방 콘텐츠는 음향·조명·스케일을 최대치의 ‘고퀄‘로 뽑아내어 잘 커버하는 것이 K-쇼의 척도라면 ‘밀양강 오딧세이’는 예상을 훌쩍 넘는 양과 질로 흠잡을 구석 없는 쇼다. 축제 기간에 밀양에 갈 일이 있다면 꼭 한번 보라고 추천할 수도있겠다. K에게서 늘 배우는 교훈은 일관되게 일관성이 없으면일관성이 생긴다는 점이다. K에게 가장 아쉬운 점이면서 동시에 (불가피하게 선택할 수밖에 없는) 어떤 힘이기도 한, ‘이렇게 까지’를 통해 가닿는 K-뚝심. _ 밀양 밀양아리랑대축제 중 - P104
술은 새콤하고 구수하면서 부드러워 잘도 넘어갔다. 유난히 싫은 것과 좋은 것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축제였고 덩달아 감정 기복도 극명했던 탓에 지쳤던 듯하다. 그런 상태로 장터에 앉아 맛있는 술을 나눠 마시고 있자니 어쩐지 "용서와 위로가 사랑으로 넘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되어 마음속에 여전히 걸려 있던 ‘어쩌라고‘와 ‘어쩌려고‘와 ‘어쩌자고‘ 들도 술과 함께 어쩔시구 자알, 넘어갔다. 어쩌면 이게 아리랑의 정신인지도 모르겠다. 어떤 토로이면서도 연가이면서도 흥이면서도 체념이기도 한. _ 밀양 밀양아리랑대축제 중 - P111
품바도 품바의 관객들도 같이 나이 들어 가고 있다. 지금 이 세대가 이 땅에서 사라지면 품바들은 다 어떻게 될까? 현재로서는 시대 단절적인 문화의 산물로 보이는 장터 품바들이 과연 세대를 건너서까지 사랑받을 수 있을까? 살아남는다면 그때는 어떤 형태로 어떤 가치를 갖게 될까? 가치판단도 미래 예측도 도무지 할 수가 없다. 다만 시간의 흐름과 사회의 거대한 변화 속에서 누구도 너무 멀리는 뒤떨어지지 않기를, 아무도 너무 갑자기는 외로워지지 않기를. _ 음성품바축제 중 -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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